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봉인되었던 마법의 단지에서 풀려나온 자본주의 착취의 유령. 비정규직이란 정규직이 아닌 일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정작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비정규직이 어떤 고용기간, 근무 형태, 직종, 사회적 보장을 가리키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은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의 벌거벗은 비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상을 면밀히 연구하고 분석함으로써 정체를 밝힐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 아니라 엄격한 뜻에서 이데올로기라고 보고 그것이 현실을 어떻게 환상으로 만들어버리는지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비정규직의 역사적인 기원은 이렇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외채협상을 빌미로 국제통화기금이 강요한 구조조정 정책 가운데 필수 품목인 노동시장 유연화와 더불어 마침내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가 합법화되었다. 환란(煥亂)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극복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오랫동안 칼을 갈고 있던 자본은 이때다 싶게 두 가지 정책을 국가의 도움을 받아 밀어붙였다. 먼저 정리해고제란 주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언제나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시도 때도 없이 해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악마적인 제도를 가리킨다. 이름난 전문 CEO가 취임하면 경영 합리화를 위해 구조조정을 실행하고 뒤이어 정리해고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행동 시나리오는 국제 표준이 되었다. 한편 파견근로제란 기업의 핵심부문의 고용을 제외한 다양한 부문의 노동을 외주, 하청, 하청의 하청에 이르는 다양한 업체들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직접 고용했을 때 따르는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저항을 싹부터 잘라내는 획기적 외과수술로, 한국에서 특히 크게 각광 받았다. 독점이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이러한 파견 근로제는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도 역시 재벌기업이 애용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의 전체 고용 근로자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비정규직이라는 괴담이 널리 퍼졌다.
비정규직을 특정한 고용 형태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노동 시장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퍼뜨린 악성 이데올로기에 깊이 중독되었음을 보여줄 뿐이다. 비정규직이란 내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는 것처럼 저 바깥에 있는 주어진 사실이 아니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란 굳이 말하자면 정규직을 고용하지 않고도 자본의 마음대로 필요할 때 필요한 시간 만큼 그것도 가급적이면 헐값에 노동력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자본에겐 꿈같은 일이 가능해진 계급투쟁의 효과일 뿐이다. 문제는 노동자의 힘은 약해지고 자본가의 힘은 엄청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이란 자본이 절대적인 힘의 우세 아래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 계급적 힘의 관계가 달라진 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런 조건에서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않는다. 유연화와 구조 조정이라는 우아하면서도 알쏭달쏭한 이름으로 진행된 그간의 일들은 모두 이를 가리킨다.
21세기에 창궐한 자본의 주술
임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고용은 삶의 중심적인 무대이며 임금은 삶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안정된 장기적인 고용과 먹고 살 수 있는, 즉 사회적인 재생산이 가능한 수준의 임금과 기타 급부는 절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권 말고도 적절한 생활조건, 즉 주거와 교육, 건강, 휴식 등의 권리를 사회권이란 이름으로 요구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북미와 서유럽, 그리고 나아가 동유럽의 나라들도 역시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데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자본주의의 위기는 급기야 자본가들의 반격을 낳았고, 그 결과를 가리키는 막연한 이름이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시장을 우선시하는 통치 체제를 가리키는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국가의 모습일 뿐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세계가 처한 모습을 충실히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크다. 그러나 노동자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국가가 더 이상 그러한 역할을 포기하고 자본가계급의 집행기관으로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우는 역사적 교훈으로 구실한다. 아무튼 비정규직은 오늘날 역병처럼 번진 특수하고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새기는 게 중요할 것이다. 자본은 언제나 비정규직과 같은 형태의 착취를 동원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한시적, 기간제 근로자나 시간제 근로자, 파견, 용역, 호출(일일), 특수고용, 가정 내 근로자 등을 망라하는 비정규직의 명단을 모두 채우는 것은, 밤을 새워도 힘들 것이다. 또 그런 일은 헛수고일 뿐이다. 각각의 이름은 그러한 악질적 고용을 법률적 사실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설움과 고통을 빙자하며 특권을 가진 ‘철밥통’ 정규직과의 격차를 강조하고 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은 오늘날 자본가계급이 즐겨 써먹는 이데올로기적인 꼼수이다. 문제는 정규직의 특권을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뜻대로 고용을 좌우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비정규직화의 가능성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적인 힘의 관계를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바꿔내는 것이며 나아가 기회만 닿는다면 실업과 불안정, 불완전 고용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를 폐지하거나 손을 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때에만 21세기에 창궐한 주술 가운데 하나인 비정규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워커스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