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의 촛불이 지났습니다. 대통령은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됐고, 박근혜의 자리에 황교안이 걸터앉았습니다. 누군가는 ‘승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이제 시작’이라고 합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항쟁’의 1막도 일단락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대선을 향한 정치일정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탄핵, 특검, 국정조사, 개헌 등 온갖 변수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각 정당과 ‘대권주자’들의 움직임은 발 빠르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탄핵을 시작으로 정치권이 주도권을 가져간 순간부터 예정된 사태의 진행일지도 모르지요. 촛불항쟁의 국면은 신속하게 다음 대선을 향해 전환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한다면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또 한 차례 파란이 일겠지만 그때 이미 정치의 중심은 2017년 12월 대선이 되겠지요. 어찌 됐든 대선이라는 블랙홀을 피해가긴 어려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제 광장을 정리하려는 정치권, 그리고 자신을 어필하려는 정치인들. 촛불의 한가운데 대선 레이스를 맞이한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A 타입 : 반기문
촛불이니 횃불이니, 음험한 무리가 나라를 뒤흔드는 것을 우려하는 당신에게 맞는 대통령은 우려의 아이콘, 반기문입니다. ‘세계 대통령’ 직함을 달고 있던 반기문이라면 혼란으로 가득한 정국을 훌륭하게 수습해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마침 새누리당도 일방적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던 것에서 벗어나 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군요. 박근혜를 일컬어 ‘우리가 모신 대통령’이라 칭하며 탄핵에 나선 비박계까지 반역자로 몰고 있습니다. 반기문 총장만 귀국한다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될 것이고, 국민여론도 반기문을 주목하겠지요.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는 비박계는 ‘쩌리’ 신세가 될 겁니다. 반기문 중심의 보수대단결, 이런 빅 픽처만 현실화된다면 ‘친박’이라는 굴레도 서서히 잊히겠지요. 8번의 대규모 촛불이 지나갔지만 어쨌든 보수는 살아남습니다. 박근혜만 반기문으로 바꾼다면, 다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B 타입 : 김무성
필러니 백옥주사니 이제 때아닌 성형시술 의혹까지, 더 이상 박근혜에게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 하지만 촛불을 빌미로 좌파가 준동해 정권교체까지 하려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박근혜는 이미 버린 카드, 국회에서 탄핵까지 시킨 만큼 박근혜 개인의 정치생명은 끝났으니 촛불의 역할도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이 더 지속하는 건 오히려 위험한 일입니다. 일약 정국의 캐스팅보트로 떠오른 비박계. 국회와 정치권으로 공이 넘어온 순간, 원내 제1당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새누리당이 주도권을 분점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친박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때야말로 비박으로서는 잃었던 당권도 되찾고 정국의 주도자로 나설 기회이겠지요. MBC 같은 과격 친박 충성파만 제외한다면, 대체로 보수언론도 이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다만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다는 게 아쉽군요. 이정현 대표가 이렇게 말했지요, ‘다 합쳐서 지지율 10%도 안 되면서 대권주자라 말하지 말라’고. 4%짜리 대통령 호위무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입니다.
C 타입 : 안철수
새누리당은 더럽고, 민주당은 운동권 같은 당신. 박근혜도 싫지만 문재인은 더 싫은 당신의 마음속 대통령은 안철수입니다. 문재인만 아니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새누리당-국민의당 연대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을까요. 여기저기 눈치 보고 상황에 따라 간만 보는 모습 때문에 ‘간찰스’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지만, 사실 이건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인의 특징이죠(물론 이정현, 서청원 같은 눈치 없고 대쪽 같은 정치인도 있습디다). 지금과 같은 사달이 나도록 한국 정치가 썩은 이유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5년에 한 번 있는 선거로 모든 게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한 여론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박지원 의원도 ‘국민 70%가 개헌을 지지한다’고 했지요. 개헌해서 권력구조 좀 바꾸면, 양당체제를 3당 체제로 바꾸면 새 정치가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당신. 그런데, 5년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지만, 대체 안철수가 말하는 ‘새 정치’의 내용이 뭔가요?
D 타입 : 문재인
노무현의 상록수를 생각하면 문득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당신, 이미 당신에겐 박근혜는 대통령직을 훔친 도둑일 뿐 진짜 대통령은 문재인이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2012년의 설욕전을 벌일 때가 왔습니다. 차기 대권 주자로서 지지율 1위를 굳혀나가고 있는 문재인, 분위기만 잘 유지된다면 큰 무리 없이 정권교체가 확실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맞는 것을 보면 확실히 독보적인 후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정권을 교체하는 것, 여기에 흠집을 낼 어떤 역풍도 조심해야 하는데 촛불집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한상균 석방’, 심지어 ‘이석기 석방’까지 외치고 있습니다. 이러면 보수집단의 강력한 역풍을 몰고 올 것이 뻔한 상황에서 당신에게 이런 구호들은 너무나도 불편합니다. 문재인이 대통령만 되면 알아서 시시비비를 다 가려줄 텐데, 괜히 진보세력이 불필요한 자중지란을 만드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E 타입 : 이재명
노회한 기성 정치인이 아니라, 촛불의 요구에 부응할 줄 아는 참신한 정치인을 원하는 당신은 그 어떤 정치인보다 먼저 대통령 퇴진과 탄핵을 주장했던 이재명에게 끌립니다. “성남이 하면 대한민국 표준이 됩니다”라며 청년기본소득을 비롯해 야권에서도 튀는 복지정책으로 이목을 끌었던 이재명 시장. 자극적이면서도 선명한 언사로 촛불 정국에서 자신의 지지율을 급격히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탄핵이 곧 승리라고 믿는 당신에게 이제 다음 과제는 다가올 대선에서의 정권교체입니다. 물론 문재인이 나쁜 건 아니지만, 광장을 메운 촛불의 열정을 잘 담아내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대통령 퇴진과 처벌을 요구하는 이재명이야말로 지금의 촛불을 대변하는 정치인이라고 믿습니다.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면서 여성, 장애인에 대한 비하 논란도 있었지만, 그런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재명은 지금 대중이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F 타입 : 박원순
민주당 중심의 정권교체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노빠는 아닌 당신은 점잖고 부드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박원순에게 끌립니다. 문재인처럼 거대한 지지집단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이재명처럼 튀고 자극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꾸준히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매주 광화문 집회를 위해 인원추산자료도 제공하는 박원순 시장이야말로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안타깝게도 박원순 시장의 인지도, 지지율은 그다지 높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군요. 마음이 급해졌는지 이런저런 행사들을 열어보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의 참여나 관심은 별로 없는 상황. 헌재와 특검으로 여론의 시선이 돌아가고 난데없이 개헌 떡밥이 투척된 지금, 박원순 시장이 주목받을 공간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G 타입 : 심상정
탄핵소추를 발의한 야 3당의 일원이지만, 계속되는 여야합의 속에 뒷전으로 밀리는 정의당. 대선주자 가운데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국민의당도 못마땅한 당신에게 어울리는 대통령은 심상정 대표입니다. 보수의 재구성과 재집권 시도가 슬슬 드러나고 있는데 민주당, 국민의당은 새누리당과 타협하는 것도 모자라 엉뚱한 개헌 논의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러다간 정권교체는 고사하고 애써 탄핵을 통과시킨 보람도 없이 새누리당이 회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듭니다. 다가올 대선에서 정의당이 독자로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야권연대를 해낸다면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않더라도 내각에 참여해 지분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권연대보다 여야합의에 무게가 쏠리고 정의당은 계속 외면당한다면 다가올 대선을 마냥 낙관적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죠. 심상정 대표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상황이 순탄치는 않아 보입니다.
H 타입 : 민중후보
87년 6월 항쟁의 교훈은 ‘죽 쒀서 개 줬다’라고 굳게 믿는 당신, 이번에야말로 여야 정치권의 정략에 휘둘려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은 보수 야당과 확실히 선을 긋는 진짜 진보 후보, 민중들이 직접 손으로 뽑은 ‘민중후보’의 대선출마를 바라고 있습니다. 탄핵 이후 황교안 권한대행-여야정 협의체-개헌특위 등 제도권을 중심으로 발 빠른 수습이 이뤄지고 있는 지금, 자칫하다간 이번에도 힘들게 공들였다가 남 좋은 일만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지요. 지금은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정치권과 광장이 힘겨루기에 돌입한 상황. 정치권이 광장을 배제하고 차기 대선을 향해 일정을 정리하는 지금, 당신은 광장의 촛불이 새로운 정치를 예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장은 좀처럼 내 맘 같지 않네요. 1,500개 단체가 모이고 수백만이 운집하는 열린 광장,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어쩌면 정치권보다는 지금의 광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질서 있는 로드맵을 착착 준비하는 정치권에 맞서, 광장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이번 주, 다시 모일 촛불이 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워커스 28호)
- 덧붙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