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관
다시 개시된 ‘철밥통’ 때리기
“공공 기관 철밥통 깨야 vs 야당과 함께 투쟁”. 어느 보수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그리고 소제목을 ‘박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성과 연봉제’라고 달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조선 산업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 이 마당에 갑자기 대통령께서 친히 공기업 노동자들의 연봉을 챙겨 주시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연봉은 생산성에 맞춰 인센티브를 준다는 성과 연봉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 달 9일 직접 공공 기관장 워크숍을 주재해 성과 연봉제 추진 상황을 점검할 계획이라고 한다. 불현듯 과다 부채 공기업의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2014년 추억이 새삼 떠오른다. 아주 기막힌 이 한마디로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쏠쏠한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 당시 부채 문제로 사회적 표적이 된 공기업들은 공공성이라는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지키기보다 자산 매각과 사업 조정 등 자산 건전성 강화에만 목을 맸다
이제 다시 ‘철밥통’ 때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4.13 총선 직후 대통령이 국가 재정 건전성을 느닷없이 제기하며 핏대를 세웠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바다. 정치적 대척점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결집했던 방식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그 대상이 기득권층이라고 포장하기 쉬운 만만한 세력일수록 박근혜 대통령이 챙길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은 더욱 커질 것이다. “능력과 업적에 따라 보수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라는 기재부 고위 관계자의 말은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사실 뭐라 반박하기 힘들다.
하지만 수익성을 추구하는 사기업과 달리 공공성을 기본으로 하는 공공 기관들의 업무에서 개인의 실적과 생산성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정부가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어 그 평가 기준은 시장적 마인드에 기초하고 특정 목적에 치우친 자의적 평가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중상위직과 달리 재량권이 적고 단순 업무가 많은 하위직은 자신의 성과 평가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크다. 현재까지는 전체 직원의 7%인 간부급만이 성과 연봉제를 적용받고 있는데, 정부는 이것을 전체 직원의 70% 수준으로 확대하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이 ‘철밥통’이 되기 위해 이 땅의 많은 젊은이가 불철주야 공무원 고시에 매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철밥통’은 초등학생의 미래 선호 직업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사회적 지탄과 선망을 동시에 받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부채 비율 7300%
한편, 연일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공격이 거세다. 사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미 구조조정의 제1막이 정리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지금 거론되는 ‘3,000명 감원설’은 정규직에 해당하는 것으로 수만 명에 이르는 사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숫자다.
사실 이제 구조조정 일정은 만기가 되는 채권을 돌려 막는 일만 남았다. 재무적 상태를 관리하는 수준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대우조선해양의 부채 비율이 7300%라는 언론 기사가 대중의 머리를 강타했다. 보통 재무 건전성을 따지는 부채 비율 기준이 200%인데, 7300%라니 쉽게 이해되지 않는 수치다. 감춰 왔던 부실 사태가 작년에 터지면서 부채 비율이 6800%포인트 가량 높아졌다고 한다. 이 숫자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앞으로 계속될 구조조정 정세에서 무엇이 최우선 기준이어야 하는지 대중에게 각인하고 있다. 그 기준은 재무 건전성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다른 문제들을 부차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엄청난 숫자에 압도된 사람들이 올린 댓글의 대부분은 ‘세금 잡아먹는 좀비 기업을 퇴출하라’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에 따른 노동자들의 실직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된다. 그리고 기존 합의에 없었던 추가 인원 감축에 항의하는 노동조합의 주장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폄훼된다.
재무 건전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누가 쉽게 반박할 수 있을까? 더구나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공적 자금 대상 기업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해고로 삶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선 자신의 일자리를 희생해 재무 건전성을 강화하겠다는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중단하는 일도 현명한 방법이지만, 그 밑을 새지 않게 메우고 다시 물을 붓는 게 더 현명한 일이다. 어쨌든 모두가 살 수 있는 물이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재무 건전성 강화처럼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고난을 함께 이겨낼 사회적 실업 대책과 새로운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제기되는 논리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기업 평가 방식에만 매몰되어 있다.
‘손실의 사회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앞서 말한 성과 연봉제 확대와 ‘좀비 기업’ 구조조정 주장에는 모두 ‘손실의 사회화’라는 논리가 담겨 있다.
이 말은 비효율적인 행정과 사업 실패로 인한 재무적 손실을 사회가 떠안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흔히 납세자들의 부담으로 혹은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사회적 비용을 메운다고 지적된다. 그런데 이 손실이라는 것을 다시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자연재해로 엄청난 재산 손실이 난 상황에서 우리는 이런 손실을 개인화하지는 않는다. 내 집 앞 가로수를 복구하기 위해 개인이 직접 지게차를 끌어오는 황당한 일은 없다. 우리는 사회적 복구 비용을 마련하여 집단으로 대처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훨씬 효과적인 해결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복구로 재건된 기반 시설을 특정 누군가가 소유를 독점하거나 이익을 전유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이건 사회 기반 시설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손실의 사회화’로 확장해 보자. 만약 공공 기관의 효율성 문제와 대규모 기간산업의 부실 문제가 개인적 영역의 일이었다면, 우리는 이 문제로 왈가불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건 매우 공적인 영역이고, 이 영역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 실패를 개인이 지게차를 끌고 오는 수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손실을 사회화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렇게 사회적 비용으로 복구된 기관과 기업들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을 되돌려 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장 많은 부채를 안고 있는 공기업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주택 버블 시기에 땅 투기를 일삼다가 저렇게 됐다는 것이다. 만약 서민의 주거 복지를 위해 국민임대주택을 대폭 늘려 지금의 전·월세난을 해소했다면 되레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대우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우조선은 이미 공적 자금이 들어간 국유 기업이다. 한창 잘나갈 땐 시가 총액이 12조 원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대우조선이 취했던 경영 전략은 수익 극대화였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해 해양플랜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90%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가득 채우고 산업 안전은 뒷전인 채 속도전을 벌였다. 여기서 조선 3사간 출혈 경쟁이 벌어졌고, 지금 저유가의 직격탄을 맞아 모두 공멸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이다. 만약 정부가 나서 과당 경쟁을 제지하고 효율적인 선종 분류로 민간 조선사들과 생산 영역을 나눠 맡게 했다면, 오히려 지금의 심각한 공멸 사태는 미연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국유 기업으로서 공익적 목적에 충실했다면, 기형적인 비정규직의 증대가 아닌 고용 안정과 대규모 장치 산업에 만연한 산업 안전 문제를 해결하는 선도적인 국유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손실의 사회화’에만 머무는 제살 깎아먹기 논쟁은 그만둬야 한다. 이익은 사유화하면서 왜 손실은 사회화하냐고 따지는 건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화를 풀고 돌아서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논리를 거꾸로 확장해야 한다. 손실을 사회화했으니 그로부터 얻어지는 이윤도 사회화하자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철밥통’ 때리기의 추억이 반복되는 한, 우리는 계속 ‘손실의 사회화’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재무 건전성 강화를 명분으로 공공 기관들을 사기업처럼 만들고, 규제 완화와 맞물려 공익사업 축소 근거를 만들어 낼 것이다. 또한 현재 밀어붙이고 있는 노동 개혁(?) 아젠다를 공공 기관부터 시행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철밥통’ 때리기가 노리는 과녁은 이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4.13 총선 패배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박근혜 정권이 소기의 성과에 집착할 것이라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손실의 사회화’에만 머무는 지금의 논쟁 국면을 전향적으로 바꿔야 한다. 바로 앞서 말한 ‘이익과 이윤의 사회화’로 말이다.
(워커스10호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