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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나의 것 My body, my choice

2016년 12월 21일Leave a comment28호, 참세상 이야기By 박다솔 기자

정운 기자

“난 출산을 안 할 거다. 그것만이 가진 거 없고 세상에 휘둘리며 살아온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다.”

“난 결혼까진 해도 애는 안 낳을 거예요. 여자를 출산 도구쯤으로 여기는 사회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해요.”

임신과 출산이 100% 여성의 의지로 이뤄진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국가는 여러 가지 유인책으로 출산을 유도하고 기성세대는 출산을 여성이 가진 특권으로, 비출산을 이기심으로 몰아간다. 그만큼 임신과 출산은 보호받는 영역인가? 일하는 여성은 출산 휴가, 육아 휴직 등의 권리가 있어야 하지만 임신은 또 다른 공격 포인트가 되곤 한다. 임신한 여성들은 구조조정 대상 1순위다. 지난해 고용노동부는 ‘육아휴직과 출산전후휴가 중 고용보험자격 상실자 현황’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다. 2010년부터 2015년 6월까지 5년여간 총 2만 6,755명이 육아휴직과 출산전후휴가 중 실업자가 됐다. 경영상 필요, 기타 회사 사정이 해고 이유였다. 비정규직 여성의 경우 더 험난한 상황을 마주한다. 고용노동부가 2013년 발표한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고용형태별로 출산휴가 사용이 다르게 제한됐다. 1,000개 표본 사업장을 추출해 설문조사한 결과 ‘10인 미만 사업체에서는 91.2%가, 10인 이상 30인 미만 사업체에서는 82.5%가 정규직만 출산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응답해 비정규직의 출산휴가 사용이 매우 어려운 것을 보여주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임신, 출산 등 여성의 재생산 활동은 외부 입김이 거세지만 자기 결정권과 관련한 낙태는 여성의 손을 이미 멀리 떠났다. 낙태는 몇 가지 상황을 제외하면 모두 ‘불법’이다. 지난 9월, 보건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이 일부 개정돼 입법 예고됐다. 낙태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포함해 낙태수술한 의사에 대해 12개월 간 의사 자격을 정지시키겠다는 것이다. 기존 1개월 자격 정지로는 어림없다는 의미였다. 낙태를 엄벌하는 나라는 주로 여성 인권이 낙후한 곳들이다. 세계인구개발회의 행동계획 7.3항은 “얼마나 많은 아이를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언제 낳을 것인지를 자유롭고 책임 있게 결정할”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고 선포한다. 한편 이 같은 소식이 SNS 등을 타고 번졌고 여성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중 눈에 띄는 움직임은 바로 폴란드 여성들이 시작했던 ‘검은 시위’다. 한국 여성들도 까만 옷을 입고 집회에 나섰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검은 옷차림은 여성 생식권에 대한 애도를 상징한다.

강남역 10번 출구, 다시 그곳에서

지난 11일, 여성 혐오를 상징하는 공간이 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네 번째 검은 시위가 있었다. ‘BWAVE(Black wave)’가 주최한 임신중단 합법화 촉구 시위였다. 이 곳으로 검은 옷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하나둘 모였다. 오후 1시부터 10여 명이 집회를 시작했다. 오후 2시엔 40여 명 정도가 모였다. 4시간에 걸친 집회에서 오가는 사람을 포함해 약 80명 정도가 집회에 참석했다. 모인 여성들은 눈 주위를 가릴 수 있는 까만 반가면과 마스크, 스티로폼 깔개, 검은 깃발 등을 지급 받았다. 그리고 주최 측에서 준비한 구호와 가사가 적힌 종이를 들었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 선창을 외치면 나머지가 따라 외치는 식이었다. 구호는 웃프고 과격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덮어놓고 낳다 보면 삼천리에 범죄 폭발/덮어놓고 낳다 보면 삼천리에 노예폭발” “낙태도 못 하는데 미쳤다고 연애하냐/여성인권 없는 나라 미쳤다고 결혼하냐/책임 못 질 어린아이 국가에서 키울 거냐” “섹스할 때 콘돔 빼자 말을 마라/콘돔 껴도 불안한 거 알고 있냐/하루에도 골백번씩 생리하나 확인했다/불완전한 피임방법 임신하면 어쩔 거냐” 이보다 파격적인 구호에선 여성들의 분노가 느껴졌다. 음지에선 공공연한 얘기지만 밖에선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강남역을 지나는 시민은 시선을 두다가도 피켓을 확인하면 재빨리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우리의 상식이 모두의 상식이 되기까지

집회에 참가한 A 씨(21세)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기 목소리를 낸 기억이 별로 없다. 중학교 때 낙태를 주제로 토론했었는데 A 씨는 낙태를 찬성하는 소수의견이었다. 대다수는 생명 존중을 이유로 낙태에 반대한다고 했다. 소수의견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경험하고 그 이후 비슷한 주제에는 입을 다물었다. 모성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모성에 반하는 죄악으로 치부됐다. A 씨는 현재 카페 활동 등을 하며 다시 목소리를 내보려 하고 있다. 그녀는 여성 개개인이 목소리를 내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SNS에 글을 쓰고, 집회에 나와서 자유발언을 하고, 주위 사람에게 정립된 나의 의견을 말하는 등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친구와 함께 왔다는 B 씨(23세)는 두 번째로 검은 시위에 참여했다. B 씨에게 강남역 살인 사건은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그 후로 <이갈리아의 딸들> 등 페미니즘 책을 찾아보며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B 씨는 과격한 불순 세력으로 포장하려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린 집회 신고를 내고 질서 정연하게 구호를 외친다. 낙태금지법 폐지 역시 설득을 통해 서명받는다. 당연한 일을 여러 절차를 통해 힘을 들여 바꾸고 있다”

이들은 임신중단에 관한 사회적 통념이 여러 면에서 잘못돼 있다고 지적한다. 우선 강간으로 인한 임신일 경우 쉽게 낙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강간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신고하지 못하거나 범죄 혐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한 경우 졸지에 불법 낙태가 돼버리는 일이 태반이다. ‘문란한’ 미혼 여성을 벌주기 위해 현재의 낙태죄 유지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낙태율은 기혼자가 훨씬 높다.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19세 이상 성인여성 929명을 설문 조사해 발표한 ‘피임과 낙태 정책에 대한 쟁점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낙태 유경험자 95명 중 1명을 제외한 나머지 94명은 기혼자였다. 정체불명의 비디오를 통한 낙태 교육 또한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성교육 시간에 틀어주는 낙태 동영상 중엔 태아가 의료 기구를 피해 도망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있다. 하지만 신경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임신 3기(24~36주차)가 되기 전까지는 뇌에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척수가 발달하지 않는다. 93%의 낙태는 대부분 12주 이내에 이뤄진다. 즉, 고통을 느낄 수가 없다. 가장 많이 쓰이는 피임기구인 콘돔은 피임 성공률이 80~90%로 100% 피임이 불가하다.

송곳 같은 여성 목소리 커져

‘BWAVE’는 시위에는 여성만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주최측은 자신들이 어떠한 정치 세력이나 외부 단체와도 무관한 익명의 개인 여성들임을 명확히 했다. BWAVE 관계자는 다른 운동 단체나 여성 단체들과 거리두기를 하는 이유는 시위의 본질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들은 연대보다 ‘낙태금지 폐지’라는 여성 문제에만 집중하길 원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3주에 한 번씩 검은 시위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입법 청원 사이트를 통해 국회의원을 압박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최대 집회참여자 수를 기록했던 지난 3일, 한 무리의 사람이 ‘나라바꾸는 XXX’이 적힌 스티커 2만 부를 무료로 배포했다. 스티커는 시리즈로 여러 개가 있었는데 ‘나라바꾸는 개돼지’ ‘나라바꾸는 비정규직’ ‘나라바꾸는 노동자’ ‘나라바꾸는 장애인’ 등이 있었다. ‘나라바꾸는 페미니즘’에서 시작된 이 스티커들을 광화문 카페 화장실과 서대문 아파트 공사장 가림 벽에도 붙어있다. 집회에선 연신 여성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차별 없는 정의로운 언어를 쓰자는 외침, 모두에게 평등한 공정한 룰을 만들자는 제안이 여성에게서 나온다. 여성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튀어나왔던 2016년이었다. 2017년엔 어떤 목소리로 유리천장을 깨고 세상을 흔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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