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들의 행위는 전체적으로 진상규명, 피해자들의 상처 치유와 회복, 2차 가해행위의 문제점에 대한 사회적 공론의 환기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활동에 해당하여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봄이 상당하다.”
7월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판사 오상용)의 판결문 중 일부다. 일명 ‘코리아연대 성폭력사건’ 2차 가해자 9명이 민주노총,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를 비롯해 공동대책위원회 10명에게 낸 손해배상 청구에서 판사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11년 시작된 김00, 2013년 시작된 이00 사건 2차 가해자들은 피해자들과 공대위가 수년 동안 요구한 ‘사과’ 대신 법정을 찾았다. 그러나 법원은 이들의 행위에 대해 2차 가해로 봄이 상당하다며 공대위의 행위는 공익에 해당한다고 봤다. 반성폭력 운동이 제기한 ‘2차 가해’ 개념을 재판부가 인정한 순간이었다.
공대위 활동에 다섯 해를 보내며 반성폭력 운동을 꾸려온 조지영 집행위원장(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 선전국장). 그는 최근 노동자연대와의 성평등/반성폭력/여성노동권 관련 사업에 대해 연대 중단을 선언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소속이기도 하다. 지역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해온 그를 만나 이번 판결의 의미와 최근 노동자연대 논란에 대한 입장을 들었다.
성폭력 사건 2차 가해자들이 낸 민사소송 1심에서 원고가 패소했다.
공대위 보고서를 이유로 제기한 명예훼손 민사소송이었다. 12명의 피고 각각이 원고 9명에 대해 1억1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청구했다.
앞서 코리아연대 사건에 대해 통합진보당은 진상조사를 하고 징계를 의결했다. 그런데 2차 가해자들이 징계결과가 나오기 전 모두 탈당하고 이를 이유로 천안지원에 징계 무효 소송을 냈다. 그런데 판사가 ‘통합진보당 규정에 따르면 2차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족을 붙여 판결을 냈다. 통합진보당은 항소했지만 그 과정에서 강제해산 되면서 원심이 확정됐다. 2차 가해자들이 이를 근거로 공대위에 손해배상을 제기한 것이다.
그들은 천안지원의 판결문과 지난 5월 열린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토론회 논의를 왜곡해 여성학자들도 2차 가해 개념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공익성에 의한 사실 적시라고 항변했다. 공익성을 입증할 방법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재판에 회의적이긴 했다. 그러나 공대위는 2차 가해 문제에 대해 싸워보기로 했다. 경찰 조사 과정이나 법정에서 입는 2차 피해를 인정하는 추세가 있었지만 운동사회 내 2차 가해에 대해서는 판례가 없었다.
결국 판사는 여성학계와 운동사회 내에서 통용되는 2차 가해 개념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원고들도 운동단체 소속이며 운동사회에서 통용되는 2차 가해의 개념을 공대위와 피해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니 이를 2차 가해로 보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판결문을 보면서 이렇게 치유가 되는 느낌은 처음’이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원고는 다시 항소했다.
공대위 활동에 어려움은 없었나.
가해자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이들이어서 공대위 성원들과 선후배 사이거나 아는 관계였다. 그래서 모두 개인적으로 힘들어했다. 각 단체 내부에 코리아연대 회원들이 있어서 갈등도 있었다. 애초 조금의 마찰은 있을 수 있어도 사건을 잘 처리할 줄 알았는데 이 믿음은 쉽게 깨졌다. 이들은 기존의 가해자들의 행위와 너무 똑같은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커서 갈등이 생기기 쉽지 않았다. 지역 내부의 정치적 마찰도 크지 않았고 전농 등 대중조직도 적극 나섰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는 최근 노동자연대와의 성평등/반성폭력/여성노동권 관련 사업에 대해 연대 중단 입장을 냈다. 노동자연대는 이를 마녀사냥이라고 비판한다.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말한다. 노동자연대는 이번에 출간한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책갈피)을 통해 성폭력 사건의 가/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유출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다. 민주노총 담당자가 독단적이라는 주장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주노총 여성위원들은 짧게는 10년에서 수십 년 동안 여성운동을 해온 이들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지원하고 해결하며 지금까지 활동했다. 이 같은 활동가들이 특정인의 주장을 아무 생각 없이 지지했다고 주장한 것에 분노한다. 더욱이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과 연대해온 단체 아닌가. 몇 달 간의 논의를 통해 결정한 것이고 특정 담당자가 아닌 여성위원회의 입장이다.
여성위원회만이 아닌 민주노총 입장으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의도 있었다. 만약 노동자연대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좀 더 광범위한 방식으로 논의가 확대될 것이라고 본다. 민주노총의 대응은 사실 늦은 감이 있다. 노동자연대가 민주노총과 함께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냈어야 했다.
노동자연대의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책갈피)에 대해 노동당 여성위원회와 성정치위원회,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이 판매 중지 및 수거를 촉구하며 연서명을 했다. 노동자연대는 이것이 “페미니즘의 발전적 논의를 저해하는 반민주적 독단”이라며 반박한다.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의 내용이 피해자중심주의나 2차 가해라는 ‘단어’에 대한 학문적인 논쟁이었다면, 큰 논란이 되더라도 발간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나 연서명 제안서 내용처럼, 학문적 논쟁보다는 성폭력 사건을 끌어 들여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를 하는 방식, 자신들과 관련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불러내는 방식이면 문제이다. 또 이 같은 서적이 일반 서점에서 판매되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법적인 절차로 중단시키는 방법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논쟁을 중단시키는 의미가 아닌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말이다.
노동조합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여성학을 공부하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성폭력 사건 때문이다. 2007년 고속도로 휴게소에 노동조합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젊은 여성이 많았는데 중간관리자 급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더구나 가해자들은 노동조합 창립성원이었다. 당시 민주노총 지역지부에 여성은 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담당자가 됐다. 조사 과정에서 2명의 가해자에 의해 거의 모든 여성조합원들이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충격적이다. 화는 나는데 어떻게 해결할지 몰랐다. 지역 여성단체 등에 문의해 봤지만 딱히 도움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난감했다. 그래서 여성단체 자료나 노동부 자료들을 모두 인쇄해 공부하면서 사건을 제기했다. 지역에서 대규모로 보고된 첫 번째 성희롱 사건이어서 노동부가 대처를 세게 했다. 국가인권위도 몇 번이나 현장 조사를 나왔다. 이렇게 사건은 해결되는 듯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 정도가 심한 조합원들이 고립됐다. 조합원들은 여기저기 불려갔고 ‘너 때문에 직장 분위기가 이렇게 됐다’, ‘너 때문에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왕따가 됐다. 결국 피해자는 회사를 그만뒀다. 노동조합도 깨졌다. 가해자는 이 직장을 그만 뒀지만 반성폭력 교육 등 어떤 조치도 없었기 때문에 어디서든 다시 유사한 가해를 저지를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담당자가 생기니까 그때부터 피해들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다.
최근 몇 년 간 노동운동에서의 변화를 느끼는가.
조심성은 높아졌다. 사실 민주노총에는 여성활동가가 별로 없다.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만해도 전에는 남성 상근자가 일하고 있으면 밥을 사다 줘야 했고 비서처럼 따라다니며 발언을 기록해야 했다. 여성 활동가들은 간사나 총무일을 주로 했다. 민주노총 사무총장이 여성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10여 년의 시간을 겪으며 여성들이 길을 내고 있다. 성폭력 사건도 줄었다. 그러나 조직 문화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건들은 늘었다. 조직민주주의 문제, 폭력이나 폭언의 문제. 조직 기반에는 기성사회의 젠더적 위계와 맞물려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아직 남아 있다. 많이 발전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동지’라 믿었던 가해자 또는 2차 가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나도 어느 순간 가해자나 2차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가해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는다. 코리아연대 가해자가 선배이기도 하고 동기나 후배이기도 하다. 옆 사람을 동지로 생각한다면, 사과하고 절차를 밟고 돌아와서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운동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용기일 것 같다.[워커스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