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든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익숙하게 펼침막을 들고 마이크를 잡았다. 행인들은 그들을 익숙한 듯 무심하게 지나친다. 지난 16일 열린 ‘용산화상경마장반대대책위원회(대책위)’의 집회 현장이다. 벌써 1,200일을 훌쩍 넘긴 싸움이다. 천막을 치고 노숙 농성을 한 지도 900일이 넘었다. 마사회는 주민들 반대에도 화상 경마장을 지난 2014년 6월에 일부 시범 개장했다. 2015년 5월에는 정식으로 개장해 영업을 개시했다. 주말이었던 지난 16일에도 이용객들은 대책위의 농성과 집회, 기자 회견을 지나쳐 화상 경마장에 들어섰다.
용산 화상 경마장, 그러니까 ‘마권 장외 발매소’는 2001년 용산역 근처에 처음 개장했다. 2013년 마사회가 이 장외 발매소를 용산 전자상가 부근으로 이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장외 발매소가 인근 성심여중·고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신축 건물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인근 주민들은 학교와 가까운 곳에 도박 시설이 들어선다면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될뿐더러 생활 환경과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고 반발했다.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가 이어졌고 개장은 무기한으로 연기됐다. 그러나 2013년 12월, 현명관 마사회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국면이 변했다. 새로운 이사장은 개장을 강행했다. 개장하겠다는 측과 못 한다는 측이 격렬하게 대립했고, 몸싸움과 폭력, 고소 고발이 난무했다. 서울시, 서울시교육청, 서울시의회, 용산구, 용산구의회, 국회 농수산위원회, 국가권익위원회, 34개 용산 초·중·고 교장단, 학부모 대표의 반대 성명이 잇따랐지만 마사회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마사회의 Let’s Run
<학교보건법>은 사행성 시설이 학교 주변 200미터 안에 들어설 수 없다고 규정한다. 마사회는 2010년 농림수산식품부(현 농림축산식품부)에 제출한 용산 화상 경마장 이전 승인 신청서에 “지역 내 민원 발생 개연성이 없다”고 적시했다. “화상 경마장 신축 이전 장소 주변은 전자상가 등 일반 상업 지역으로 민원 발생 개연성이 없다”는 것이 당시 마사회의 이전 승인 신청서 내용이다. 마사회는 신청서에 주변 지도 두 건을 첨부했지만 용산 전자상가, 용산 빗물펌프장, 주차장, 아파트 명칭 등은 밝히면서도 성심여중·고는 따로 적지 않았다. 마사회는 또 ‘최인접 학교인 성심여중과의 거리는 약 350미터로 <학교보건법>에 의한 상대 정화 구역 미해당 지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화상 경마장이 들어선 건물과 성심여중·고 사이의 실제 거리는 230미터에 불과하다. 실제 거리보다 110미터가량을 늘려서 보고한 것이다. 농림부는 신청서를 접수하고 별다른 확인 절차도 없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전을 승인했다.
학교와 인접한 도박 시설에 주민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마사회는 시범 운영 평가를 통해 유해성을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시범운영평가위원회(평가위)는 전원 마사회가 선정한 인사로 구성됐다. 평가위의 집행 예산도 마사회가 전액 제공했다. 대책위 측은 평가위의 구성과 운영이 편파적이라며 조사를 반대했지만 마사회는 이를 강행했다. 평가위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인근 주민의 72.7%, 학부모의 84.9%, 학생의 84.8%가 용산 화상 경마장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화상 경마장 시범 운영으로 인해 부정적 변화를 겪었다는 사람은 인근 주민의 25.7%, 학부모의 46.5%, 학생의 64%인 것으로 나타났다. 마사회는 평가 결과를 두고 부정적 요인은 크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후 정식으로 개장했다.
화상 경마장이 들어선 건물은 지상 18층, 지하 7층 규모다. 마사회는 이 건물 1층부터 8층까지를 복합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미래창조과학부는 마사회의 이 계획에 세금 12억을 지원했다. 작년엔 건물 7층을 ‘키즈 카페’로 사용하겠다며 용산구청에 용도 변경을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다. 최근 법원이 마사회의 키즈 카페 운영은 적법하다고 판결해 마사회는 운영을 강행할 뜻을 밝혔다.
마사회가 화상 경마장 건물에 여가나 문화 공간을 들이려는 이유는 마사회가 한국능률협회컨설팅에서 컨설팅을 받은 자료에서 드러난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은 화상 경마장의 신규 고객 창출과 아저씨 이미지 해소를 위해 젊은이와 여성들을 유도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젊은이와 여성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문화 시설을 기획한 것이라는 의심이 나온다.
마사회에 고삐 채우는 투쟁
인근 주민과 학생, 학교 선생님들은 ‘돌진’하는 마사회 고삐를 잡겠다는 투쟁을 여전히 이어 가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성심여중·고 학생과 학부모 등 1,570명이 용산 화상 경마장을 추방하는 4개 법안(<학교보건법>, <교육환경보호법>,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법>, <마사회법>)을 입법 청원 했다. 송지우 성심여중 학생회장은 “공기업이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다른 사람, 특히 학생들의 안전과 교육권, 행복 추구권을 빼앗으면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국회에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시민 사회 단체들은 물론 서울시와 용산구를 비롯한 지자체들도 주민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투쟁 900일 문화제가 열린 지난 16일 “우리의 분노가 강물처럼 흘러서 이 세상이 몽땅 바뀌는 그런 날이 한번 올 거라고 믿는다”는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싸움을 시작할 때 학부모였던 이들은 어느새 졸업생의 부모가 됐다. 지칠 법도 하지만 천막에는 900일째 사람들이 남아 있다. 농성장을 지키던 한 주민은 “천막 농성 등 같은 방식의 싸움이 길어지면서 지칠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주민들은 더욱 농성장을 지키려고 한다. 여기 온 주민들 모두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함께했던 분들”이라고 말했다.
마사회가 ‘돌진’을 멈추지 않지만 이들의 끈질긴 투쟁 덕분인지 용산 화상 경마장의 수익 성적은 그리 좋지 않다. 정방 대책위 대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화상 경마장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영업장은 주민들 반대 투쟁에 힘입어 손님이 드문 편”이라고 밝혔다. “도박장 입구 앞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3년째 싸우는데 웬만큼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곳을 올 수 있겠냐”는 것이다.
마사회가 마권 장외 발매소를 확장 이전한 이유는 보다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다. 수익을 위해 지역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있다.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고 허위 신고와 편파적인 조사위원회 구성 같은 편법도 동원됐다. 학교 주변 도박장이 주민들과 청소년들의 안전과 교육권을 해친다는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지만 “민원 발생 요인이 없다”고 일축한다. 편법과 주민 무시를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추구하는 마사회의 돌진은 “말 산업 발전을 통해 국민의 복지 증진에 기여한다”는 ‘공기업’ 마사회의 기업 목표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