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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일상적인 일상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성소수자의 모습은 제한적이다. 사랑에 빠지거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하거나, 혹은 그런 현실에 맞서 싸우거나. 물론 그런 모습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성소수자들은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직장에 다닌다. 사랑과 (사랑을 위한) 싸움 말고도, 성소수자들에게도 일상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일상들은 지나치게 일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퀴어한 일상’이나 ‘퀴어의 일상’은 숨겨지고, 사랑밖에 모르는 고결한 존재, 사랑의 대상이나 성별정체성만 빼면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존재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물론 성에 탐닉하는 추악한 존재가 그려진다.)
말하자면,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로 그려짐으로써 오히려 일상이 삭제된다는 뜻이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아주 평범한 자리에서도 사회적으로 금지된 욕망들이 대화의 주제가 된다는 점에서, 이 일상들은 매우 비일상적이다. 흔히 그러하듯 동성애나 성전환 같은 것들이 인정돼야 하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전혀 다른 전제 위에서 흘러가는 대화는 내내 비일상적이다. 동성 간의 성애는 불가능하다는 말은 물론이고 남녀 사이에 친구란 불가능하다는 말,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말, 이 나이쯤 되면 어떤 일들을 마쳤어야 한다는 말, 이런 모든 말들이 통하지 않는 (혹은 주류 사회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관계들을 타고 흘러가는 대화는 내내 비일상적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 사실은 아주 사소한 ― 대화들이 종종 숨겨져야 한다는 점에서,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며 이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들은 늘 비일상적이다.
일상이라는 정치
사랑으로는, 혹은 성(性)으로는 그래서 불충분하다. 동성간의 성행위나 성별정정을 금지하는 법을 없애는 것으로는, 동성혼이나 성별정정을 관장하는 법을 만드는 것으로는, 성소수자 혐오발언을 차단하는 법을 만드는 것으로는, 여전히 충분하지가 않다. 그런 퀴어한 욕망들이 노동이나 학습 등 삶의 다른 영역들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 그런 욕망들을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데에 공모하는 (예를 들면 성별고정관념 등의) 문화나 제도들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지, 그런 장애물 너머에서 어떤 삶을 꾸릴 수 있을지를 상상하고 토론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바꿈으로써만 저 비일상적인 장면들은 비로소 일상이 될 수 있다. 수많은 개념들로 나뉘곤 하는 성소수자들이 기어이 한데 모여 세상과 싸우는 이유가, 세상과 싸우는 동시에 서로와 친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양한 여성 성소수자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기”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젠더표현에 관한 여성 성소수자의 차별 경험과 도전을 말하기” “성평등 관련 제도에 성소수자 권리 포함하기” 등을 목표로 지난 몇 년간 ‘궐기대회’ ‘떠들기대회’ 그리고 ‘체육대회’ 등의 다양한 자리를 만들어 온 퀴어여성네트워크(이하 퀴여네)라는 모임이 있다. 정확히는 퀴여네의 전신인 여성성소수자궐기대회기획단에서 주관한 〈여성 성소수자 궐기대회〉는 2015년 당시 대전광역시 성평등기본조례의 성소수자 관련 조항에 대해 여성가족부가 낸 ‘성소수자 지원은 양성평등기본법의 취지에서 어긋난다’는 입장에 항의하는 행사였다. 서울 대한문 앞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서 무대에 오른 이들은 대전 부치, 공대 나온 트랜스 여성, 북경여성대회가 열린 95년에 태어난 여성이자 성소수자, 60대 레즈비언, 노동운동 하는 레즈비언, 파트너와 함께 하고 있는 40대 중반의 성소수자 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기획단의 취지를 이어받은 퀴여네가 이듬해에 연 〈여성 성소수자 떠들기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치, 트랜스젠더, 레즈비언과 같은 하나의 단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일상이 이들의 삶에는 있다. 어떤 지역에 사는지, 어떤 시대를 거쳐 어떤 나이에 이르렀는지, 어떤 공간에서 생활하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누구와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지와 같은 수많은 요소들이 얽힘으로써 이들 각각의, 서로 다른, 일상이 구성된다. ‘성소수자 지원은 양성평등기본법의 취지에서 어긋난다’는 말은, 성소수자로서가 아니라 여성(혹은 남성)으로서만 평등을 보장 받으라는 말은, 그런 복잡한 일상을 삭제하라는 말, 다시 말해 일상을 포기하라는 말일 뿐이다.
일상 되찾기
사전적으로 ‘일상(日常)’은 말 그대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생을 가리킨다. 일상이 일상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 그곳에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모든 것이 있어 다른 말로 칭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근무하거나 파업하지 않는 날에도 여전히 노동자이고, 데이트하지 않는 날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연인이며, 커밍아웃하지 않은 공간에서도 여전히 성소수자이다. 끼니를 챙겨 먹는 평범한 일상도 돈을 벌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생각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수많은 정치로 구성된다. 삶의 특정한 영역을 구성하는 특정한 논리에 잠식되지 않는, 그야말로 수많은 정치가 얽히고설키며 경합하는 저 평범한 일상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정치적인 순간들이다.
퀴여네의 2017년 기획이었던 체육대회는 실행되지 못했고, 2018년에야 겨우 열릴 수 있었다. 개최 예정지였던 서울 동대문구체육관을 관리하는 동대문구시설관리공단이 사용허가는 물론 사용료 납부까지 마친 상태에서 갑자기 일방적으로 대관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10월 21일로 예정돼 있었던 대회가 한 달도 남지 않은 9월 25일, 퀴여네는 “민원이 들어온다”, “미풍양속에 어긋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대관 취소 가능성을 내비치는 대관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고, 이튿날에는 공사가 예정돼 있다는 말과 함께 대관취소 통보를 받았다. 당시 퀴여네는 곧장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고, 한 해 반 이상이 흐른 시점인 지난 5월 10일에 드디어 결정문을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공단과 동대문구에 차별 재발 방지책 마련 및 직원 대상 인권교육을 권고했다.
생활체육이라는 지극히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활동마저 제지당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일상이 얼마나 비일상적이고 첨예한 현장인지를 보여준다. 애초에 이 행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체육 활동에서 배제되거나 특정한 종목을 강요받는 현실, 그런 차별적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자적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기획됐다는 사실까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성소수자라 불리는 삶에서건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삶에서건, 배제와 차별에 맞선다는 것은 명쾌한 정답을 주는 어느 한 곳을 향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체육대회가, 때로는 식사가, 또 때로는 낮잠이, 삶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낼지도 모른다. 일상을 되찾는 것, 언제나 그것이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듯이 말이다. [워커스 55호]
* 두 대회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소개한 글로 정현희의 「‘여성성소수자’,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커밍아웃 – <2016 여성성소수자 떠들기대회>에 부쳐」(https://lgbtpride.tistory.com/1301)가 있다. 또한 이 글의 각주에는 두 대회의 참가자들이 발언한 내용을 소개한 글들이 링크돼 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박한희가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어벤져스 이야기가 아닙니다」(http://omn.kr/1j91s)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