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바리아 수도 리야드 중심가의 한 카페에서 케피야를 쓴 남성들이 시끌벅적하게 축구 시합을 보고 있다. 지난 5월 25일 열린 FIFA U-20 월드컵 사우디아라비아 대 프랑스 경기였다. 화면에는 ‘BeOutQ’라는 방송사 로고가 붙어 있다. 스포츠 방송을 중계하는 BeOutQ는 채널만 수십 개로, 사우디 전역뿐 아니라 아랍어를 쓰는 아랍에미리트연합이나 이웃 나라 사람들도 즐겨 보는 방송사다. 그런데 BeOutQ가 어느 나라 방송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해적방송사라고 알려졌을 뿐이다. 광고 때문에 사람들은 사우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방송사는 카타르 국영 스포츠 방송사 BeIn의 방송 콘텐츠를 카피해 방송한다. BeIn에서 스포츠 경기를 송출하면 약 6초 뒤에 BeOutQ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물론 화면에는 BeIn 대신 BeOutQ 로고가 나온다. Q는 카타르의 약자로 ‘카타르 Out’이라는 뜻이다. 이 해적방송은 지난 2010년 카타르가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생겼다. 카타르에 대한 사우디의 적개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 대회가 끝난 뒤 사우디의 한 언론사는 “2018년 월드컵은 안녕, 2026년에 다시 만나자!”라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2022년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를 노골적으로 무시한 것이었다.
이 일화는 최근 독일·프랑스 공영방송 〈아르떼〉가 ‘사막 왕자들의 게임 – 새로운 걸프전쟁’이란 제목으로 걸프국 간의 갈등을 전하며 보도한 이야기이다.
걸프의 냉전
걸프 냉전이 2년째 계속되고 있다. 사우디는 소국 카타르를 향해 으르렁 거렸고, 카타르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우디는 2017년 6월 5일 카타르와 외교를 단절하고 10여 개국과 함께 경제제재를 시작했다. 이에 맞서 카타르는 올 1월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탈퇴했다. 현재 사우디와 카타르의 모습은 골리앗 대 다윗의 싸움과 비슷하다. 인구만 봐도 사우디의 몸집이 12배 이상 크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기를 쥔 쪽은 카타르다. 그리고 이러한 대 사우디 노선으로부터의 카타르의 이탈은 세계 에너지 시장과 정치 관계를 비롯해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우디와 카타르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1990년 대 중반 카타르 근해에 천연가스가 개발되면서다. 카타르 최고 실력자인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국왕의 부친 하마드 왕이 1995년 무혈쿠데타로 부왕을 축출하고 개혁노선을 걸으며 개발한 것이었다. 하마드 왕이 왕위를 찬탈한 당시, 카타르는 첫 액화천연가스(LNG) 수출선 출항을 앞두고 있었다. 이때부터 카타르는 사실상의 사우디 속국에서 이탈해 독자노선을 추구했다. 현재 카타르는 세계 최대의 LNG 수출국으로 세계 천연가스의 30% 이상을 생산한다.
문제는 이 천연가스 매장층(북부 가스전)을 카타르가 이란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을 위해선 이란의 일정한 동조가 필요하다. 이란은 ‘시아파’고 카타르는 ‘수니파’가 다수이지만 그럼에도 카타르로선 이란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 외에 별 다른 방법이 없다. 더구나 1991년 걸프전 이후 이라크가 패전하면서 이란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듬해에는 카타르와 사우디 간에 국경분쟁이 발생하면서 카타르는 사우디의 숙적인 이란과 관계개선을 추진해 온 터였다. 이란 문제에 대한 이러한 불일치 때문에 카타르와 사우디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아랍의 봄
카타르가 천연가스를 개발한 후 독자 노선을 걸으며 시작된 여파는 ‘아랍의 봄’까지 미쳤다. 하마드 카타르 왕은 고립을 피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썼다. 그 중 하나가 〈알자지라〉였다. 하마드 왕이 아랍세계의 자유화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세운 이 방송사는 급진적인 시아파든 또는 수니파든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세계의 이단아들에게, 특히 무슬림형제단에 발언권을 줬다. 〈알자지라〉가 없었다면 ‘아랍의 봄’이 그렇게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들은 큰 역할을 했다. 사우디를 포함해 지역 독재의 치부와 저항운동에 불을 밝혔고, 운동의 확산을 재촉했다. 〈알자지라〉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으면, 2017년 사우디가 경제제재를 하며 카타르에 이 언론사를 폐쇄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더구나 아랍의 봄이 일어나자 카타르가 취한 태도는 사우디와는 정반대였다. 카타르는 아랍의 봄이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부유한 산유국에 인구 280만 명의 카타르는 세 나라 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 야권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대신 카타르는 튀니지와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에 자금을 지원해 그들이 집권하는 데 일조했다. 이외에도 리비아와 시리아의 이슬람 운동에 자금을 후원하고 무장시켰다. 무슬림형제단 등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근본주의 와하비즘을 따르는 사우디가 주적으로 주시해온 세력이었다. 그들은 사우디에게 왕조를 위협하는 테러리즘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우디는 아랍의 봄으로 집권한 무슬림형제단을 제거하기 위해 군부가 복귀하도록 자금을 댔다. 그리곤 결국 2017년 6월 사우디는 한 가짜뉴스를 빌미로 카타르가 테러단체를 지원하고 있다며 경제제재를 시작했다. 사이버 공격을 받은 카타르의 한 방송사에서 카타르의 타밈 국왕이 공식석상에서 이란을 지지했다는 가짜 뉴스가 보도됐기 때문이다. 몇 주 뒤 CIA 전문가까지 카타르 수도 도하로 파견돼 가짜뉴스라는 걸 밝혀냈지만 사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사우디와 맞닿은 카타르의 유일한 국경도 폐쇄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카타르를 오가는 모든 항공기도 두 나라에선 발이 묶였다. 국제법에 따르면 이것이 전쟁 행위로 간주되는데도 말이다.
트럼프와 쿠슈너
카타르를 노골적으로 봉쇄한 데엔 사우디의 뒷배도 역할을 했다. 그 ‘뒷배’는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트럼프와 사우디 왕가는 원래 비즈니스 관계로 맺어져 있다.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의 호텔과 골프장은 사우디 왕가가 즐겨 찾는 곳이다. 더구나 사우디는 트럼프 호주머니가 궁할 때면 현금을 쏴줬다. 사우디 왕실 일원인 알 왈리드 빈 탈랄은 트럼프가 재정적으로 곤란했던 1991년, 2천만 달러에 달하는 요트를 구매했다. 1995년에도 자금에 허덕였던 플라자호텔 공동구매에 참가했다. 이 호텔은 3억2500만 달러에 그들에게 낙찰됐다. 이외에도 트럼프는 사우디의 최고 동맹인 에미리트에 골프휴양지를 가지고 있다. 트럼프 선거운동팀에 참가한 인물 다수도 에미리트에서 사업을 한다. 또 미국의 많은 싱크탱크들은 사우디나 에미리트로부터 돈을 받으며 백악관과 트럼프에 영향을 미친다.
친 이스라엘 노선을 고수해온 미국은 애초 사우디와 숙적인 이란에 적대적이었다. 트럼프가 취임 후 처음으로 방문한 나라도 사우디였다. 사우디는 트럼프의 방문에 6800만 달러 이상을 쓸 정도로 그들을 극진히 모셨다. 이 방문은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주선한 것이다.
쿠슈너는 트럼프 대선 운동 때부터 사우디와 에미리트가 집중적으로 공을 들인 인물이었다. 중동에 전혀 경험이 없던 그는, 어느새 미국과 사우디 진영 사이의 연락책이 돼 있었다. 그리고 트럼프가 취임한 2017년 1월, 쿠슈너는 백악관 선임 고문을 맡아 중동 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사우디는 카타르로 진격할 태세까지 보였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면 카타르 내륙 사막에는 미군 1만 명이 주둔하는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기지는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또는 IS에 맞선 주둔지로 미국의 전략지다. 트럼프가 사우디의 진격 입장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꽁무니를 뺀 것도 이 기지가 카타르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한 일이었다. 더구나 카타르와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2018년에는 카타르와 미국이 연례 전략대화를 시작해 테러리즘뿐 아니라 경제, 교육, 투자 등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했다. 타밈 국왕은 지난해 4월 방미해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카타르는 지난 1월 지역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알우데이드 공군기지를 확장·개량하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카타르는 사우디에게 눈엣가시지만, 이제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 사우디가 주도한 카타르 엠바고에 참가한 요르단은 최근 신임 카타르 대사를 임명하면서 이탈할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오만이나 쿠웨이트 등 산유국은 애초부터 사우디에 거리를 뒀다. 이란이나 터키 등 사우디 진영과 불편한 나라들은 카타르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다. 그런 와중에 타밈 카타르 국왕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사우디에 맞선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이다. 반면, 사우디는 지난해 10월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 등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사우디와 미국과의 관계는 아직까지 공고하다. 트럼프는 어쨌든 사우디를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친 이스라엘, 반 이란에 기독교 백인 중심의 트럼프에겐 사우디는 절친 이상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핵개발 우려로 인한 미국 의회의 반대에도 트럼프 정부는 사우디의 원자력 산업 개발에 통 크게 지원해주고 있다.
그러나 카타르의 OPEC 탈퇴 등으로 국제 에너지 시장의 분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됐다. 사우디 스스로도 러시아나 중국에 손짓을 보내고 있다. 2014년까지 사우디가 가장 많이 수출한 국가는 미국, 중국 순이었으나 2015년 중국이 1위로 역전하기도 했다. 미국과 거리를 두는 인도도 4위로 뛰어 올랐다. 사우디가 서구의 전통적인 동맹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전개다.
[출처: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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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와 카타르 사이의 한국
사우디가 더욱 공을 들이고 있는 나라에는 한국도 포함된다. 사우디가 한국의 큰 손이 된 지는 오래지만 그의 입김은 더욱 세지고 있다. 사우디는 한국 재벌 체제의 자금줄을 자처하며 지분을 늘려 왔다. 최근에는 현대 재벌 승계 과정을 측면 지원하고 지분을 늘렸다. 현대는 재벌 승계를 위해 2016년 현대중공업을 지주회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현대중공업지주가 계열사인 현대오일뱅크를 2017년 상장했는데, 지난 4월 이 지분의 20%가량(1조8000억 원)을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가 사들였다. 아람코가 의향을 내비친 지 2개월 만의 일이다. 현대의 재벌 승계 과정에서 아람코가 오일달러로 현금을 조달해 준 것이었다. 현대오일뱅크의 2대 주주가 된 아람코는 현대중공업과 사우디 최대 조선소 건립과 원유 판매선 발주를 약속했다.
아람코는 이미 1991년 사들인 에쓰오일의 지분율을 2015년 63.4%로 끌어올린 바 있다. 에쓰오일은 원유의 거의 전량을 사우디에서 조달한다. 현대오일뱅크도 사우디에서 원유 수입을 늘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게다가 사우디와 한국의 거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 6월 말 사우디 최고 실력자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MBS) 왕세자가 방한해 한국 정부와 10조 원 규모의 경제협력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MBS는 석유 자원 의존형 경제를 다각화하기 위해 2016년 ‘비전 2030’을 발표했는데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 첨단 기술과 투자 허브를 노리고 있다. 한국은 이 비전 2030의 주요 협력국으로 원자력 분야까지 협력한다는 계획이다.
사우디가 한국에 수조원 단위의 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카타르도 한국에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카타르는 최근 방문한 이낙연 총리에게 LNG 운반선 발주물량을 애초 60척에서 100척으로 늘리고 올 10월 고위급 회담에서 보자고 운을 뗐다. 업계에 따르면, 10조 원에 이르는 규모다.
걸프의 냉전이 한국 재벌들에게는 희소식인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는 그들이 잊은 사람들이 희생한 결과다. 이를테면, 지난해 2월부터 올해 1월 사이, 카타르 월드컵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 10명이 추가로 사망했다는 소식 말이다. 이들은 여름이면 40도를 웃도는 땡볕에서 일하며 한 달에 900리얄(약 30만 원)을 벌었다. 국제 인권 단체, 국제인권감시(IOHR)에 따르면, 올 2월까지 카타르 월드컵 건설 현장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는 4천 명에 이른다. 국제 분쟁 분석 단체 ACLED가 지난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 3월 사우디가 일으킨 예멘 내전에 따른 사망자는 9만 명, 민간인도 1만 1천여 명으로 늘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아람코가 현대오일 지분을 매입한 지난 3년 전후로 사내하청 노동자를 포함, 3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워커스 57호]
[참고자료]
독일·프랑스 공영방송 <아르떼>, ’사막 왕자들의 게임 – 새로운 걸프전쟁’, 2019.6.
외교부, <카타르 개황>,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