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년이냐, 노인이냐’
‘이러다 나라가 사라지려나.’
요새 어딜 가든 고령 사회, 초고령 사회 얘기를 들을 수 있죠. 통계를 보니 현재 60대 이상 인구는 1100만 명을 넘어선 반면, 40대는 8백만 명, 30대는 7백만 명, 20대는 6백만 명 등 세대가 내려갈수록 백만 명씩 인구가 줄어들더군요.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은퇴 세대’는 늘어만 가니, 이대로 가다간 경제 활력도 쪼그라들고 젊은 세대가 부양해야 할 노령 인구 비중도 커진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가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는 모양입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최근 잇따라 ‘정년 연장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착수해야 한다’며 불을 지폈죠. 현재 공식적인 정년은 60세지만(이조차 현실에서 얼마나 지켜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령 국민연금 수급 시기를 65세로 늦췄기 때문에 정년을 꽉 채우고 퇴직하더라도 5년간 수입에 공백이 생기죠. 게다가 한국의 노령 빈곤율은 OECD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년을 더 늘려 노령 빈곤의 심각성을 좀 만회해보려는 듯합니다.
하지만 홍남기 부총리가 정년 연장 카드를 꺼내 들자마자 곧바로 ‘세대 간 갈등’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기존 노동자들의 정년을 연장하면 결국 노동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청년들의 일자리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거죠. 분명 청년들에게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가령 현재 정부가 발표한 평균 실업률은 4% 정도지만, 청년 실업률은 공식 통계상으로도 9.9%로 평균 실업률의 2배를 웃돌고 있죠. 청년들의 체감 실업률이 20%를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이래야 하는 걸까요? 가난한 노인에게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에게도 현실은 가혹합니다. 둘 중 하나를 희생해야 나머지 하나가 살 수 있다는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문제는 회피한 채 ‘빼앗긴 자들’에게 책임을 폭탄 돌리기 하면서 잘못된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것이죠. 앞으로도 노령인구는 계속 늘어날 겁니다. 국민연금 혜택을 받는다고 한들 소득대체율이 40% 정도에 머무는 상황에서, 이 연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불안정 노동층)도 많죠. 정년을 5년 연장한다고 노령 빈곤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체제를 유지한다고 줄어드는 청년 일자리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정년 연장 논란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정년을 연장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소모적인 논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2. 청년 A의 미래
사실 노령 빈곤의 원인은 노년 시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물론 은퇴 이후 안정적인 노동 소득이 사라지는 것은 맞지만, 연금 소득이든 저축이든 노동 소득을 대체할 만한 재원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체제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 노후대비를 하기도 어렵고, 사회적인 노후보장도 미미하죠. 그렇기에, ‘나이가 들어서도 예전처럼 일하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보죠. 여기 한 사람, 청년 A가 있습니다. 셋방살이 전전하면서 열심히 대학 생활을 했고, 간난신고 끝에 취직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계약직이죠.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하고 매달 월세도 빠져나가니, 허리띠를 졸라매 악착같이 생활비를 줄입니다. 언제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지 모르고, 원룸 셋방살이도 탈출하고 싶으니 얼마가 됐든 조금씩이라도 돈을 모읍니다. 연애라도 하게 된다면 애인과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가끔씩 놀러 다니게 되니, 혹여나 예상외의 지출을 하게 될까 두려워 애써 눈 감고 삽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이란 때로 대단히 동물적인지라, 덜컥 눈이 맞는 사람을 만나고야 말죠. 그렇게 뜻하지 않은 연애를 하다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되면서, 며칠간은 축하를 받겠지만 그 축하 이상의 무거운 현실이 이 커플을 짓누르게 됩니다. 집은 어떻게 장만해야 할지, 앞으로의 생활은 어떻게 꾸려나갈지, 처음엔 의기투합해보지만 아이가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약 20년의 시간, 청년 A의 삶은 사라졌습니다. 유아용품과 보육비 지출부터 아이가 커갈수록 각종 학원비에 집도 옮겨야 하고, 대학 등록금까지 내주게 되죠. 뼈 빠지게 일하던 A는 아이를 대학에 보낸 뒤 너무 지쳤는지 쓰러지고 맙니다. 고난의 시간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지옥의 시간이 열리죠. 이제 노년에 다가온 A에게 남은 것은 지난 30년간 불살라 망가진 육신입니다.
이런 체제에서 노령 빈곤은 필연입니다. 주거, 보육, 교육, 의료 모두 상당한 개인 지출이 불가피하죠. 돈을 모을 수 없게 해 놓고 은퇴 후엔 변변한 사회보장도 없습니다. ‘미리미리 노후 대비를 하라’거나 ‘그러게 재테크를 해야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금융상품에 미래를 맡기는 위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것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죠. 은퇴 시점보다 5년을 더 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들, 잠깐의 유예기간은 될 수 있어도 노령 빈곤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청년 일자리 부족과 노령 빈곤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은 비정규직이나 알바,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게 되고, 앞서 가상의 예시에 거론한 A는 연애와 결혼이라도 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나이를 먹은 뒤 그저 홀로 빈곤의 수렁에서 허덕일 뿐이죠. 악순환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겁니다.
#3. 노인을 위한 사회주의, 청년을 위한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노령 빈곤의 근본 원인을 제거합니다. 한 사람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체제에서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많은 것들을 사회적 책임 하에 공공재로 제공하기 때문이죠. 가령, 가장 큰 부담이자 지출인 주거 문제를 보자면, 주택은 사회주의에서 더 이상 투기나 매매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안정적이고 인간적인 주거를 제공하는 게 핵심이죠. 지금도 주택과 아파트는 넘쳐나지만, 정작 수많은 사람이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한 채 전월세를 전전하면서 소득의 상당 부분을 지출합니다. 건설자본과 임대사업자들만 이득을 보고 대다수 무주택자들이 주거난에 시달리는 이 불평등과 비효율을 왜 그대로 둬야 합니까?
보육과 교육도 마찬가집니다. 국가가 책임지고 공공 서비스로 공급하면서, 학벌 서열 체제로 값비싼 사교육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공공 교육에 대한 대폭적인 투자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 권리를 보장한다면, 지금처럼 각각의 개인들이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사회적 낭비를 막고 그 자원을 훨씬 더 각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쓸 수 있죠(《워커스》 47~49호 ‘사회주의 탐구 영역’에서 주거, 보육, 교육 문제를 다루었으니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노년에 접어들어 은퇴한 이후에도 연금처럼 일정한 소득 보장은 필요할 겁니다. 자녀들 눈치 보면서 얹혀사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공적인 요양 서비스와 주거권을 기본적으로 보장하더라도, 문화생활이나 여행처럼 추가적인 비용이 들 수 있죠. 연금의 지급방식은 지금처럼 자신이 일할 때 적립해뒀다가 은퇴 이후 돌려받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따로 적립하는 게 아니라 매년 필요한 연금액만큼 세금 방식으로 거둬들여 지급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연금을 부담하는 사람들(주로 현재 노동하는 사람들이겠죠)과 수령하는 사람들이 함께 그 수준을 결정하되, 노동 소득 없이도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게 가능하도록 보장한다는 원칙입니다. 현재 노동 세대 역시 은퇴 이후 자신이 누리게 될 혜택이기에, 무작정 보장수준을 낮출 수는 없는 거죠.
이렇게 제반 사회 서비스를 공적으로 보장한다면 각자의 비용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소득 가운데 지출해야 할 영역이 줄어드니, 그만큼 자기 자신을 위해, 나아가 미래의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아지는 거죠. 이제 문제는 바로 이 소득의 주요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일자리입니다. 은퇴 세대를 부양하려면 그만큼 현재 부를 생산하는 세대가 있어야 하고, 청년 세대 역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일자리가 필요하죠.
사회주의가 된다고 해서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날까? 늘어납니다. 무엇보다 노동시간을 크게 단축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산술적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만큼 확실하기도 하죠. 이걸 가로막는 장벽은 바로 이윤을 뽑아내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사람 2명을 고용하느니, 1명을 오래 부려먹는 게 더 싸게 먹히니까요. 반대로, 자본가들이 그저 축적을 위해 축적하던 이윤, 그리고 배당을 비롯해 현금으로 뽑아가던 막대한 부를 사회주의에서는 얼마든지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창출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랜 시간 숙련이 필요한 직업도 있을 수 있죠. 그런 경우에는 일정한 보수를 주면서 양성 기간을 거치고, 실제 현업 투입 시간은 축소된 노동시간에 맞추면 됩니다. 예컨대 간호사 같은 직업의 경우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만큼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이 죽어 나갈 정도로 심각한 과로에 시달리면서 만성적인 인력 부족 현상이 벌어집니다. 정부는 간호대 정원을 확대한다고 하지만, 현장에서의 심각한 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저 간호사를 부속품처럼 계속 갈아 끼우는 것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간호대 정원 확대로 양성 인원을 늘림과 동시에,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해 노동 강도를 낮추면서 인원을 그만큼 충원하면 됩니다. 일자리도 늘리고, 간호사들의 비극도 막을 수 있는 거죠.
이렇게 얻게 된 일자리가 원하던 직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획기적인 노동시간 단축으로 가령 하루에 4시간씩만 일하게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지금의 알바처럼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의 저임금이 아니라 충분한 보수를 받는 일자리죠. 그렇다면 일단 현재 직장을 다니면서 여유로운 물질적, 시간적 조건 하에 자기 계발을 통해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다른 직장에 도전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주의야말로 청년들에게 기회와 안정 모두를 제공하는 체제인 것이죠.
#4. 그래서, 사회주의에서 정년은 몇 살이야?
노령 빈곤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청년에게 일자리가 충분하다면, 정년 자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이 들어 더 일하지 않아도 삶이 여유롭고, 더 일해도 일자리가 부족하지 않으니까요. 정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이때까지는 고용을 보장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나이 이후에는 좀 쉬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정년을 대하는 당사자들의 태도도 상반될 겁니다. ‘한창 나이인데 이제 일할 수 없다니!’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반대로 ‘지금까지 일했는데 이 나이 먹고도 계속 일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런데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의 양상 자체가 바뀝니다.
먼저 첫째, 사회주의에서 고용은 나이, 성별, 인종 등등의 구분과 관계없이 보장합니다. 물론 기준은 있을 겁니다. 직접 일하는 노동자들이 ‘이 일을 하려면 이러저러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결정할 수 있겠죠(물론 그 능력을 갖추기 위한 양성 프로그램도 함께 마련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사람마다 나이에 따른 편차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죠. 일률적으로 특정 연령을 지정해 그 이전까지만 고용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이제 쉬고 싶거나 다른 일을 하러 떠나기 전까지는 (노동자들 스스로 정한 요건에 합치만 한다면) 나이가 몇 살이든 계속 일할 수 있는 겁니다.
둘째,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대개 ‘생존을 위해서라면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됩니다. 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먹고살려면 저임금이든 장시간이든 무슨 일을 하든 일단 직장을 구해야죠.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시키는 대로 일하고), 성과를 온전히 자신이 가져가는 것도 아닙니다(주는 대로 받지요). 사람들이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 ‘이 나이까지 일했으니 이제는 좀 쉬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까지의 일이 자신의 희망이나 욕구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사회주의에서도 물론 더 여유로운 생활을 위해 자신이 희망하지 않는 일자리를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 덕분에 이 노동은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그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 스스로의 희망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되죠. 이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다른 직장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노동이 노동자 스스로의 발전을 위한 과정으로 변해가는 거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데, 꼭 어느 시점을 찍어 ‘나는 이때까지만 일하겠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이 일이 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스스로 그만두게 되는 거죠.
결국 사회주의에서 정년은 없을 겁니다. 각자의 희망에 따라 일할 뿐이죠. ‘청년이냐, 노인이냐’라는 선택지는 틀렸습니다. ‘서로 불행한 자본주의냐, 함께 행복한 사회주의냐’의 문제일 따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