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온이 영하 18도까지 떨어진 날. 이렇게 추운 날엔 목동 열병합 발전소의 네 개 굴뚝에서 쉼 없이 연기가 나야 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나의 굴뚝에선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굴뚝 위에는 빨갛고 파란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하루 두 번씩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곳. 밤이 되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와 그 곳을 향해 손을 흔든다.
파인텍 노동자 박준호와 홍기탁이 그 굴뚝을 오른 건 2017년 11월 12일 새벽 4시 30분 경이었다. 그들은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고 또 밟았다. 굴뚝 중간부터는 사다리를 타야 했다. 정신없이 도달한 곳의 높이는 75m. 이들은 SNS로 고공농성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민주노조 사수,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이사의 3승계(고용, 노동조합, 단체협약) 이행 △노동악법 철폐 △헬조선 악의 축(독점재벌, 국정원, 자유한국당) 해체를 요구했다. 기약 없는 굴뚝 위 생활이 시작됐다.
민주정부에서 ‘투쟁!’ 외치기
회사가 두 번이나 바뀌는 사이, 500명이 넘던 조합원은 5명으로 줄었다. 경력은 일체 인정되지 않았다. 사측은 ‘경영 위기’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정리해고를 강행했고 대한민국은 이를 용납했다. 한국합섬의 노동자였고, 스타케미칼의 복직자였으며, 파인텍의 노동자인 이들은 혹독한 세월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의 토양을 바꾸지 않는 한 해고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경험 속에서 체득했다.
투쟁의 조건은 녹록치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사 간 문제는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야 한다는 사람이다. 문 대통령의 노동 행보는 국민들로 하여금 꽤 두터운 신임을 받는 듯 보인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사회적 대화’라는 훈풍이 분다. 무르익는 대화 분위기 속에 문득 끼어 든 ‘투쟁’은 사회 어딘가로 끼얹는 찬물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이제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대화’라는 카드는 이미 동난 지 오래다. ‘진짜 사장’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는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며 선을 그었고, 바지 사장 강민표 파인텍 대표(스타플렉스 전무)와는 18차례의 교섭에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들의 정치적 요구를 두고 ‘그게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얘기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내비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으레 하는 ‘정치적 수사’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도 치열하고 진지하다. 그들이 내건 요구안은, 파인텍지회에 남은 5명의 노동자들이 치열한 내부토론을 거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홍기탁은 “노동자가 국정원, 자유한국당, 독점재벌 해체를 외치는 건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었다”라고 했다. 그는 “박정희 시절부터 노조를 만든 노동자들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고,
진상 규명도 못 한 의문사도 남아 있다”며 “헬조선을 만든 수구 정치세력과 국정원, 독점 재벌은 개혁으론 절대 바꿀 수 없고 해체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준호는 “우리 사회 근본 뿌리가 바뀌지 않아 반복되는 것”이라며 “지난 촛불 정국에서 새누리당 해체, 국정원 해체, 독점재벌 해체 등을 요구했지만 시민의 힘으로 탄생한 정권은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액션만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먹튀 사장 끝까지 쫓기
파인텍에 남아있는 5명의 노동자는 10년이 넘는 투쟁의 역사를 함께 만들었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일했던 충남 아산의 파인텍 공장은 스타케미칼 해고 노동자들이 3년간의 복직 투쟁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차광호의 408일 고공농성(2014년 5월 27일~2015년 7월 8일)을 포함해 10명의 노동자들이 뭉쳐 복직 합의를 이끌어냈다. 스타케미칼(대표 김세권) 사측은 고용, 노동조합, 단체협약 3승계를 약속하면서 스타케미칼이 청산 절차를 거치고 있기에 신설 법인을 새로 만들 것이라 했다.
이후 스타케미칼의 모회사 스타플렉스(대표 김세권)는 충남 아산에 파인텍 공장을 세우고 2016년 1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공장에선 이전까지 만들던 폴리에스테르 원사가 아닌 천막에 쓰이는 타폴린을 만들었다. 파인텍 공장의 직원은 복직된 8명이 전부였다. 함께 투쟁하던 11명 중 3명은 가정문제로 아산행을 포기했다. 복직자들은 허허벌판에 세워진 300평도 안 되는 작은 공장으로 출퇴근을 했다. 기숙사엔 선풍기도 TV도, 심지어 이불도 없었다. 식사는 한 끼만 제공됐고, 나머지 두 끼는 자비를 들여 사 먹었다. 시급은 당시 최저임금이었던 6,030원에 1,000원을 더한 7,030원이었다. 각종 수당과 상여금은 전무했다. 열 달 일하는 동안 손에 쥔 임금은 천만 원이 채 안 됐다. 그 사이 동료 3명이 그만둬 5명이 남았다.
차광호는 “처음부터 노동자를 말려 죽이려고 기획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세권은 깡통 공장을 세우고 형식적으로만 돌린 다음 우리가 지쳐 나가떨어지길 기다렸어요. 공장 운영도 비정상적이었고요. 적은 인원이 일을 하다 보니 메인 기계는 한 번도 풀가동된 적이 없습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면서 천막 물량이 엄청 부족한데도 단 한 시간의 잔업도 없었어요.“
신설 법인의 대표는 스타플렉스의 전무인 강민표가 맡았는데 그는 교섭 때만 얼굴을 비췄다. 새로운 단체협상 체결을 위해 18차례의 교섭을 진행했지만, 사측은 법적 의무가 있는 조항에 대해서만 합의를 했다. 노조 활동 및 노동 조건에 대해선 전면 불수용 의사를 밝혔다.
결국, 파인텍지회는 2016년 10월 28일 전면 파업에 나섰다. 곧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이들은 정치투쟁에 결합해 반복되는 악순환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겨울, 그들은 전원 서울로 상경해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에 둥지를 틀고 정권 퇴진 운동을 벌여나갔다.
그 사이 회사는 공장 기계를 철수했다. 파인텍 공장이 있던 자리엔 다른 사업자가 들어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시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이사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스타플렉스 대표이사는 파인텍 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며 뒷짐을 졌다. 파인텍 노동자 김옥배는 “강민표 대표는 스타플렉스의 전무였고, 스타플렉스의 영업이사가 파인텍의 공장장으로 왔는데도 어떻게 스타플렉스와는 무관하다고 하는지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0년 10월, 스타플렉스는 자회사 스타케미칼을 설립하고 한국합섬 제2공장을 인수했다. 파산한 빈 공장을 지키던 한국합섬 노조는 5년간의 투쟁을 정리하고 고용보장과 공장 정상화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공장 가동 1년 8개월 후, 김세권 대표는 시무식 자리에서 ‘공급과잉’을 이유로 공장가동 중단을 선언했다. 차광호는 “공장 가동 중단이나 해외이전, 공장 매각 같은 상황이 있을 때 노조와 6개월 전에 합의해 이행하는 절차를 모두 무시했다”고 분노했다. 얼마 후 회사는 권고 사직서를 돌렸다. 제 손으로 사직서를 쓸 수 없던 29명이 해고됐다.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차광호를 비롯한 해고자 11명이 전면 투쟁을 결의했다. 차광호는 45m 굴뚝 위로 올라갔고, 나머지 10명도 전국 각지에서 투쟁을 벌였다.
차광호는 “스타케미칼은 평가금액 870억 짜리 공장을 399억 헐값에 샀다. 공장 부지가 3만 2천 평쯤 되고, 기계도 최근에 들여온 거라 다른 기업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며 “김세권 대표이사는 공장을 조금 돌리다 팔아버리는 게 이윤이 남을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스타케미칼 지분을 90%를 넘게 가지고 있으니 땅 시세차익과 공장 설비를 매각시키는 게 목적이었을 거다. 공장 정상화를 내세워 먹튀한 것”이라고 말했다.
흔들리는 75m 굴뚝 위에서 버티기
지상의 적이 스타플렉스 자본이라면 고공에서의 적은 바로 추위다. 사방이 뚫린 75m 굴뚝에서 느끼는 추위는 위협적이다. 영하 7~8도에서 바람까지 불면 안에 있는 모든 게 얼어버린다. 땅에서 투쟁할 때는 돌아갈 집이라도 있었지만, 굴뚝위에서는 돌아갈 곳도 없다. 멈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건 그저 반복되는 하루다. 심한 바람 때문에 굴뚝이 흔들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멀미를 참아야 한다. 홍기탁은 굴뚝이 뚝, 하고 부러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박준호는 요새 부쩍 위염이 잦다. 차광호는 그의 약을 준비하는 빈도가 늘었다.
고공농성 64일째 되는 날, 의사와 한의사가 직접 굴뚝으로 올라가 이들의 건강 상태를 진단했다. 허리와 어깨, 척추 등에 무리가 크다고 했다. 똑바로 눕지도, 똑바로 설 수도 없는 협소한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장의 기능이 약화돼 통증과 설사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그들과 연락하는 심리치료사는 드러난 위험보다 드러나지 않은 위험이 더 클 수 있다고 지적하며 우울과 분노가 길어질수록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더 많은 얼굴과 함께 꿈꾸기
모두가 걱정스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고공농성자들은 현재의 투쟁이 ‘고공농성’에만 집중되지 않길 바라고 있다. 홍기탁은 “함께 싸운 사람들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혼자 굴뚝에 올라갔으면 이길 수 없었다. 11명이 있었고, 수많은 연대 동지들이 있어서 합의서가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 12월 30일엔 ‘408+49’ 행사가 있었다. 차광호의 408일과 박준호, 홍기탁의 49일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연대 제안자들을 모았다. 457(408+49)명을 모으려고 했는데 1198명이나 모였다. ‘408+49’의 제안자 송경동 시인은 “박준호, 홍기탁은 단단하고 신념이 강한 친구들”이라며 “새로운 삶을 위해 앞장서 투쟁하는 사람들 곁에 함께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제안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어둠이 내린 저녁, 파인텍 노동자 조정기가 음향 장치를 켠다. 저녁문화제가 시작됐다. 차광호가 마이크를 잡는다.
“몸은 노동자인데 머리는 자본가인 해괴한 괴물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노동자의 머리로 투쟁합시다. 우리의 고공농성은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현장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공유하고, 그 동지가 다시 이 자리에 와서 함께 투쟁할 때 위에 있는 사람도 빨리 내려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