이정호(전 민주노총 비정규실장)
민주노총과 사회단체가 10월 18일 ‘노조하기 좋은 세상 운동본부’를 출범했다. 11월 1일엔 ‘직장갑질119’라는 단체도 출범했다. 모두 광장의 촛불을 일터의 촛불로 만들려는 모임이다. 두 모임은 노동권을 중심에 뒀지만, 전자는 직접 ‘노조’를 호명했고, 후자는 당장은 ‘노조’란 이름을 붙이진 않았다.
오늘은 후자인 ‘직장갑질119’란 모임을 만든 산파를 찾아 나선다. 노동건강연대 박혜영(35) 활동가를 만났다. ‘직장갑질119’는 신조어가 돼 버린 ‘직장갑질’에 특급 소방수로 나섰다. ‘119’는 ‘일터를 일터답게 바꾸는 모임’이란 뜻도 담았다.
노동건강연대는 1988년 원진레이온에서 온도계를 만들다 수은중독으로 죽어간 15살 소년 문송면의 산재 투쟁에서 출발했다. 당시엔 ‘노동과건강연구회’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노동과건강연구회는 1999년 산재추방운동연합(산추련)으로 성장했고, 2001년 ‘노동건강연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노동건강연대는 일터 안팎에서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싸워왔다.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활동가
최근 노동건강연대는 청년노동자처럼 산재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노동건강에 주력해왔다. 지난해 구로공단의 넷마블 사건을 계기로 IT업종의 살인적 장시간노동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IT업종 노동자들은 넷마블을 ‘구로공단의 등대’라고 불렀다. 그만큼 야간노동이 심했단 뜻이다. 장시간노동으로 숨지는 일까지 벌어지자 노동건강연대는 온라인에 방을 하나 만들어 IT업종의 노동실태를 설문조사했다. 100명만 받아도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1주일만에 500명 넘는 IT노동자가 답했다.
당시 설문조사 문항은 여느 노동단체의 설문지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설문 작성에 직접 참여했다. ‘한달 평균 휴일 출근 횟수’나 ‘최장 연속근무시간’ 같은 질문들은 업계의 용어로 바뀌었다. 이 설문지 구조화 작업엔 노동건강연대 박혜영 활동가가 참여했다. 박 씨는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일하며 노무사 자격증을 딴 뒤 노동건강연대에서 상근활동을 해왔다. 전공이 컴퓨터공학이라 온라인 설문을 짜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전공을 살려 해당 업종에 일하는 친구와 후배들과 함께 설문지를 만들었다.
설문결과를 발표한 뒤 온라인 방에 다시 들어갔더니 IT업종 종사자들끼리 대안을 놓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20~30대 청년노동자들이 노동문제에 무신경한 줄 알았는데 그건 노동판 꼰대들의 편견이었다. 박 씨는 폭발적인 설문 답변과 활발한 토론을 보고 청년노동자를 위한 온라인 조직화의 가능성을 점쳤다.
▲ 박혜영 활동가가 지난 6월 광화문에서 열린 최저임금 1만원 공동행동이 주최한 문화제에서 발언하고 있다. [출처: 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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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알쓸노건’ 2천부 완판
노동건강연대는 올 봄 <알아두면 쓸모있는 노동과 건강 – 청년노동자 건강생활 가이드>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편의점과 택배, 배달과 퀵서비스, 대리운전, IT노동자, 공장알바를 하는 청년노동자들이 유의해야 할 건강 관련 정보들을 담았다. 처음엔 이 60쪽 남짓한 소책자를 얼마나 챙겨볼까 했다. 천부를 인쇄했지만, 500부나 나가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비매품으로 만들어 온라인에 소개했더니 전국 각지에서 보내달라는 이메일이 쏟아져 2쇄까지 모두 2천부를 찍어 다 나갔다. 박 씨는 “어느 고시원 몇호에 1~2부씩 보내달라는 식으로 전국 각지의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청년노동자들이 소책자에 호응해줘 우편요금이 만만찮게 들었다”고 했다. 은폐된 청년노동자들의 요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박씨는 “이들이 파편화돼 있고, 자신을 대변할 스피커를 갖지 못해 그렇지 이들도 자기노동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한 편의점에 주중 주말 3교대 하면 모두 6명이 일하는데 점주가 일하는 시간을 빼면 보통 4~5명의 노동자가 일한다. 전국에 4대 메이저 편의점만 3만 개가 넘는다. 약 15만 명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들 청년노동자를 당장 노조로 조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민주노총이 절박하게 이들을 조직할 엄두를 내지 않기도 하지만, 이들 청년노동자도 굳이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에 크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 자기노동에 대한 권리에 눈감고 있진 않다.
박 씨는 “이런 노동자들을 굳이 지금 당장 오프라인 중심인 노동조합으로 모으기보다는 같은 업종별로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 그 속에서 자기문제를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비없세) 같은 여러 단체에 이런 고민을 담은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없세도 올 봄부터 대안노동운동에 대해 몇 달동안 내부토론을 이어왔다.
▲ 노동건강연대가 만든 청년노동자를 위한 ‘알쓸노건’ 소책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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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노동에 온라인 큰집
‘직장갑질119’는 노동건강연대와 비없세,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청년노동단체, 노동법률단체들이 모인 10월 26일 5차 회의에서 노조없는 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온라인 공간을 주요 활동무대로 잡고 해당 플랫폼 업체들과 공동사업을 위한 접촉에 들어갔다. 노동상담센터를 운영중인 알바천국과 ‘JOB&’ 같은 게시판을 운영하는 네이버, 온라인 벼룩시장, 교차로 등을 만나고 있다. 노조없는 노동자들이 노동관련 정보를 얻는 유입경로를 확보하자는 취지다. 동시에 콜센터와 물리치료사, 자동차정비, 방송사 비정규직, 기간제교사, 어린이집교사, 커피숍 등 해당노동자들과 만나 사업취지를 설명하고 함께할 사업내용도 잡아가고 있다.
‘직장갑질119’는 일터를 바꾸고 싶지만 노조를 만들긴 어려운 노동자를 온라인 공간에 모아 함께 해결방안을 모색해, 집단적 문제해결에 나서고, 해결과정을 알려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 별도의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플랫폼을 활용할 계획이다. 직종별 모임에서 자신이 겪은 갑질과 부당한 경험을 토로하면서 법률가와 활동가, 예술가, 연구자들의 도움으로 해결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한다.
‘직장갑질119’는 몇 달을 같이 일해도 이름조차 모르는 파편화된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의 끈을 자처한다. 이들은 한 직장에서 잘해야 6개월 일하는 게 고작이라, 기업별노조로 묶일 수도 없다. 편의점 노동자는 근무교대 때 잠깐 얼굴 보는 것 외에 동료를 만날 수도 없다. 커피숍 노동자도 같은 공간에서 일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쉬기 때문에 동료와 직장 얘길 나눌 시간은 없다. 이런 노동자에게 기업별 노조는 먼 나라 얘기다.
밴드 방에 2천 명이 모였던 자동차 판매노동자들이 금속노조 가입이 지연되자 1/10로 줄어든 것처럼, 협회나 단체로 수만 명씩 모인 온라인 공간의 노동자들이 노조로 옮겨오면서 소수로 전락하기 일쑤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노조의 진입장벽은 크다. 물론 온라인 공간의 위험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익명의 늪에서 모임을 자기문제 해결을 위한 자판기쯤으로 여기는 일도 생길 수 있고, 회사 관리자들의 진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방안도 만들어야 한다.
청년노동권 경종 울린 ‘메탄올 실명’
노동건강연대는 지난해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삼성전자 휴대폰 부품공장에서 일하던 20대 파견노동자가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했을 때 노동자 건강권 운동에 함께했다. 박 씨는 추가 피해자를 찾으려 민주노총 인천본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9개월 뒤 추가 피해자가 나왔다. 추가 피해자는 이미 실명한 뒤라 언론보도를 접하지도 못했다. 원청은 1차 하청사까지만 관리하기 때문에 3차 하청사였던 해당 공장에 대해선 책임이 없다고 나왔다.
박 씨는 메탄올 실명사건을 UN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급작스레 중도 실명을 당한 젊은 노동자들은 감정기복도 심해 삶의 끈을 놓으려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렸지만 기업은 침묵했다. ‘직장갑질119’ 준비회의에서 만난 박 씨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흩어진 청년노동자들이 숨 쉴 큰 집을 지으려 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그도 82년생이다.[워커스 36호]
▲ 메탄올 실명사건을 UN에 제소하려고 피해자들과 함께 출국장에 선 박혜영 노무사 [출처: 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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