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2013년까지 중증장애인 생산품 생산시설에서 일을 했던 장애인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처음 시설에서 일을 시작한 건 1993년이었습니다. 뜰채를 만드는 재활 공장이었지요. 그 곳에서 7년간 일을 했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잘 생각이 나진 않지만, 근무조건은 매우 좋지 않았어요. 그 곳에서 일하던 장애인 노동자 한 달 월급이 고작 1~2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저 같은 경우는 시설 담당자 눈에 들어 한 달에 10만 원 조금 넘게 월급을 받았지요.
재단에서 운영하던 그 곳이 장애인 생활시설과 직업시설로 분리되면서, 저도 2000년경 일터를 옮기게 됐습니다. 커터칼이나 사무용품을 생산하는 장애인 생산시설이었지요. 공장에서 물건을 갖다 주면 우리는 조립을 하고 포장을 했어요. 그 공장에는 40명 넘는 직원들이 있었고, 그 중 15명이 장애인 노동자였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2013년까지, 13년간 근무를 했어요. 1년에 한 번 근로계약서를 쓰는 방식이었죠. 근무시간은 다 똑같았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8시간 씩 일주일에 5일. 비장애인의 일반적인 노동시간과 다르지 않았지요.
하지만 임금은 최저임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장애인은 최저임금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으니까요. 언젠가 근로계약서를 보니, 시급이 천오백 원이더군요. 2013년 생산시설을 나올 때 제가 받은 한 달 월급은 60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60만 원이 전부 제 돈은 아니었지요. 사실상 실 수령액은 20만 원이었습니다. (취재원 보호 차 시설 내부 사정을 자세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기자 주) 지금 같았으면, 시설에 항의라도했을 텐데 그 때는 그러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또 20만 원에서 8만 원은 점심 값으로 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 달 제 손에 떨어지는 돈은 12만 원 정도였죠.
돈은 항상 모자랐습니다. 어머니가 얼마간 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습니다. 장애인 야학에서 반 상근을 하기도 했습니다. 퇴근한 뒤 매일 야학에서 3시간 씩 일을 일했고, 한 달 30만 원을 받았습니다. 하루에 11시간을 일해야 겨우 40만여 원 남짓한 돈을 벌 수 있었던 셈이지요. 출퇴근 길은 꽤 멀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왕복 2시간 거리의 길을 매일 다녔습니다. 야학 일을 끝내고 밤 12시가 돼서 집에 들어가는데, 버스 기사분이 한 소리를 하더군요. 장애인이 이 시간까지 집에 안 들어가고 뭘 하고 있느냐고요. 하루 온종일 일을 해도, 최선을 다해 살아도, 우리는 가난과 차별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시설 직원들은 우리에게 ‘빨리 빨리 일을 하라’고 종종 혼을 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허락되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참으며 일을 했습니다. 그것보다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보호감호소에서는 우리 시설로 수감자들을 보내곤 했습니다. 장애인 노동자들이 맞추지 못하는 생산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수감자들이 우리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죠. 그들은 함께 일을 하는 장애인 노동자들을 향해 비하와 혐오의 말들을 내뱉곤 했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그들과 마주쳐야 했고, 그 혐오의 말들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어떤 할아버지 수감자를 마주쳤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자신도 커피를 마시겠다면서 다가오더니, 갑자기 저를 성추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랐고, 그 후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사무실로 올라가 성추행 사실을 말하겠다는 저를, 그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붙잡았습니다. 가지 말라고,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랬다고. 만약 네가 얘기를 하면 자기는 다시 보호감호소로 들어가야 된다고. 결국 저는 사무실에 성추행 사실을 고발했지만, 시설 직원이 저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버렸습니다.
장애인 생산시설에서의 지난 20년은,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저 버티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지요. 일을 그만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저에게, 어머니는 매번 말씀하셨지요. 네가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어디 있느냐고. 이 정도 월급 받는 것도 어디냐고요. 우리 어머니를 비롯한 동료의 부모님들은, 장애인인 자녀를 이 곳에 맡기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장애인 일자리가 많지 않을뿐더러, 집에 있어봤자 하루 종일 돌볼 여력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인지, 부모님들과 저희는 시설 원장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랐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는, 감사한 분이라고요.
제가 시설을 나온 지 벌써 6년이 지났네요. 저는 2013년, 그 곳을 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그 곳으로, 혹은 비슷한 생산시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장애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립 생활을 가로막았으니까요. 지금도 여전한 그 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사회는 우리를 단순히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비장애인의 생산성을 기준으로, 빠른 노동만을 강요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매번 무능하고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히지요.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에 ‘틀림’은 없습니다. ‘다름’만 있을 뿐이죠. 우리의 노동은 비장애인의 노동보다 느립니다.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장애의 특성 때문에 느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요. 정말 틀린 것은, 사람 보다 생산성이 우선되는 사회, 그리고 우리의 느린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지금의 사회가 아닐까요.
*이 기사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 노동자 A씨와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