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필(국제민주연대)
“저희 회사는 프랑스 회사고, 점장도 프랑스인인데, 왜 노조를 거부하는 겁니까?”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깐.” 드라마 ‘송곳’ 중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송곳’은 프랑스계 유통업체 까르푸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는 과정을 다룬다. 극중 장면처럼 까르푸가 프랑스에서는 하지 못해도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노동탄압이다. 이 같이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초국적기업의 인권침해 문제에 국제사회는 오랫동안 해법을 찾아왔다.
그 결과 2011년 UN의 기업과 인권 이행 원칙(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이 탄생했다. 이 이행 원칙은 기업들이 원자재를 구입하고, 하청업체로부터 부품을 납품받아, 국내 및 해외공장에서 생산해 유통망을 거쳐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사업관계 전반에 대해 ‘듀 딜리전스(Due Diligence)*’를 실시해야 한다고 명문화했다. 유엔이 인권 및 환경침해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원칙으로 못 박자, 유럽을 중심으로 이 이행 원칙을 국내법으로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 결과 중도좌파가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의회가 세계 최초로 프랑스 대기업들에 사업관계 전반에 대해 인권 및 환경침해 여부를 파악하고 예방하는 계획을 의무화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바로 2017년 2월 21일, 프랑스 의회가 제정한 “기업의 상당주의 책임 법(French Corporate Duty of Vigilance Law)**”이 그것이다.
법은 어떻게 적용될까?
이 법은 프랑스 기업 중에서도 고용인원 5,000명을 넘는 (본사가 국외에 있는 경우에는 1만 명) 대기업에만 적용돼 약 100-150개의 프랑스 기업들이 규제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까르푸는 매년 발행하는 연간보고서에 전 세계 매장에 고용된 직원의 인권은 물론, 까르푸 매장에 납품하는 업체의 인권상황, 까르푸 매장에 납품하는 상품 생산과정에서의 인권 및 환경 침해 여부까지 포함하여, 심각한 인권 및 환경 침해에 까르푸가 연루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만일, 이런 심각한 인권 및 환경침해에 연루돼 있다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노조와 협력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지속적으로 모니터링도 한다. 그런데 까르푸가 이런 계획을 수립하지 않는다면 판사는 3개월의 경고기간을 거쳐, 까르푸에 대해 최대 1천만 유로(약 13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또한 까르푸가 계획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아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면, 해당 피해자들은 프랑스 법원에 진정을 제출할 수 있고, 프랑스 법원은 최대 3천만 유로(360억 원)까지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할 수 있다. 즉, 송곳이 다룬 까르푸에서의 노조 탄압 문제가 이 법이 통과된 뒤에 발생했다면, 한국의 노조가 프랑스 법원에 까르푸의 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을 제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법에도 맹점은 있다. 한국의 까르푸 노조원들은 자신들이 받은 피해가 회사의 잘못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잘못은 회사가 인권침해 예방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까르푸가 계획을 그럴 듯하게 세워놓았다면, 프랑스 법원은 까르푸에 법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 세계의 그 누구나 프랑스 대기업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면, 프랑스 법원에 정의를 외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답답한 한국의 현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에서도 유사한 법제정 운동이 시작됐고,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도 기업의 해외활동에까지 책임을 묻는 법이 통과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프랑스처럼 법률의 형태까지는 아니더라도 초국적기업의 해외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해 본국 정부가 인권 및 환경침해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 하청 및 협력업체의 책임에 대한 논의마저도 전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최근 장례식을 치른 한광호 열사가 근무했던 유성기업 사례다. 현대차의 협력업체인 유성기업이 현대차의 지시를 받아 노조파괴를 획책했다는 증거가 법원에 제출됐음에도 한국 정부는 현대차의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삼성과 엘지의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메탄올 중독사태도 마찬가지이다. 삼성과 엘지는 이제, 해외공장에서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더라도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할 처지에 있는데, 국내에서 발생한 직업병 사태에 대해서는 아직도 하청업체의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처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정부와 자본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사장이 책임져라”라는 구호는 국제사회에서 기업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6월 발표되는 UN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방한 보고서를 시작으로 유엔의 각종 인권기구로부터 한국기업의 인권문제에 대한 심사를 받게 된다. 새롭게 출범하는 차기정부가 시작부터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프랑스가 왜 국내의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통과시켰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워커스 29호]
* ‘Due Diligence’는 한국어로 정확한 번역은 아직 없는데 법학에서는 ‘상당주의 의무’로 번역한다. 인권위는 ‘실사’라고 번역하고 있다. 번역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
** 이 법의 내용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기업에 정의를 요구하는 유럽 시민 연합(European Coalition for Corporate Justice, ECCJ)’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