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30~40곳의 집을 방문해 방송 인터넷을 설치하고 수리했다. 그러면 12시간이 지나있었다. 점심시간이 없어 차에 초코파이 한 상자를 가지고 다녔다. 주말에도, 명절에도 설치 요청이 있으면 튀어나갔다. 설치 기사의 추락 사고를 접한 날은 다리가 후들거려 유난히 하루가 더디게 갔다. 불평, 불만은 꾹 눌러뒀다. 케이블 설치 기사는 비정규직 중에서도 가장 나쁜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이기 때문이었다.
올해 초 경기 광명과 전주에서 티브로드 방송과 인터넷을 설치 수리하는 케이블 기사들이 무더기로 일자리를 잃었다. 케이블 설치 기사들은 ‘티브로드’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다녔지만 티브로드 노동자는 아니었다. 티브로드는 그들의 원청사였다. 올해는 1년 단위 원・하청 계약 갱신이 2년 단위 계약 갱신으로 바뀌고 계약 종료를 맞이하는 첫해였다. 올 1월, 용역계약이 끝나자 티브로드는 광명에 있는 한빛북부센터, 전주의 전주기술센터와 재계약하지 않았다. 경영상 어려움이 이유였지만 업계 최고 수준의 순이익이 나는 회사였다. 재계약을 할 시점에 다른 신규업체를 선정했다. 노사 관계의 바탕이 되어야 할 ‘신의성실의 원칙’은 ‘원청-하청-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비틀린 고용 관계 속에서 지킬 의무가 없어져 버렸다. 하청업체는 원청의 뜻이 그러면 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원청은 굳게 입을 다물고 해고자들의 항의를 무시했다.
노조(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 티브로드지부)는 일련의 해고 과정을 노조파괴로 본다. 2013년 노조 결성 후 노동 조건이 개선됐고 조합원이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티브로드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원청인 티브로드가 출퇴근 시간 체크, 작업 도구 제공, 정기 교육 및 평가 등 업무의 전 과정에 개입한 자료를 증거로 제시했다. 도급계약이 아니라 불법파견이며,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된다는 주장이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노조 가입률이 높은 두 업체 노동자들만 고용승계가 이뤄지지 않았다.
전주기술센터 티브로드 기사들은 올 1월 31일 티브로드와 용역계약이 만료되고 곧 (유)구이앤금우통신 이라는 신규 업체가 티브로드 외주 업체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사들은 자연스레 고용승계를 기대했다. 신규 업체가 새로 채용 공고를 낸다고 했을 때 고용승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구이앤금우통신은 신규 인력 채용 공고를 통해서만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노조는 전주 고용노동청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신규업체 사장은 “원청인 전주사업부를 통해 고용승계에 관해 전달받은 내용이 없다”며 고용승계를 거절했다. 기막힌 것은 새로 채용된 50여 명 중 기존 업체 비조합원 30여 명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결국 3월 1일 자로 노조원 23명이 해고 됐다. 이들은 전주지역에서 10~20년 동안 케이블 기사로 일했던 사람들이다.
한빛북부센터 케이블 기사들도 유사한 해고 과정을 밟았다. 올 초 티브로드와 계약이 해지됐고 다른 업체도 구하지 못하면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티브로드는 새로운 하청업체를 선정하는 대신 인근 지역 두 개 센터(한빛동부, 한빛서부)를 통해 안산, 광명 지역까지 맡으려 했다. 노조는 전원 고용승계를 요구했지만 두 센터 모두 고용승계 의무가 없다는 뜻을 전했고 신규 채용 공고를 냈다. 급한 마음에 해고자들은 나뉘어 이력서를 제출했다. 면접까지 봤지만, 내용은 노조 떠보기였다. 노조에 따르면 면접관으로 참여한 신흥섭 한빛동부센터장은 “만약 채용이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 계속 싸울 거냐?”며 조합원을 압박했다. 고용승계를 해야 한다면 계약을 포기할 거란 말도 했다. 결국 해고 조합원 37명 중 14명만 두 개 센터에 고용됐다. 나머지 23명은 그때부터 원청을 상대로 복직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해고된 이후의 삶은 지난했다. 본사 앞 노숙 농성과 복직을 기원하는 삼보일배를 진행했다. 6월엔 전주기술센터 해고자 김종이 씨와 곽영민 티브로드지부 교육생활부장이 한강대교에 올랐다. 꿈쩍도 안 하는 티브로드를 압박하고, 움직이게 하려 한 선택이었다. 지난 8월 30일엔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추석을 길거리에서 보내고 20일부터 21일까지 연대자들과 24시간 장시간 연설(필리버스터)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복직도 중요하지만, 간접고용과 그에 따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티브로드지부는 “정규직과 다름없이 일해 온 노동자들을 하청 비정규직으로 간접고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고용불안으로 내몬 책임자는 다름 아닌 티브로드다. 티브로드와 모기업인 태광그룹이 원청으로서 온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영진 티브로드지부장은 “이미 공공부문에선 업무 효율성을 이유로 업체를 바꿔도 고용승계를 하고 있다. 케이블 방송은 중노위 쟁의조정에 들어가도 공익사업으로 분류 되는데 현재는 공익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다 ”고 말했다.
9월 26일부터 시작한 20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여러 상임위원회가 티브로드와 태광그룹 문제를 다룬다. 정무위에서 태광그룹의 부당내부거래 문제를 다루고 법사위에서 이호진 전 회장의 황제 복역 등이 도마에 오른다. 환노위에선 이영진 지부장을 참고인으로 채택해 간접고용 문제를 짚을 예정이지만, 사용자 쪽 증인은 나오지 않는다.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한 노조원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싸워왔지만, 티브로드가 바뀔 가능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회사가 대한민국에 계속 존립해선 안 된다. 복직을 못 해도 좋으니 사업 허가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파탄 난 신뢰 관계를 복원하는 첫 걸음은 해고자 복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