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사회변혁노동자당 사회운동국장)
“여기 이 자리에서, 우리 아빠가, ‘숨이 막혀요!’라고 열한 번이나 외쳤습니다. 아무도 아빠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응급구조원들과 경찰관들은 우리 뉴욕 시민들 앞에서 자기소임을 저버렸습니다. 결백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려달라고 빌었는데, 마지막 숨을 쉬기 위해 그토록 싸웠는데. 슬플 때마다, 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이제 이 자리에 와야 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빠의 목소리가 되어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숨이 막힌다고,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숨이 막혀서 죽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 아빠를 죽였습니다….” – 에리카 가너, 2014 12월 11일 뉴욕 집회 중 발언
세월호 참사 발생 후 91일 차, 7월의 여름. 미국 뉴욕도 무더위가 한창이다. 길가의 미용품점 앞에 가만히 서 있던 흑인 남자를 경찰관 두 명이 난데없이 덮친다. 경찰관들은 그를 땅바닥에 넘어뜨린 뒤, 무면허 담배를 팔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추궁하며, 등을 찍어 누르고 목을 조른다. ‘숨이 막혀요!’ 뜨거운 아스팔트에 얼굴이 짓눌린 채, 희미해져 가는 탁한 목소리로 거듭 외치다가 의식을 잃었지만, 7분 뒤 구급차가 도착한 뒤에도 응급처치를 한 사람은 없었다.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한 그의 이름은 에릭 가너였다.
미국에서 경찰 공권력에 목숨을 잃는 총기 미소지 민간인은 해마다 평균 300여 명이다. 그 중 90여 명이 흑인이다. 미국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이 12%에 불과하니 사법정의 불균형의 정도를 가늠할 만하다. ‘총기 소지자’나 ‘비협조자’로 분류된 민간인까지 합치면 연간 1600여 명이 경찰에게 피살당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연 300건의 국가폭력 사건 중에서 조차도 고작 4건에만 경찰관의 법적 처벌이나 징계가 뒤따랐다.
에릭의 죽음도 그렇게 묻힐 뻔했다. 그러나 마침 지나가던 시민인 램지 오르타가 찍은 영상이 인터넷에 오르면서 사태가 급속도로 퍼졌다. 경찰은 총기 소지라는 누명을 씌워 램지 오르타를 기소했지만, 에릭 가너의 죽음이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의 불씨를 당기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 날, 엄마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조기 퇴근한 에리카는 영문도 모른 채 그리로 향했다. 방송국 차량이 거리를 막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묻고 물어 인터넷에 동영상이 있다고 들었다. 에리카는 동생들과 엄마와 함께 아빠가 피살당하는 모습을 화면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택시가 멈췄다. 거리에서는 벌써 만 명이 넘는 뉴욕커들이 “숨이 막혀요!”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었다. 에리카는 택시에서 내려서 “우리 아빠에요! 제가 에릭 딸이에요!”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유가족을 감싸 안고 함께 울며 함께 걸었다. 평생 가장 괴로우면서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5개월 뒤, “I can’t breathe!”(숨이 막혀요!)는 50회가 넘는 대규모 집회에서 유색인종, 소수자, 흑인을 대변하는 구호가 돼있었다. 사람들은 목을 죄어오는 공권력의 인종차별과 억압 앞에서 호흡을 맞춰 행진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항상 에리카가 있었다. 에리카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백악관 초청을 받았지만, 힐러리보다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그나마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약이라서였다. 미국 보수 우파의 공작도 이겨내면서,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을 다잡고 조직했고, 인터넷으로 끊임없이 아빠와, 자신과, 피억압자 모두를 이야기했다. 확성기와 마이크를 들고 행진했다.
수많은 에릭과 에리카들
그러던 작년 12월 30일, 에리카는 2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났다. 흑인 여성으로 살아남기란 그만큼 고달픈 일이다. 작년 8월에 에리카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들 에릭을 낳았다. 에리카는 임신 도중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심장에 이상이 생긴 줄 몰랐다. 미국 흑인 산모들의 사망률은 백인 산모보다 다섯 배나 높다. 턱없이 높은 보험료, 흑인 여성에 대한 의료진의 편견과 무지, 구조적 불평등 탓이다.
올해 1월 8일, 에릭이 피살당했던 여럿이 함께 행진했던, 숨 막히는 뉴욕의 거리에서, 에리카의 장례 행렬이 있었다.
흑인 인권운동가 알 샤프론 목사의 말대로, 에리카의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하지만, 마음은 2014년 여름부터 무너져 있었다. 에리카의 심장을 마비시킨 것은 살인자를 법정에 세우지 못하게 막는 불의한 공권력이었다. 에릭의 목을 조른 경찰관 다니엘 판탈레오는 형량은커녕 부서만 옮기고 여전히 뉴욕경찰국에서 일하고 있다.
왜 우리는 에리카를 꼭 기억해야 할까. ‘먼 나라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 ‘피부가 검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서, 그게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 이유는 없다. 이곳에도 수많은 에릭과 에리카들이 있다. 이주민이라서, 소수자라서, 장애인이라서, 여성이라서, 더 많은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세월호 가족을 향해 물대포를 쏘던 경찰 앞에서 함게 물벼락을 맞았고, 노란 리본 앞에서 가슴이 미어져야만 했다. 우리는 무엇을 토대로 그런 고통을 함께 만들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일까. 지금 여기 머나먼 한국 땅에서도 우리가 에리카의 죽음을 애도하고, ‘불랙 라이브즈 매터’를 함께 외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워커스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