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역사연구자)
“무툴루 샤쿠어, 제로니모 프래트, 무미아 아부자말, 세코 오딩가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 래퍼 투팍이 교도소에 다녀온 후 발표한 <All Eyez on Me> 앨범 속지에 남긴 문장이다. 언급된 네 사람은 모두 블랙팬서당과 흑인해방군 같은 급진적 흑인 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앨범이 발표된 1996년 당시 살인이나 강도 등의 혐의로 최소 25년에서 사형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상태였다. 그러나 투팍이 보기에 이들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흑인 해방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혀 있는 정치범들이었다.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가사는 투팍의 곡에서 대단히 자주 등장하는데, 그가 유독 이 문제에 집착한 이유는 자신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다.
투팍은 부모를 포함한 가까운 흑인 급진주의자들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블랙팬서 당원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투팍을 임신했을 때 경찰서 폭파 모의 혐의로 구속돼 법적 공방을 벌였고 출산 직전 겨우 무죄로 석방됐다. 투팍의 계부였던 무툴루 샤쿠어는 흑인해방군의 지도부로 활동하던 1981년 3명이 사망한 강도 사건에 연루돼 FBI의 10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1986년 체포된 후 60년형을 선고받았다. 투팍의 대부 제로니모 프래트는 블랙팬서당의 고위 인사로, 투팍이 태어날 때 이미 강도살인 혐의로 수감돼 있던 유명인사였다. 그는 27년을 복역한 후인 1997년에야 재판 과정의 위법성이 인정돼 풀려났다.
투팍의 대모 아사타 샤쿠어의 사연은 특히 극적이다. 블랙팬서당과 흑인해방군에서 활동한 그녀는 1973년 경관 살해를 포함한 다수의 혐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교도소에서 6년을 보낸 후인 1979년 그녀는 흑인해방군 동료 무툴루 샤쿠어와 세코 오딩가 등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수년간의 도피 후 그녀는 1984년 쿠바로의 망명에 성공했고 계속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2013년 그녀는 FBI의 최우선 검거 테러리스트 명단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되었고, 2017년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녀의 송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 무미아 아부자말의 구명을 위해 힙합 뮤지션들이 언바운드 올스타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Mumia 911′ 앨범의 표지
https://www.rapmusicguide.com/cd/13213/unbound-allstars-mumia-911 |
무미아 아부자말의 사건 역시 주목할 만하다. 블랙팬서당 출신 라디오 기자였던 그는 1981년 자신의 동생이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권총으로 경관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가 경관을 쏘지 않았다는 여러 증거가 제시됐지만 결국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인종차별적인 미국 사법 제도의 희생자로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99년 그의 사형 집행이 임박하자 교황을 비롯한 유명인사들이 동참한 세계적인 구명 운동이 일어나 집행이 유예됐고, 이후 그에게 유리한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그는 2011년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감형됐다.
투팍의 사례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힙합 뮤지션들에게 흑인 정치범들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의 래퍼 중 대다수는 미국에서 가장 교도소에 많이 가는 인구 집단인 젊은 흑인 남성이다. 이들은 흑인 남성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감률이 미국의 잘못된 정책과 인종 차별이 작용한 결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이 누명 의혹이 제기된 흑인 정치범들의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자신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뉴욕의 교도소 수감자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겠다고 한 나스나(‘If I Ruled the World’),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정치범이었던 만델라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그의 수감 장소를 방문하기도 한 켄드릭 라마의 사례는 그리 유별나다고 할 수도 없다.
아사타 샤쿠어의 이름은 퍼블릭 에너미에서 제이지에 이르는 수많은 힙합 뮤지션들의 곡에 등장하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커먼의 사례다. 커먼은 쿠바에서 아사타 샤쿠어를 만난 후 2000년 ‘Song for Assata’라는 곡을 발표했다. 그는 이 곡에서 아사타의 사연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녀가 누명을 쓰고 있다고 변호했고, 모든 억압받는 이들과 투쟁하는 이들에게 곡을 바쳤다. 그는 이 곡 때문에 비난과 불이익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가 2011년 백악관 행사에 초대되자 경관 살해범을 옹호하는 곡을 쓴 자를 초대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등장했고, 2015년에는 아사타의 사건이 발생한 뉴저지에서 경관들의 항의로 예정된 대학 연설이 취소되기도 했다. 커먼은 자신의 딸에게 아사타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아사타 샤쿠어를 존경했는데, 이런 부모가 커먼 혼자만은 아니었다. 비슷한 이유로 아사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래퍼 사락(Sa-Roc)이 아사타 샤쿠어의 탈옥을 도왔던 무툴루 샤쿠어를 위한 자선 공연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어찌 보면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미아 아부자말에 대한 음악인들의 연대는 장르와 국가를 넘어 나타났는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나 첨바왐바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힙합계에서는 무미아의 사형 집행이 임박했던 1999년 의식 있는 래퍼들이 단체로 모여 언바운드 올스타스라는 이름으로 ‘Mumia 911’이라는 곡을 발표한 것을 주요 사례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외에도 수많은 래퍼들이 꾸준히 무미아의 석방을 요구하는 가사를 써 왔다. 특이한 사례는 1995년 케이아르에스원(KRS-One)이 발표한 곡 ‘Free Mumia’다. 이 곡은 제목만 보면 무미아의 무죄와 석방을 주장하는 곡처럼 보이지만 정작 가사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이 곡은 보수적인 흑인 유명인사들에게 힙합의 폭력성을 비판할 시간에 무미아 구명 운동에나 나서라고 응수하는 곡이다. 랩은 폭력을 조장한다고 비난받아 왔지만 미국은 랩이 탄생하기 전부터 폭력적이었다는 것이 케이아르에스원의 생각이었다. 그에게 힙합은 폭력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는 또 다른 무미아였다.
▲ 엠시 솔라와 사이사이의 곡 ‘김성만을 위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ik0s4q0qo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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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힙합 뮤지션들의 정치범을 위한 연대의식은 국경이나 인종을 뛰어넘기도 했다. 세네갈 출신으로 프랑스 힙합의 전설적 인물이 된 엠시 솔라는 1991년 프랑스 레게 그룹 사이사이와 함께 한국의 정치범 구명을 위한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의 제목은 ‘김성만을 위하여Pour Kim Song-Man’로,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성만의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1991년 국제사면위원회가 선정한 세계 30인의 양심수 명단에 포함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제작한 그의 다큐멘터리에 엠시 솔라 역시 작업의 일환으로 참여했다. 김성만은 19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98년 13년의 수감을 마치고 석방됐다. 그러나 그와 함께 체포돼 오랜 수감 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1985년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8년 현재 황대권의 재심이 진행 중이고, 출소 후 보안관찰법에 불응해 오랜 법정 공방을 벌인 강용주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보안관찰처분 면제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한국의 래퍼들도 엠시 솔라처럼 이 사건에서 여전히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래퍼들은 수십 년째 아사타와 무미아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워커스 46호]
▲ FBI에서 발행한 아사타 샤쿠어의 수배 전단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americas/tupacs-aunt-is-americas-most-wanted-female-terrorist-8602879.html |
▲ FBI에서 발행한 아사타 샤쿠어의 수배 전단
http://www.facenfacts.com/NewsDetails/39104/joanne-chesimard:-cubas-fugitive-is-the-first-woman-on-fbis-most-wanted-terrorist-list.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