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이 마흔 여섯인데 할 일은 없고, 집값은 오르는데 가진 돈도 살 집도 없고. 더 비극은 10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예측. 오래 살아 더 살맛 안 나는 세상. 이런 세상 만들려고 일하시는 건 아닐 테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해보시기를.”
“20대 중반인데 너무 살기가 힘듭니다. 솔직히 처음 월급 받고 국민연금 떼는 금액을 보고 너무 많아서 허탈했습니다. 말로는 나중에 돌려준다고는 하지만 과연 받을 수 있을까요? 과연 한국에서는 열심히 일 하면 그 만큼 삶이 나아지는 걸까요? 저는 대통령님이 사람이 먼저라는 말을 믿고 서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시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맞는 건지 이제는 모르겠네요.”
“한 사업장에 7일 근무하면 오지 말라고 하는 사업장이 대부분이고 일용직 불러 쓰면서 연금을 반씩 부담할 사업장이 몇이나 될 런지…. 참 갑갑하네요. 최저임금으로라도 신고하라는데 인력사무소에 일이 없으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비와도 못하고. 하루앞도 모르는 일용직에게 미래를 위해 대비하라니… 어불성설입니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일용근로자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내고 있는지.”
“문재인 씨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사는 게 또 한층 힘들어졌습니다.”
“높으신 분들은 연금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저희는 연금이 생명줄입니다.”
–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국민연금 관련 청원 게시글 중
국민연금 보험료와 수급 연령을 올린다는 언론 보도로 여론이 발칵 뒤집혔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하루 만에 500여 건의 반대 청원이 올라왔다. 이중 상당수가 국민연금의 강제성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공무원연금을 개혁하자는 의견도 많았다. 외국인 혜택부터 없애라는 혐오발언도 쏟아졌다.
국민연금 논란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자 정부는 서둘러 일부 민간위원의 의견이라며 발뺌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13일 “국민연금 개편은 노후소득 보장 확대라는 기본원칙 속에서 논의될 것”이라며 “국민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연금 개편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정부는 공청회 등 여론 수렴을 거쳐 9월 중 정부안을 마련하고 이를 국회에서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17일 공청회에 제시된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와 제도발전위원회의 개혁안은 논란에 다시 기름을 부었다. 자문단은 소득대체율을 45%로 고정하고, 현행 9%인 보험료율을 즉각 11%로 올리거나 10년 간 단계적으로 13.5%까지 인상하고, 연금 지급이 시작되는 연령도 단계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5년 마다 한 번 씩 실시되는 재정추계 결과, 저출산과 고령화, 저성장으로 적립기금이 애초 추계보다 3년 이른 2057년 소진된다며 의견을 냈다. 결국 공청회 뒤 1주일 만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민연금을 폐지하자는 청원이 2천여 건 이상 불어났다.
언론들도 경쟁적으로 사설과 기획기사를 쏟아내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저출산·고령화·저성장 중 저출산과 고령화에 무게를 두면서 세대 간 갈등을 전제하고 더 많이, 더 오래 내는 연금개혁안이 불가피하다며 정부 개혁안에 장단을 맞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일보는 저성장에 무게를 두면서도 ‘규제 개혁과 노조 탄압’을 주문한 점이다. 또 최근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주주권 행사 강화) 제도를 염두에 두고 국민연금에 대한 사회적 견제를 경계했다. 중앙일보는 형평성 문제를 내세우며 공무원연금을 내리 때렸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신문은 사회적 합의에 중점을 뒀다.
▲ 17일 국민연금 개편방안 공청회에서 노동자들이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출처: 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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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고령화라는 연막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시끌벅적한 상황에서도 적립금 고갈 원인이 진짜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에서 기인한 것인지 의구심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출산율이 떨어지고 기대수명이 늘어났으니 연금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17일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가 발표한 장기재정전망결과를 살펴보면, 언론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연금 고갈의 주요 원인은 저출산이나 고령화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회가 이번 재정전망의 주요 가정으로 제시한 요인은 △인구가정 △경제 및 노동 변수다. 그런데 인구가정의 경우, 장래인구전망은 2040년을 기준으로 3차 때는 1.42명, 4차 때는 1.38명으로 0.04명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오히려 국민연금 가입률은 2035년을 기준으로 3차 때는 90.0%, 4차 때는 93.0%로 3%포인트 증가한다. 반면, 총요소생산성, 금리, 임금, 물가를 고려한 경제변수 및 노동변수에선 2081~2088년 기준, 3차 1.5%에서 4차 1.1%로 0.4%포인트의 큰 폭으로 줄어든다. 기금투자수익률 가정에서도 3차 5.2%에서 4차 4.3%로 1.1%포인트 크게 떨어진다. 즉, 이번 재정전망의 주요 가정으로 제시된 양대 요인 중 재정전망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경제 및 노동 변수인 것이다.
재정추계위 또한 3차 재정계산과 비교해 수지적자 및 기금소진 시점이 앞당겨진 이유에 대해 “전체적인 경제성장률을 3차에 비해 낮게 전망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했다.1) 재정추계위는 저출산을 고려한 시나리오에서도 기금소진 시점이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때 예측된 2057년 기금소진 시점의 적립기금 규모는 209조 원으로 전체 요인을 반영한 예상액 124조원과 비교하면 큰 폭의 차이가 난다.
한편 기대수명은 2060년을 기준으로 3차 때 여성 90.3세에서 91.2세로 0.9세가 증가하며, 남성은 86.6세에서 87.8세로 1.2세가 증가하지만 노인부양비는 2065년을 넘어서면 2090년까지 계속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즉, 고령화 또한 국민연금에 미치는 영향이 현저하다고 볼 수 없다.
보건복지부 연금정책과 관계자도 22일 “고령화가 보험료 지출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수치화하기는 어렵다. 변화가 누적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저출산만 봤을 때는 국민연금에 대한 영향도가 크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연금 적립금이 고갈하는 보다 구조적인 원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실질임금상승률과 실질경제성장률의 하락, 즉 갈수록 이윤율이 하락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자본의 이윤율 하락 속에서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국민연금 고갈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세대간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 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정부 개혁안은 연금의 조기 고갈을 이유로 연금 가입자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 위기를 전가하는 방식으로 실패한 신자유주의 연금 개혁을 또 다시 심화시키는 문제를 지닌다.
국민연금, 재벌에겐 쌈짓돈…사회화 필요
그렇다면 이 같은 국민연금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무엇보다 국민연금 위기를 가속화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대한 방어와, 국민연금을 노동자의 자본으로 방어하기 위한 제도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 진보진영에선 그 동안 국민연금 금융화가 아닌 사회화 관점에서의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고 요구해왔다.
현재 국민연금 복지 부문 투자는 1% 미만으로 떨어진 지 오래며, 그 외 99% 이상이 금융 부문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삼성 등 재벌에 대한 투자 비율이 압도적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투자정보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전체 자산대비 국내주식 투자 비중은 20.9%(131.1조원)을 차지한다. 이중 약 58조 원, 즉 44.7%를 삼성전자(약 31조원, 24.2%), SK하이닉스, 포스터, 네이버, 현대차, LG화학, KB금융, 현대모비스, 신한지주, SK텔레콤 등 10대 기업에 투자했다. 특히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18개 삼성계열사에는 무려 31.8%를 투자했다. 해외 투자 역시 초국적 거대자본이나 금융자본에 집중돼 있다. 2017년 말 기준 국민연금 해외주식 종목별 투자현황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10대 해외주식 투자 대상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알파벳, 텐센트 홀딩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제이피모건, 시티그룹, 존슨앤존스로 초국적 거대기업이거나 금융기업이다.
이 같은 조건에도 정부는 국민연금 수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윤리, 투자실패 등 투자 문제는 도외시해 왔다. 최근에는 금리 하락으로 국민연금 수익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지만, 주주의 권한을 증대한다는 스튜어드코드 제도 도입만 추진되고 있을 뿐 근본적인 대안은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구조적으로 재벌의 쌈짓돈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상 이 같은 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노동자가 지출한 적립금인 국민연금을 원래 취지대로 노동자의 노후 소득을 위한 재정으로 재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진보진영에선 우선 재벌이나 금융자본이 아닌 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공적연금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중요하다.3) 연금 운용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도 제기돼 왔다. 또한 보편적인 노후 복지를 위해서는 거대한 기금을 쌓아놓는 적립식 제도가 아닌, 부과식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세대 아니라 노자 간 대결
국민연금이 노동자의 노후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재정이라는 점에서 연금을 누가 부담하는가에 대한 토론도 중요하다. 현재 국내 국민연금 노사 간 분담률은 1 대 1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시 돼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면 오히려 사측의 분담률이 큰 경우가 더 잦다. OECD 가입국의 법정 노사 국민연금 부담률(2016년)3에 따르면, 호주는 노사 간 0 대 9.15, 덴마크는 0.26 대 0.52, 핀란드는 7.20 대 18.0, 프랑스는 7.25 대 10.40, 이탈리아는 9.19 대 23.81, 터키는 9.0 대 11.0으로 14개국에서 사측이 더 많이 국민연금 비용을 부담했다. 한국처럼 노사 부담률이 같은 경우는 OECD 가입국 22개 중 7개국, 노동자가 더 많이 부담하는 경우는 1개국뿐이었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결국 국민연금을 누가 부담하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단순하게 세대 간의 분배 문제가 아니라 노사 간의 부담률, 보험료율 차등화, 재원 다변화 등 계층 간의 부담 문제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금처럼 보험률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출산율과 고용율 확대나 노동소득 인상 등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강동진 포럼사회복지와노동 회원은 “연금문제의 본질은 재정이 아니라 정치다. 연금고갈 시점이나 미래세대 부담 정도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다른 세력들 간의 투쟁”이라며 “국민연금이 노후 소득 보장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노동계나 진보진영에선 국민연금 개편 대안으로 노동자들의 노후소득 보장을 중시하고 이를 위해 보장율을 높이는 한편 제도로 지급보장을 정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 17일 공청회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연금 급여인상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지급보장을 명문화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워커스 46호]
이번 정부 자문단의 개편안은 1998년 구제금융 당시 강행된 신자유주의 연금개혁으로부터 약 20년 만에 제안된 구조조정안이다. 정부는 1998년 구제금융 당시 세계은행이 요구한 국민연금제도 개혁, 공공자금 대여 폐지, 연기금 운영 방식 변화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한국사회는 노후소득보장에 사회연대 보다는 개인 책임을 강화하는 △연금시장의 확대 △노후소득보장의 개별화 △연기금의 금융화라는 신자유주의 연금개혁의 원칙이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세계은행의 요구에 따라 국민연금의 재정안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연금부채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이를 연금개혁의 주요 근거로 사용했다.4) 이때부터 수급자의 연금보장율은 낮아졌고 국민연금의 금융화는 확대되며 노후소득 보장은 후퇴되면서도 노동자가 낸 연금은 대기업과 금융시장의 쌈짓돈으로 활용돼 왔다.
[각주]
1) 2041년 최대적립기금은 1,778조원으로 3차 때의 2,561조원에 비해 783조원이 적을 것으로 예상됐다.
2) https://www.oecd-ilibrary.org/docserver/pension_glance-2017-en.pdf?expires=15
34768996&id=id&accname=guest&checksum=F03D5CAC66501F3924D6C8A17F4E8681
3) 주은선, 신자유주의 시대의 연금개혁, 노후보장의 시장화, 개별화, 금융화, 경제와 사회
4) 한국은 공적연금에 대한 정부 지출도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2017년 OECD 연금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된 가장 최근 자료인 2013년 정부의 연금 지출은 최하위대인 나라들와 함께 2% 대를 보였다. 일본은 10.2%, 미국은 7.0%, 독일은 10.1%에 비하면 한참 뒤쳐진다. https://www.oecd-ilibrary.org/docserver/pension_glance-2017-en.pdf?expi
res=1534768996&id=id&accname=guest&checksum=F03D5CAC66501F3924D6C8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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