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미국인 래퍼 탈립 콸리는 미국의 한 공항에서 탑승을 거부당한 후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이들은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 교통안전국(TSA) 소속 요원들이었다. 래퍼들이 총기나 대마초, 폭력 문제로 체포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지만 콸리는 그런 종류의 위법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탈립이라는 본명이 미국과 전쟁 중이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같은 의미의 아랍어 단어라는 점이 걸렸지만 그는 탈레반이나 빈 라덴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고 무슬림도 아니었다. 이미 그의 최근 행적을 알고 있던 요원들은 조사 중 그가 예상하지 못한 한 인물을 언급했다. 그 이름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었다. 그제서야 콸리는 자신이 표 예약을 위해 통화할 때 이 혁명가의 연설을 틀어 놓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 연설은 음악 작업을 위해 수집한 자료 중 하나였다. 콸리는 이때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요원들이 총격과 살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갱스터 래퍼들이 아니라 이미 사망한 운동가의 옛 연설을 들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감시한 사실에 놀라워했다.
미국 수사기관은 실제로 래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뉴욕 경찰은 제이지나 디디 같은 여러 힙합 음악인들의 정보를 수집해 왔고, FBI는 블랙팬서 혁명가의 아들인 갱스터 래퍼 투팍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수사 당국이 보기에 위험한 운동가의 연설을 듣는 래퍼는 주시할 가치가 있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들의 판단이 맞았다.
카마이클의 연설에서 영감을 얻은 콸리는 이후 랩으로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게 됐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이라는 본명으로 더욱 알려진 콰메 투레는 1941년 영국령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랐다. 1960년 하워드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미국 남부를 돌아다니며 인종 격리 관습에 도전한 ‘프리덤 라이더스’에 가담하며 시민권 운동에 동참했다. 수십 차례의 체포와 구타, 구금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열성적인 운동가였던 그는 점차 백인 자유주의자들과 민주당에 의존해 개혁을 주장하는 시민권 운동에 지쳐 갔다. 인종주의 체제는 너무나 강력했고, 시대는 더욱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대학 졸업 후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 대표가 된 투레는 1966년 ‘블랙 파워’라는 새로운 운동 노선을 제시해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프란츠 파농과 맬컴 엑스의 혁명적 사상에 영향받은 그는 흑인이 백인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혁명을 이루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 폭력도 불사하겠다고 주장했다. 시민권 운동가들은 평등을 요구하는 대신 미국을 타도하자는 그의 연설에 경악했지만 많은 청년들은 복서 무하마드 알리처럼 당당하게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에 환호했다. 흑인 운동 분쇄의 대가였던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그를 맬컴 엑스의 뒤를 이을 “메시아”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 있으며 위협적이라고 평가했다. 투레는 시민권 운동가들과 거리를 두었고, 자신처럼 흑인의 무장을 주장하던 블랙팬서당에 가담해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계 혁명을 추구한 블랙팬서당의 국제주의자들은 백인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하고자 했고, 반대로 투레는 백인 운동가들이 백인 사회 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노선 차이에 FBI의 분열 공작이 더해져 투레는 블랙팬서당을 떠났고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와도 관계를 끊었다.
▲ 콰메 투레. 전아프리카인민혁명당의 깃발과 세코 투레의 초상이 보인다.
[출처: https://www.africanexponent.com/bpost/4197-ture-urged-black-activists-to-tell-their-stories]
투레는 이제 범아프리카주의라는 대의에 몸을 실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세계적 가수 미리엄 마케바와 결혼한 그는 1969년 서아프리카의 기니로 건너갔고, 스토클리 카마이클 대신 콰메 투레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이름은 기니의 대통령 세코 투레와 쿠데타로 실각한 후 기니에 망명해 있던 가나의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이후 그는 30년 동안 사회주의적이고 범아프리카주의적인 신념을 고수하며 은크루마가 세운 기니의 정당인 전아프리카인민혁명당(AAPRP)의 조직가로 세계를 돌아다녔다. 늘 “혁명 준비 완료”라는 말로 전화를 받았던 그는 자신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음모로 암에 걸렸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는 1998년 57세의 나이로 기니에서 사망했다.
블랙 파워라는 단어나 그 의미는 수많은 랩 음악에 나타나고 진지한 래퍼들은 직접적으로 투레에게 존경심을 표시하지만 케이아르에스원(KRS-ONE)만큼 투레를 존경하는 래퍼는 찾기 어렵다. 1980년대 말 시민권 운동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그는 당시 함께 동행하곤 했던 투레에게서 직접 운동의 역사와 의미를 배웠다. 그는 사람이 누구나 인종 이전에 인류임을 강조한 투레의 영향을 받아 많은 래퍼들을 규합한 ‘H.E.A.L.(Human Education Against Lies)’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는 힙합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수 있다면 더 낫게 만들 수도 있다는 믿음을 30년 이상 고수했고, 투레가 사망하기 얼마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스승의 영혼과 자신의 사명을 다시 느꼈다고도 회고했다.
케이아르에스원의 그룹 부기다운프로덕션스가 1990년 발표한 앨범 ‘Edutainment’에서는 투레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혁명적 수사들이 가득한 이 앨범에서 투레는 같은 뜻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Ya Strugglin’이라는 곡에서 투레는 자본주의로 눈이 흐려진 미국의 아프리카인들이 주인을 닮으려고 애쓴다고 이야기하고, 퍼머(perm)에 집착하는 흑인 여성에게 그것은 영구적인 것(perm)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케이아르에스원 역시 남성 아르앤비 가수들이 이성애자 같지 않으며 여성처럼 외모를 꾸미는 일에나 몰두한다고 조롱한다.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이 곡은 사실 투레의 블랙 파워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주체적인 남성적 에너지를 드러냈지만 여성을 주변화하는 경향 또한 드러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블랙 파워 운동은 같은 시기 여성과 동성애자 해방 운동에 몰두하던 이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단호하게 억압자들의 질서를 거부해야 한다는 힌트를 주었다. 그 역설적 힌트가 작용할 때 운동의 급진성은 가장 빛났다. 힙합에서도 비슷했다. 케이아르에스원을 비롯해 급진주의 전통을 받아들인 래퍼들의 음악은 지극히 남성중심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이 외면한 흑인 여성을 대변할 위대한 래퍼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 대표주자인 퀸 라티파의 말이다. “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아. 난 고상하지도 의견을 숨기지도 남성의 뒤에 머무르지도 않지.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살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냐. 난 여성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내리고 있어. 간단히 말해 난 사회가 인류의 절반에 대해 결정해 온 것들에 동의할 생각이 없어. 나는 한 개인이거든.”[워커스 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