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박스와 각종 택배 상자가 차곡차곡 포개졌다. 깨끔히 쌓였지만 가까이 가면 냄새가 코를 찌른다. 허리 굽은 할머니의 키 두 배쯤 종이쪼가리가 모이면 고물상에 가 3천 원을 받는다. 새벽 6시부터 하루 종일 모으면 보통 100Kg이 쌓인다. 고물상은 1Kg에 30원을 쳐준다. “점심은 그르제. 아침은 쬐금 챙겨 묵고. 목 마르면 즈짝 공원 화장실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면 돼야. 시방도 댕겨 오는 길이랑께.” 국민연금 얘기를 꺼내볼 요량으로 점심은 드셨냐는 질문에 되돌아온 할머니의 대답이다. 할머니는 원래 기초연금으로 10만 원을 받다가 지금은 20만 원으로 산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니께 쓰레길 줍는 거제”라며 한숨 쉬듯 말했다. 매일 100kg씩 주워도 한 달에 9만 원을 만질 수 있을 뿐이다. “전기세, 수도세 땜시 죽겄어.” 35도가 넘는 더위에 할머니의 이마엔 송글 송글 땀이 맺혔다.
할머니는 다시 질질 리어카를 끈다. 깡마른 손등에 핀 검버섯 사이로 힘줄이 끊어질 듯 팽팽하다. 리어카는 아무도 끌어주거나 밀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거리보다 더 싸늘한 건 정부다. ‘노후 복지’를 위해 국민연금을 만든 지 30년이나 지났건만, 그리고 이 연금은 600조 원을 훌쩍 넘어 세계 3번째로 덩치를 키웠건만 할머니에겐 딴 세상의 이야기다. 폐지를 줍는 노인의 수는 정확한 집계가 없다. 대개 42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어림잡을 뿐이다.
더 비좁은 사각지대
국민연금이 일반 가입자의 노후 소득 보장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늘 물음표가 따라다녔다. 물음표가 커질수록, 비좁은 사각지대로 더 많은 사람들이 내몰렸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사정이 그렇다. 회사는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에서 연금 보험료를 꼬박꼬박 떼 가지만 정부의 ‘4대 보험’ 체납처분 유예조치로 연금은 체납되고 있다. 2016년 7월 고용노동부가 조선업 협력업체의 경영 부담을 완화한다며 4대 보험료 체납 시 압류 등 강제징수 조치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다.
“20개월 째 월급에서는 나갔지예. 한 달에 떼 가는 돈이 20만 원이 넘는데 회사가 내는 돈까지 합치면 족히 50만 원은 될 깁니다.”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강병재 씨의 말이다. 그는 사장에게 임금에서 공제된 돈이라도 돌라달라고 하소연 했지만 회사가 어렵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올해로 56세인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했다. 중간에 해고된 후 복직까지의 기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20여 년 간 국민연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정년을 앞둔 그가 몇 년 뒤 쥘 수 있는 국민연금은 60여 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가 많은 기라. 조선업 애로 사항을 해결해 준다는 긴데 피해 보는 사람은 노동자들입니더. 임금 깎이고 상여금 없어지고 일자리도 줄고.” 원청은 오히려 이런 사정을 악용해 단가를 후려치고 있다. 체납된 국민연금 때문에 사장을 고소한 노동자도 있었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한 마디로 웃기는 기라. 처벌도 해야 바로 잡힐 긴데.” 강병재 씨에 따르면, 사정이 어려워 체납하는 업체보다 이를 악용하는 곳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조선업 특별고용지원업종 지원 대상 업체의 4대 보험 체납액은 약 1,300억 원에 달했다.
“몇 달 내긴 했어요. 그런데 직업이 불안하다 보니까 그냥 저축을 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빌딩 그늘 한 편에 댄 오토바이 위에서 한숨을 돌리는 남성 배달노동자가 수줍게 대답했다. 그는 배달일을 시작한 지 3년이 됐다고 했다. 매일 12시간 씩 일을 하는데 그나마 이쪽에는 일거리가 많다고 했다. 55세가 됐지만 그는 정년도 노후도 모르겠다고 했다. “계속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콜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는 말을 하면서도 분주하게 오토바이에 달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와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는 택배 및 퀵서비스 기사나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보험설계사, 화물차 지입기사, 학습지 교사 등이 있다. 약 2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원청에서 일을 받아 노동하지만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낸 보고서에 따르면 화물기사, 보험설계사 등 7개 특수형태근로종사자 1,000명 중 국민연금 사업장 가입률은 6.6%에 불과했다.2)
“국민연금 밖에 없죠.” 자영업을 하고 있는 한 50세 여성은 어떤 노후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요즘 경기가 너무 좋지 않다는 그는 국민연금을 잘 개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력이 단절돼도 취업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늘었으면 한다고 했다. 졸업 후 유통업에 종사하던 그는 아이를 키운 뒤 자영업을 시작했지만 마땅치가 않다. 그는 남편과 함께 월 20여 만 원을 국민연금 보험료로 내고 있다. 매달 양가에 부치는 30만 원씩을 합하면 가족과 자신의 노후를 위해 쓰는 돈은 100만 원에 달한다. 그는 26세 아들이 어서 대학을 졸업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자식 뒷바라지라도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려운 지인들을 보면 그나마 자신은 손바닥만 한 가게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처럼 자영업에 종사하는 500만 명도 대부분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있다.
여성인 경우 노후의 살림은 더욱 팍팍하다. 지난 5월 세계경제포럼 온라인 페이지에 실린 ‘성별 연금 차이 뒤의 무서운 사실들’에 따르면, 성별 소득 차이는 약 10~20%의 차이를 보이지만 퇴직 후 소득 차이는 30~40%로 여성은 더욱 어려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여성의 소득이 퇴직 후 더 적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여성의 퇴직 기간은 남성보다 약 2.5년 더 길다. 여성의 의료비도 남성보다 많으며 자신을 돌볼 배우자가 없는 경우가 남성보다 많다. 여성은 또한 남성보다 고용 기간이 적고 임금도 적다. 남성보다 자산을 늘릴 기회도 적었다.
LGBT 그룹도 현재와 같은 국민연금 정책에서 소외돼 있다. UBS그룹 AG 보고서를 인용한 8월 20일 <블룸버그> 보도1)에 따르면, 동성결혼을 한 여성 커플은 이성 커플보다 경제적 어려움과 기대 수명 등의 이유로 은퇴 후 더 많은 경제적 어려움에 노출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보도는 미국에서 동성결혼 합법화가 늘어가고 있는 현재, 금융사가 잠재적 고객을 대상으로 한 수익성 분석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LGBT 그룹의 경제적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현실 때문에 미래 기획 못해”
“5만원, 10만원이 사실 큰 돈이에요. 다달이 내는 돈이 정해져 있는데 여기서 더 오르면 쉽지 않을 거예요.”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20대 후반의 비정규직 여성이 말했다. 그는 “문재인 정말 좋아했는데. 저 같은 서민도 위하는 것 같아서요”라며 실망스런 얼굴을 했다. “국민연금이 우리 같은 서민을 위해 개선됐으면 좋겠어요. 물려받을 재산이 있으면 모를까. 노후대책요? 그냥 막막하죠.”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비정규직 노동자 654만 명 중 국민연금 직장가입률은 36.3% 수준에 불과했다. 이 가입률 규모는 10여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노동계에서 추산하는 1천만 명을 기준으로 하면 이 수치는 훨씬 증가한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국민연금은 의무납부인데, 기업이 원하지 않아 노동자가 내지 못하기도 하지만 노동자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워낙 임금이 적으니까 여기서 연금 보험료를 떼면 기본적인 생계 보장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다. 미래의 노후 보장도 중요한 문제인데, 현실 때문에 미래를 기획하지 못하는 문제도 심각하다”며 “정부는 이 사각지대를 어떻게 책임져 나갈 것인지 연금과 함께 임금 문제를 놓고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워커스 46호]
1)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8-08-20/women-in-same-sexmarriages-
are-seen-needing-more-for-retirement
2)
http://hankookilbo.com/v/8ca8f36d7dde424d927571ce639bc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