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던진 떡밥, ‘사회주의 개헌안’
지난 호 첫 연재에서 잠깐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지나갔었지요. 노동자의 이익균점권, 자연자원 및 공공부문·기간산업 국유화 원칙까지 명시한 제헌헌법. 오늘날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우익들은 필경 ‘사회주의 헌법’이라며 거품을 물지 않을까 했었는데요. 공교롭게도 1월 초 ‘보수정론지’ 조선일보가 1면 톱 단독으로 이번 개헌에 ‘사회주의’란 딱지를 붙이며 공세에 나섰습니다. 제헌헌법조차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요?
조선일보가 문제 삼은 것은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개헌특위’) 산하기구인 자문위원회 보고서입니다. 지난 1월 8일 개헌특위 자문위원회는 455쪽에 달하는 개헌안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에 앞서 조선일보는 이 보고서를 1월 2~3일에 걸쳐 보도합니다. 참고로 이 자문위원회의 공동위원장 3명 중 하나가 한나라당 출신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인데요. 조선일보는 김형오의 말을 빌려 이번 개헌안이 “국가 개입을 강조한 사회주의적 개헌안”이며 “시장경제를 계획경제로” 바꾸려 한다고 비난했죠. 김형오는 문제의 자문위원회 보고서에서도 자신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명시해놓았습니다.
“경제분과 안의 여러 내용들은 파격적이고 국가주도 내지 국가 개입경제를 지향하고 친사회주의적이어서 시대에 맞지 않고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과 국민의 창의성·창조성 보다는 규제와 통제 중심임. 자칫 개인과 기업이 의욕을 잃고 나태와 안일 국가의존적 풍토가 조성될 우려가 있음” – 〈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보고서(2018.1)〉, 194쪽.
‘국체를 변혁’하려는 개헌안?
대체 자문위원회 개헌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기에 사회주의라고 길길이 날뛰는 걸까요? 조선일보의 지적대로라면 개헌안이 해고와 비정규직 사용을 제한하고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언급한 점, 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토지 투기규제·주거안정 등 경제 관련 규제를 강화한 게 문제라는 겁니다. 이런 내용들이 기업의 자유와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든다는 거죠. 거꾸로 보면 아주 솔직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쉬운 해고와 더 많은 비정규직이 필요하고, 가습기살균제 같은 유해물질로 인해 시민들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상관없이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줘야 하고, 거주할 곳조차 없어 떠돌아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도 부동산 투기는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회주의’라는 비난의 표적이 된 또 하나의 주요한 대목은 이번 개헌안이 현행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로 바꾸었다는 겁니다. 조선일보는 헌법재판소 판시를 인용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 질서를 포함”하며, 따라서 이 표현을 수정하는 것은 무려 “우리의 ‘국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문득 지난 호에 거론했던 1925년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여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한 민족해방 운동을 탄압했던 악법 말입니다.
물론, 아무리 조선일보가 천황폐하의 위엄과 덕을 칭송했던 친일 전력이 있었다지만, 대명천지 21세기에 과거 일본의 천황 중심 국가체제를 일컫던 ‘국체’를 거론한 건 아닐 겁니다. 이와는 구분되는 의미로 ‘국가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국가체제를 나타내는 일반명사로서 ‘국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니까요. 예를 들어 군주제와 공화제의 구분처럼 말입니다. 현행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해당 기사는 “시장경제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의 국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또 한 번의 솔직한 고백이죠. 조선일보가 규정한 국체의 주권자는 누구일까요? 시장경제에서 핵심 권력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자본이 쥐고 있죠.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며 그로부터 이윤을 얻는 모든 과정을 통제하는 것은 자본입니다. 조선일보의 국체 규정은 노래로도 부르는 ‘헌법 제1조’를 그저 좋은 문구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진짜 권력이 어디에 있으며, 이 나라의 체제가 실제로 어떤 권력을 근간으로 하는지를 드러낸 것이죠.
‘시장은 헌법보다 높다’
결국 이번 개헌안에 사회주의라는 딱지를 붙인 핵심 이유는 시장경제 대신 국가개입을 강조한다는 것인데요. 사실 현행 헌법에서도 ‘시장’이라는 단어는 딱 1번 등장합니다. 그것도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알려진 제119조 2항에서죠. “국가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즉, 헌법 조문만 본다면 현행 헌법도 시장을 국가규제의 대상으로 언급할 뿐입니다. 물론 그 바로 위의 항인 119조 1항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며 이 나라 헌법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을 헌법적 주체로까지 격상시킨 것도 현행 헌법이죠.
흥미롭게도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시장경제를 헌법조차 초월한 최상위 규범으로 올려놓으며 문제를 해결합니다. 1월 12일자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회 1월 정례회의’를 다룬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와 시장경제 질서는 헌법에 명문화돼 있지만 사실은 헌법보다 한 차원 높은 국가의 기본 원리다. (…) 따라서 본질, 그리고 헌법보다 상위 개념인 근본 규범을 배제하면 안 된다.”
이로써 세 번째 고백이 이뤄집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불법폭력시위 주동자’라며 법치주의의 전위를 자임하던 조선일보는 이제 모든 법 위에 자본의 이윤창출 논리가 있다는 진실을 시인하죠. 헌법 역시도 자본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어야 하며 이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앞서 간략히 살펴보았듯 이번 개헌안은 노동권과 생활권을 비롯해 기본권을 강화하려는 점에서 진보적인 측면이 있지만 경제체제와 관련해서는 기간산업 국유화 원칙까지 담았던 제헌헌법과 비교해보면 현행 헌법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기업을 헌법적 주체로 인정한 119조 1항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죠. 다만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폐해가 워낙 심각하고 그로 인한 대중적 불만이 커지다보니 이를 의식해 국가의 규제권한을 좀 더 강화한 겁니다. 사회주의는 생산의 원리 자체가 다릅니다. 자본의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를 위한 생산체제죠. 즉, 이번 자문위원회 개헌안을 사회주의 헌법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익이 이렇게 사회주의 낙인찍기를 남발하는 것은, 자본의 이윤을 조금이라도 제약하는 모든 것을 범죄시하기 위함일 겁니다.
국가개입은 사회주의인가?
‘시장-자유-자본주의 vs 국가-통제-사회주의’?
사실 국가의 경제개입과 규제를 비난하면서 사회주의를 들먹이는 일은 흔합니다. 가령 대표적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용만은 올 신년인터뷰에서 규제완화를 요구하며 “규제수준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높다”고 불평했지요. 앞서 인용했던 자문위원회 개헌안에 대한 김형오 자문위원장의 의견서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시장-자유-자본주의 vs 국가-통제-사회주의’라는 선악구도는 주류경제학의 근간이자 우리가 교육과 언론을 통해 매일 접하는 이 사회의 핵심 이데올로기입니다.
하지만 이 선악구도는 정말 중요한 문제를 은폐합니다. ‘무엇을 위한, 누구의, 어떤’ 자유이고 통제인가의 문제 말입니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건가요? 취업, 노동, 출산, 육아, 보육, 교육, 주거, 의료, 노후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평생 동안 정말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요? 첫 단추인 취업부터 좌절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공식실업률만 해도 청년 10명 중 1명은 실업자 처지이고, 구직을 포기하거나 불안정한 단기 일자리에 머물러 있는 청년들까지 포함하면 잠재적 실업자군은 훨씬 더 늘어나죠. 한편에서는 ‘내 집 마련’이나 풍족한 미래 같은 건 너무나 거창한 꿈이 되어버렸으니 차라리 포기하고 그저 오늘 하루의 소소한 행복을 챙기자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당신의 삶은 한 번 뿐’)족이나 스몰럭셔리(small luxury, ‘나를 위한 작은 사치’라고도 많이 부르죠)가 유행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김생민이 선풍적 인기를 끌며 밥 한 끼나 술 한 잔 사는 돈까지 아껴 재테크에 나서지 않으면 여지없이 ‘바보’로 규정되고 말죠. 오늘의 소소한 행복이라도 누리려면 미래를 포기해야 하고, 미래의 안정을 위해서는 오늘을 포기해야 하는 세상이 만든 동전의 양면입니다. 이건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저당과 채무에 가깝죠.
가만히 있으라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진정한 자유는 이윤추구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이윤추구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게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온 자본의 정치철학(이것을 철학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말입니다)의 핵심이죠. 앞서 조선일보가 개헌안 논란에서 문제제기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노동자가 해고당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일할 권리, 소비자들이 유해물질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한 제품을 사용할 권리, 우리 모두가 집 걱정 없이 인간적인 주거생활을 누릴 권리는 모두 이윤추구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제에 정치논리를 들이대지 말라고 주장하죠. 이것 역시 고전적 주장인데, 사회주의 개헌안 논란을 불러일으킨 조선일보 기사는 한 대학교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썼습니다. “경제는 경제 원리로 움직이지, 어떻게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냐.”
정치와 경제는 다르고, 경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시장원리에 따라 작동해야 하며, 따라서 국가의 개입은 경제를 망친다는 이 주장도 지겹도록 들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대체 정치의 영역으로 남는 건 뭘까요? 우리의 생활과 생존은 단 한 시도 경제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치가 경제와 상관없는 거라면 우리에게 남는 정치는 결국 몇 년에 한 번 투표용지에 기표해 투표함에 넣는 행위 이외엔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경제에 개입하지 말라, 경제에 민주주의를 들이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런 말입니다.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고, 나가라면 나가고, 불만 있으면 돈 벌고, 돈 없으면 당신 스스로를 탓하고, 심심하면 투표나 하라.’
국가, 자본주의의 최종병기
사실 국가개입에 대한 자본의 태도는 완전히 이중적입니다. 국가개입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국가개입을 요구합니다. ‘이윤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고도 부르는데요. 노동권 강화나 사회복지 확충 등 자본의 이해관계와 다르거나 상충하는 국가개입은 반대하거나 최소화시키면서도,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시장을 만들어주거나 자본이 위기에 빠졌을 때 막대한 지출을 통해 자본주의를 구원하라고 요구하죠. 이 때문인지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현대 국가는 전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국가개입 없이 단 하루도 제대로 버티기 힘들 겁니다. 환율이나 이자율부터 시작해 수요 진작과 경기부양책, 산업지원정책, 금융·재정지원 등 국가는 그야말로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지요. 가령 지난 1997년 IMF 위기 때 정부의 구제금융 도입과 200조 원에 달하는 공적자금 투입이 없었다면, 정리해고와 파견제를 전격 시행하지 않았다면,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파업을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해 신속하게 폭력진압하고 노동조합들을 분쇄하지 않았다면,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민영화, 금융시장 전면개방 등의 신자유주의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다면 한국자본주의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한 가지 사례를 더 봅시다. 1970년대 초 전세계적으로 불황이 닥쳤고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죠. 기업들이 부채에 허덕이자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던 김용완이 박정희에게 특단의 대책을 요구합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혹은 8.3 사채동결조치라고도 알려진 대책을 발표합니다. 기업들의 막대한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기존 채무관계를 전격 무효화하고 3년 거치·5년 저이자 분할상환으로 대체한 것이죠. 지난해 장기 악성채무에 시달리는 취약계층 부채탕감을 두고 ‘도덕적 해이’라는 보수언론의 반발이 상당했는데요. 국가가 직접 기업부채까지 해결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지 궁금합니다.
무엇을 위한 누구의 통제인가
결국 국가개입 그 자체는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한 개입이 주를 이루죠. 그렇다고 국가개입이 항상 자본주의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본이 국가에 대해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노동자들 역시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즉, 국가개입의 방향에는 자본과 노동 간 힘 대결(‘계급투쟁’이라고도 부르죠)의 양상과 결과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물론 국가의 역할은 체제를 수호하는 것이니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아예 묵살할 수는 없겠죠. 그렇기에 오늘날 문재인 정부는 한편으로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 같은 대중의 요구를 일정 부분 반영한 대책을 내놓으면서도 산입범위 확대 등을 통해 임금인상을 무력화하거나 정규직화 전환심의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을 배제하는 등 빛 좋은 개살구로 만들어버리고 있죠. 다른 한편으로는 코스닥 시장 활성화와 펀드기금 조성, 대폭적인 규제완화 등 자본의 이윤창출에 충실히 복무합니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선거에서 노동자당이나 진보정당이 더 많이 당선하면 권력을 대중이 장악해 노동자를 위한 국가개입을 전면화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서 조선일보를 통해 확인했던 솔직한 고백들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헌법과 법치, 삼권분립 등 권력에 대한 여러 ‘민주주의적’ 장치들을 수사로 만들어버리는 진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고백 말이죠. 이 자본의 권력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전 과정을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실제 이 생산의 전 과정을 직접 수행하는 것은 노동자들이지만요. 사회주의는 법의 문구를 좀 바꾼다거나 공직자를 많이 확보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은 이해관계가 다르면 국가권력조차 무력화시키죠. 앞으로 우리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다음과 같은 자본의 핵심 모토를 확인하게 될 겁니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린다” “말로 안 되면 힘으로!”[워커스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