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후(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다)
#1. 일자리가 넉넉했던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고용쇼크’. 정부가 매달 발표하는 고용 동향이 올 상반기 내내 저조한 흐름을 보인 가운데, 7월 취업자 수 증가율이 5천 명 수준에 머무르면서 8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보수야당과 언론은 일제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비판하면서 노골적인 친기업 정책을 요구하고 나섰고,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소득주도성장론이 연일 도마 위에 오르고 있죠.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같은 ‘무리한’ 정책을 폐기하고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일자리는 저절로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인데요. 방향전환의 움직임은 정부여당 내부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 파기를 인정했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혁신성장’과 ‘규제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의료부문을 시작으로 각종 규제 완화를 발표하는 한편, 경제부총리는 재벌 대기업을 찾아다니며 ‘구걸’이라는 표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투자요청을 하고 있죠. 대통령과 부총리가 연달아 삼성 이재용 부회장을 만난 것은 그 절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국정농단의 핵심 공범이 문재인 정부의 우군으로 탈바꿈해 공식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죠.
한편에서는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 최악의 장시간노동(OECD 2위)을 자랑하며 재벌 곳간에 수백조 원의 돈이 쌓이는 이 모순적인 나라. 그런데도 임금을 올리는 것도,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도 안 된다며 도리어 기업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규제를 풀자는 주장이 기세를 얻는 현실. 노동시간을 줄여 그만큼 일자리를 늘리면서도 급여와 노동조건을 충분히 보장하는 방안은 자본주의에서 좀처럼 실현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건 이윤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특히 만성적인 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일자리 부족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가령, 올해 고용지표가 악화 추세를 보이지만 지난 10년 간(좀 더 넓혀보면 지난 20년 간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취업은 항상 어려웠고 일자리는 늘 부족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에게 일자리는 곧 생존과 직결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일자리는 (일부 공공부문을 논외로 한다면) 대개 이윤을 축적할 수 있겠다는 전망이 있을 때, 자본(을 대리하는 자본가나 경영진)의 결정에 따라 생겨납니다. 물론 같은 기준에 따라 일자리는 얼마든지 줄어들기도 하죠.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의 생존과 필요, 풍요로운 생활, 그리고 구성원 자신의 결정권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과 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일자리 문제 역시 마찬가지죠. 사회주의에서 당신은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게 될까요? 사회주의에서 과연 실업의 문제는 사라질 수 있을까요?
#2. 사회주의에서 직장 찾기
대개 한 번쯤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적어보았을 겁니다. 장래희망 조사에 답하는 것이든 자유롭게 자신의 미래 모습을 꿈꾸는 것이든, 직업이나 직군은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표현하는 수단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고 계발하기 위해서도 일자리를 필요로 하죠(물론 그것이 단 하나의 직업으로 제한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일자리는 여유로운 생활을 위한 소득원임과 동시에 자아실현의 계기로 기능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이런 이상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건 아주 소수에 불과하죠. 대부분 노동자는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회사나 관리자의 통제에 따라 일해야 하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여가시간을 활용하거나 아예 그런 시간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애초에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부터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더군다나 일자리가 없으면 당장 생계가 곤란해지니 직장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원하는 다른 일을 위한 시간도 여유도 갖기 어렵습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여태까지 자본이 축적을 위한 축적에 빨아들였던 부(이윤)를 사회가 통제하고 활용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충분한 소득과 일자리를 얻을 기반을 마련합니다. 사회적으로 생산한 부를 비로소 그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일단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생계는 이어갈 수 있도록 보장할 겁니다(물론 노동할 수 없는 조건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소득보장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그 수준은 구성원들의 논의를 통해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당연히 사회주의에서도 사회 자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노동이 필요하죠. 따라서 노동유인을 위해서는 일하는 사람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일하지 못하는 경우와는 다릅니다)의 소득이 더 적게 책정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인간적인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처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생존이 어려운 사태를 방지하는 것이죠.
일자리 역시 각 자본의 이윤을 목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근거해 만들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지금보다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면 필요한 노동력은 대폭 늘어날 수밖에 없겠죠.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추가 인력을 얼마나 더 보충할지 결정합니다. 사업장별, 산업별 혹은 지역별 노동자평의회들은 추가로 필요한 이 노동력의 수준을 조정할 수 있겠죠. 정부는 이 수요를 공개하고,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안내·알선합니다.
여기에서 충분한 보상을 전제로 한 노동시간 단축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단 일자리를 늘리고 인간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이 희망하는 다른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회적으로 필요한 여러 노동이 있고, 각 개인이 원하는 일자리가 여기에 딱 들어맞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좀 더 여유로운 소득을 위해 자신이 희망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라 하더라도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는 선에서 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통해 생계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것이죠.
물론 사회주의라고 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무작정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숙련과 훈련이 필요한 일은 그에 따른 노력과 자격검증이 있어야겠죠. 가령 외과수술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메스를 쥐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지만 그에 필요한 훈련과 교육과정은 개인의 부담이 아니라 사회적 지원을 통해 이뤄질 겁니다. 지금처럼 학력과 재산과 직업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을 끊고 진정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서죠.
반면, 사회주의 사회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기피하거나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한 직종 역시 여전히 존재할 겁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 혹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 있겠죠. 예컨대 제조업 생산라인이나 청소업무, 소방업무 같은 일들 말입니다. 이런 업무들은 그 사회적 필요를 고려해 역시 구성원들이 평의회 같은 민주적 의사결정기구에서의 논의를 통해 충분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사회의 평균치보다 더 높은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3. 사회주의에서도 직장은 변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에서는 일자리가 영원히 유지될까요? 사회주의라고 해서 일자리가 늘어나기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예컨대 기술이나 수요의 변화로 인해 필요한 노동력이 줄어들 수도 있고, 어떤 부문의 생산물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필요하지 않거나 환경오염 같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도 있죠. 그렇다면 당연히 특정 부문의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우에도 결정은 이윤을 기준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해당 부문의 노동자들을 포함해 사회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하는 한편 일자리 축소에 따라 발생할 소득과 대체 일자리 문제 등 보완대책까지 함께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가령 자동차 기술발전으로 매연을 발생시키던 내연기관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나 소비자 수요가 사라져 몸빼바지를 생산할 필요가 없게 된 상황을 가정해봅시다(후자의 경우 비현실적 가정이긴 합니다만 편의상 그렇다고 칩시다). 자본주의라면 내연기관이나 몸빼바지를 생산하던 노동자들을 해고하면 그만입니다. 그 노동자들은 해고기간 동안 생계난에 허덕이며 당분간 제한적인 실업급여로 연명하거나 알아서 다른 직장을 구해야겠죠. 하지만 기술발전도, 수요변화도 해당 노동자들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닙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전국 혹은 산업별/지역별 차원의 평의회에서 내연기관과 몸빼바지 생산을 줄이자는 제안에 대해 해당 부문 노동자 대표까지 포함해 논의와 설득의 과정을 거쳐 결정하고, 이 노동자들이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일자리를 잃는 희생을 치르게 되는 만큼 그 소득을 보장할 대체 일자리를 마련하고 희망하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훈련이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죠.
한편 개인적 차원에서 일자리를 잃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수차례 주의와 경고를 주었음에도 최소한의 작업도 수행하지 않는다거나, 직장 내에서 성희롱·성폭력을 비롯해 동료 노동자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죠. 사회주의에서는 이윤 논리에 근거한 위계적인 평가와 보상은 사라지겠지만, 사회적 필요를 생산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자치에 근거한 평가와 보상은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동료 노동자들이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해당 기업이나 부서의 평의회는 특정 노동자를 내보낼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고 쫓겨난 노동자가 생존권을 박탈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의회나 정부는 해당 노동자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면 이를 시정할 수 있도록 교육기회를 부여하고, 앞서 언급했듯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생계소득을 보장하면서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겁니다.
#4. 진정 ‘자기의 일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하여
여기에 나온 아이디어들은 제가 개발해낸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거부하면서도 권위주의적인 명령경제도 반대하는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이들이 제시한 대안적인 모델들을 어설프게나마 짜깁기해 본 것이죠. 어찌 됐든 사회주의에서도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동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그 노동을 배치하고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겠죠. 그렇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그리고 자본주의에서의 노동, 고용, 일자리와 결정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다양한 각급 평의회들(이름을 무엇으로 붙이건 간에 직장과 산업, 각 지역 단위, 그리고 전국적 수준에 걸쳐 구성되는 민주적 대표기구들)로 조직된 노동자들과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소수집단의 이윤축적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일자리를 늘리거나 줄이고, 보수와 노동조건, 노동시간을 결정하며, 특정 권력 집단의 강요가 아닌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따라 책임을 진다는 겁니다.
사회주의 경제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필요와 욕구, 기술발전과 혁신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겁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경쟁적 이윤추구에 따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경제변동을 일으키고 그 효과가 노동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등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반면, 사회주의에서는 구성원들이 직접 그 경제변동을 통제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을 그대로 되묻고 싶습니다. 어떤 직장이라도 구하지 못하면 내일을 내다볼 수 없고, 회사의 통제에 매여 있으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는 진정, 직업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워커스 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