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웠던 이야기이다. 대학교 시절 한 선배와 술자리에서 다툰 적이 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입장이 갈린 게 원인이었다. 선배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후배는 그 말이 이해되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취기가 올라왔고, 몸은 피곤했다. 그러다보니 선배의 말들이 짜증스럽게만 들렸다. 선배는 머지않아 노동운동가로 살아갈 결심으로 학교를 떠났다. 그러면서 후배에게 한 권의 책을 선물로 건넸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인간에 대한 예의>(1993년)를.
8일 저녁,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윤정주 소장의 비보를 접했다.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시각 이정렬 변호사는 개인 SNS를 통해 “윤정주 위원이 방통위원직에서 빠진 건 참 다행”이라는 트윗을 올렸다고 했다. 책 <인간에 대한 예의>가 떠오른 이유다.
윤정주 소장이 ‘심의’를 한다고 했다
윤정주 소장과의 개인적 인연은 13년 전에 시작된다. <방송법>에 따라 KBS는 시청자가 제작한 영상물을 편성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KBS <열린채널>이 그 결과물이다. 그런데, KBS가 편성권이 있다는 이유로 시청자들이 제작한 영상물을 검열·수정해 여러 차례 논란을 빚었다. 그런 KBS에 대응하기 위해 단체들이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윤 소장을 처음 만났다. 2006년도의 일이다.
늘 바빴던 윤정주 소장이지만, 시간을 쪼개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었다. TV 드라마를 좋아했던 그와는 코드가 잘 맞았다. SBS 드라마 <육룡이나르샤>에서 연희의 강간 장면을 두고는 “왜 남성을 각성하기 위해 여성을 도구로 활용하느냐” 며 같이 흥분했었다. tvN <명불허전>, SBS <별에서 온 그대>를 이야기하며 “왜 여성은 늘 기다리는 존재여야 하느냐”라고 불평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여성예능 실종시대’를 논하다 “제작자의 게으름”에 대해 한참을 떠들기도 했다. TV만의 일은 아니었다. 미디어 운동장 내의 가부장문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번은 권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회의를 끝내고 서로 한숨을 쉬며 빠져나왔던 일도 있었다.
그러던 2017년, 윤정주 소장이 4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하 방통심의위)¹에 들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60세 이상의 남성들’로만 구성됐던 3기 방통심의위는 반인권-반여성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15년 MBC <일밤> ‘진짜사나이’ 여군특집에서 터미네이터 조교로 불렸던 곽 하사(소대장)의 특정 부위가 부각돼 시청자들로부터 “불편했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심의위원들은 “나에게 그랬다면 기분이 좋았을 것 같다”, “난 재밌게 봤는데 뭘”, “풀샷으로 나와서 그렇지 미디엄 사이즈”라는 등의 성희롱 발언을 쏟아냈다. MBC <마녀의 전설> 드라마에서 데이트강간 장면이 나와도 “문제없다”고 한 목소리를 냈던 심의위원들이다. 반면, JTBC <선암여고탐정단>의 동성키스 장면에 대해선 ‘중징계’를 내린 이들이기도 했다. 인권감수성이 한참 뒤떨어졌던 곳, 방통심의위였다.
그런 곳에 윤정주 소장이 들어간다고 하니 ‘잘됐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실제로 그는 tvN <짠내투어>에서 가수 승리가 구구단 멤버 김세정에게 “호감 있는 남성 출연자에게 술을 따르라”고 한 방송에 ‘경고’ 등 중징계를 의결하는 등의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윤정주, 편파심의 하지 않아
많은 집단으로부터 공격받아
시민사회는 오랫동안 ‘심의’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해 왔다. 표현의 자유를 축소시킬 수 있다는 이유였다. 방송통신에 대한 심의대상 축소 및 인터넷 내용심의 폐지라는 ‘최소규제’ 원칙은 오랜 토론의 결과물이었다. 윤정주 소장 또한 이 입장에 함께했다. 그런 윤정주 소장이 방송위원이 되자 특정 정치세력은 오히려 윤 소장이 또 다른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해 심의를 했다고 비아냥했다. 그러나 윤 소장을 옆에서 지켜봐왔던 이들은 오히려 ‘편파심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사실 윤정주 소장이 방통심의위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걱정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심의 자체가 매우 “정치적으로 읽힌다”는 점이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JTBC <뉴스룸> 태블릿PC 보도에 대해서 ‘문제없음’ 결론이 나오자 보수단체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성추행’ 혐의의 정봉주 전 의원을 옹호한 방송에 대해 중징계를 내리자 “같은 진영에 총질을 한다”는 비난을 했다. 4기에서도 종편 TV조선·채널A의 막말 혹은 과도한 정부 비판에 대한 중징계 요청이 많았다. 하지만 윤정주 소장은 공정한 기준으로 최소규제 원칙에 따라 심의했다. 민원인이 원하는 만큼의 징계결과가 나오지 못한 까닭이다. 그 후, 그는 ‘내부의 적’이라는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이정렬 변호사 역시 심의를 정치적으로 읽기는 마찬가지다. 방통심의위가 tbs <이정렬의 품격시대>에 대해 ‘법정제재’를 의결한 까닭은 여성비하 의미가 담긴 비속어 ‘찢묻었다’ 사용이 문제됐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방통심의위는 속기록 전부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윤정주 소장이 어떤 발언을 했는지 조금만 찾아봐도 확인 가능하다는 얘기다. 과연, 이정렬 변호사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윤정주 소장이 얼마나 시청자 관점에서 심의를 해왔는지는 다른 예로도 알 수 있다. MBC <전지적 참견 시점>이 세월호 참사를 희화화해 중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최승호 MBC 사장이 심의위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한 것이 뒤늦게 드러났다. 그 사실을 폭로한 이가 바로 윤정주 소장이었다. 공정한 심의를 위해 방송사에 던지는 경고였다.
윤정주라는 사람은 반대로 ‘시민’들의 항의전화는 열심히 받았다.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표적이 됐던 윤 소장의 개인 전화번호는 이미 유출된 상태였다. ‘욕설’이 난무한 전화들이 그에게 집중됐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주변에서는 ‘모르는 전화번호는 받지 말라’는 조언도 뒤따랐다. 하지만 윤 소장은 “어떻게 그러냐. 공적으로 하는 일이고, 시민들의 목소리인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시청자들을 대신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늘 견지하던 사람이었다.
이정렬 변호사는 윤정주 소장의 치열했던 삶을 얼마나 알고 있나. 어떤 마음으로 방통심의위에 들어갔으며, 얼마나 시민사회와 소통하려 했는지, 심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짐작이나 할까. 방통심의위와 방송통신위원회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이는 알 수조차 없을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바로 윤정주 소장이었다. 이 변호사에게 책 <인간에 대한 예의>를 권하려 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책 주인공처럼 ‘부끄러움’, ‘염치’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논란 이후에도 변명만 일삼고 있는 태도 또한 달라지지 않은 자에게 이 책은 그냥 사치일 뿐이다.[워커스 58호]
1)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방송과 통신 등이 공정성과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공적 책임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심의하는 기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