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은 공권력을 얼마나 믿습니까?
“나 대한민국 검사야.” 법정 드라마나 범죄·느와르 영화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표현이죠(실제 검사들은 이 말을 잘 쓰지는 않는다고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넘치는 자부심을, 다른 한편으로는 ‘검사’라는 지위가 상징하는 위압감을 내뿜는데요. 최근 이 위세 높은 분들이 저지른 범죄와 추태가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특수강간 사건과 고 장자연 씨 죽음을 둘러싼 성범죄 사건을 무마한 게 대표적이죠. 투쟁 집회나 시위 건에 대해서는 채증 사진을 근거로 악착같이 달려들어 하다못해 벌금이라도 물게 하더니, 유독 ‘높으신 분들’이나 본인들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동영상을 찍어 와도 ‘증거 불충분’이라며 무혐의 처분을 내린 ‘대한민국 검사’들.
검찰의 행태가 부각되면서 ‘검찰·경찰 수사권 조정’ 요구가 부쩍 힘을 받는 모양새입니다. ‘검찰의 과도한 권한을 경찰로 이관해 견제해야 한다’는 논리죠. 그런데 경찰은 얼마나 다를까요? 당장 장자연 씨 사망 사건에 대해 경찰 역시 의문스러울 정도의 부실 수사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승리 게이트’라는 이름까지 얻은 버닝썬 사태는 경찰 고위 간부가 직접 유착돼 있어 경찰 자체가 조사대상이죠.
범죄와 형벌을 전담하는 형사사법기관들은 그 역할과 권한의 특성상 시민에게는 실물적인 공권력 그 자체일 겁니다. 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위축되거나, 때론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죠. 그런데 정작 이 기관들에 대한 시민의 신뢰도는 낮습니다. 지난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간한 <한국의 형사사법체계 및 관리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형사사법기관 5곳(경찰, 검찰, 법원, 교정시설, 보호기관) 가운데 ‘검찰을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35%에 불과해 최하위를 기록했죠. ‘검찰이 청렴한 것으로 보인다’고 답한 비율도 30%에 머물렀습니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작년 11월 발표한 를 보면 꼴찌는 고작 1.8%를 얻은 국회였고, 그 바로 다음이 검찰(2.0%), 경찰(2.7%)이었습니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대중의 통제로부터는 자유로운 공권력. 신뢰를 받을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공권력은 대중의 신뢰에 별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기에, 대중이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되니까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수준에 이른 사건들을 처리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뿐입니다.
#2. 그들의 파워게임, 당신은 배제된다
이른바 ‘장·학·썬(장자연, 김학의, 버닝썬)’으로도 불리는 일련의 사태로 인해 수사권 조정 문제와 맞물려 검찰과 경찰이 서로의 혐의를 두고 다투는 프레임이 형성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위 공직자들을 전담할 또 다른 ‘독립적인’ 형사기관(‘고위공직자 범죄수사처’, 약칭 공수처) 설치 시도가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분명 고위 공직자나 검·경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함께, 이들의 범죄를 강도 높게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열망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사권 조정이든 공수처 신설이든, 대중의 통제와는 무관한 ‘권력 기구 간의 견제 장치’일 뿐이죠.
공권력이 저질러온 범죄의 역사는 ‘권력 기구 간의 견제로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보여줍니다. 서로 견제한다던 국가기관들은 각자 알아서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거나, 심지어 재판거래 사태에서 드러나듯 서로 결탁하기도 하죠. 사실 권력 기구 간의 견제 장치는 그 자체로는 민주주의에 고유한 것도 아니고 별 상관도 없습니다. 이건 조선시대에도 있던 겁니다. 감찰기구들은 고위 관료들을 조사하거나 탄핵할 수 있었고, 정책이나 조처에 반발해 단체행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전제 왕정을 제어하는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왕에 대해서도 사극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를 전문적으로,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기관들이었죠.
대중의 통제를 차단한 상태에서 권력 기구 간의 쟁투는 말 그대로 권력자들 혹은 그 집단들 사이의 파워게임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을 벗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수사권을 경찰이 갖게 된다고 한들, 장자연 씨 사망 사건은 물론이고 유성기업이나 삼성전자서비스 노조파괴에서 경찰이 사측에 협력했던 것처럼, 경찰이 수사를 해태하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공수처를 설치한다고 해도, 그 공수처가 고위 공직자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범죄를 눈감아주면 그만입니다. 공수처가 또 다른 검찰, 혹은 검찰 위의 검찰이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죠. 결코 대중에게 실질적인 권력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이 체제의 한계가 바로 여기입니다.
#3. 사회주의 경찰과 검찰
사회주의에서도 물론 형사사법 업무와 치안 업무는 필요합니다. 사회주의는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인류보완계획’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한순간에 모든 범죄와 악행이 사라지고 인간이 서로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꿈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의 ‘질서’입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 일도 당연히 있어야겠죠.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사회에서 ‘국가의 소멸’을 주장합니다. 이는 사회주의 이전의 국가가 소수의 권력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기제이기 때문에 여러 복잡한 억압장치를 필요로 하는 반면, 다수자인 노동자와 민중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주의에서는 다수를 억압할 기구 자체가 불필요할뿐더러 사회의 목적에도 반대되므로 철폐해야 한다는 의미죠. 동시에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행정 업무들을 민주적으로 통제·운영하면서, 그간 관료적·위계적·억압적으로 이뤄진 공권력을 질적으로 변혁시킨다는 겁니다. 즉,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지 질서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죠.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와 새로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지금의 경찰과 검찰 같은 형사사법기관들이 불가피하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권한과 기능, 운영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죠.
일단 법과 형사사법의 내용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적으로, 권력은 더 이상 자본의 사적 소유를 수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생산 권력을 장악하고 부를 사회적으로 활용할 것을 옹호하죠. 가령, 사용자에 맞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다고 체포·진압해 처벌하는 법적 근거들은 철폐될 겁니다. 반면 노동자의 권리를 제약하거나, 사회적으로 생산한 부를 이윤으로 독식하려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 되겠죠.
이번 주제인 권력기관의 운영 원리에 초점을 맞춰 보자면, 사회주의의 기본 주장 중 하나는 노동자와 민중이 허울뿐인 ‘명목상 주권자’가 아니라 권력을 통제하는 실질적 주체라는 겁니다. 그 수단으로 모든 주요 공직자를 선출함은 물론이고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가령 지금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의원, 대통령은 선거로 뽑긴 하지만 대중에 의해 소환되지는 않습니다. 행정부나 사법부는 선거를 거치지도 않죠. 선거 때만 재래시장을 돌면서 떡볶이 사먹고 악수하는 지겨운 쇼를 반복하고, 대중에게는 자신의 직책에 대한 그 어떤 실질적 책임도 지지 않는 자들이 형사사법은 물론이고 국가행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구조 자체를 깨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경찰관이나 검사를 선거로 뽑아야 한다는 걸까요? 저는 일선 경찰관이나 평검사 전부를 꼭 선출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직책과 범위까지 선출할 것인가의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많은 권한을 위임받게 될 총장·청장, 지청장·지검장 등을 포함한 주요 직위는 각급 지역이나 전국 차원의 선거로 뽑을 수 있겠죠. 중요한 것은 소환입니다. 소환은 직책을 가리지 않고 적용하는 거죠. 순경과 평검사부터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에 이르기까지, 비리나 범죄, 직무수행에 문제가 있다면 해당 지역 주민들이나 그 대표자들인 평의회가 문제의 인물 혹은 집단을 소환해 직무를 정지시키거나 직책을 박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평의회 의원들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경찰이나 검찰을 소환하려 했다면 어떻게 할까요? 선출된 대표자들 역시 당연히 상시적인 소환의 대상입니다. 대표자들이 부정한 목적으로 소환권을 사용했다면, 바로 그 대표자들은 자신을 선출한 주민들에게 소환되는 것이죠.
#4. 그들은 계속 존재한다. 잡히지 않을 뿐
이렇게 대중이 공권력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다면, 수사 업무를 어느 부서가 담당할 것인지의 문제는 부차적입니다. 애초에 특정 기관의 막강한 권한을 견제하자는 게 수사권 조정의 명분인데, 그 근본적인 문제를 민주적 통제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처럼 경찰과 검찰 두 조직을 다 존치시킬 수도 있고, 수사부터 기소까지 통합적으로 진행하도록 조직을 일원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국가기관의 권한은 더 이상 ‘독점적 특권’이 아니라 ‘업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공수처 역시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행 검찰·경찰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아예 없는 것보다야 공수처라도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설치된다면, 존립 명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내려 하겠죠. 하지만 특권을 누리는 고위 공직자 집단 자체가 존재하는 한, 부정과 비리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특권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그 특권을 활용해 이득을 누리려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공수처는 단서가 드러나는 비리와 범죄에 대해서는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겠지만(이 경우에도 그들의 의지와 선의, 양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 범죄를 재생산하는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해법은 아닌 것이죠.
이제 우리는 “공직이 왜 특권이 되어야 하는가, 왜 ‘고위 공직자’라는 집단이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지금도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무원들은 말로는 ‘국민의 충복’이 되겠다거나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하지만, 실제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기제가 없다면 말은 그저 공허할 뿐입니다. 사회주의에서는 공수처를 따로 둘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은 공직에 그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으며, 지금과 같은 ‘고위 공직자 집단’의 형성 자체를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871년,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빠리의 노동자 민중은 공직자들을 상시 소환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그들에게 노동자 평균 임금만을 지급하며 일체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누가 공직을 맡으려 하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물어야 합니다. 사회주의고 뭐고를 떠나서,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고 특권을 누리겠다는 사람은 공직을 맡을 자격이 없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공직자에 대한 대우는 바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공직자가 자신의 직무를 다해 노력과 성과를 보여준다면, 구성원들의 합의 하에 격려 차원에서 보상을 더 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특권 수준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공직이 곧 특권을 보증하는 세상, ‘국민의 충복’이 아니라 국민을 종으로 여겨도 ‘고위직’ 명패를 달 수 있는 세상, 대중의 통제가 아니라 상급자와 자본의 통제에 복종하는 세상이 지속하는 한, 공수처를 만든다 해도 김학의‘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잡히느냐, 잡히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겠죠. ‘걸리는 놈이 멍청한 놈’이라는 격언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요. 혹은 아예 공수처조차 동조자로 만들어버릴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땐, ‘제4의 수사기관’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려나요?(워커스 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