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후
‘파격’, 격을 부순다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한동안 빠지지 않고 매일 언론에 등장했습니다. 겹겹이 둘러싼 경호 인력 없이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인사하며, 와이셔츠 차림으로 비서관들과 격식 차리지 않는 티타임을 가지고, 외투도 스스로 벗는 대통령의 ‘파격 스타일’에 많은 사람이 열광했죠. 일상공개와 비서관 임명, 업무지시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불투명하고 뻣뻣했던 청와대의 인상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소탈한 노무현’ 혹은 ‘프리한 오바마’를 떠올린 듯합니다.
문득 지난 3월 10일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 탄핵심판 선고일 아침 헤어롤 2개를 머리에 꽂은 채 출근해 화제가 됐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평범한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 머리를 감고 말리며, 스스로 커피를 타 마시고, 자기 외투는 당연히 자기가 알아서 벗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서글프기도 합니다. 청와대의 전임자들은 대체 어떠했기에 우리는 이런 당연한 일들에 환호해야 할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대통령이 격을 부수는 것은 환호받는데, 우리 스스로가 주어진 격을 부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일까요? 당선 이후 대통령의 행보는 물론 전임자와 비교할 수 없을 수준입니다. 하지만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우리는 ‘소탈하고 프리한’ 대통령의 ‘선의’를 믿고 기다리면 되는 걸까요? 5년 전, 박근혜는 청계천의 전태일 동상 앞에 꽃을 들고 섰습니다. ‘파격’이었죠. 그리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그 앞을 막았습니다. 제스처와 파격, 그리고 그 앞에 선 노동자. 같은 듯 다른 듯 반복되는 5년. 대통령 문재인은 이제 누구를 찾아가게 될까요? 혹은 누구를 찾아가야 할까요? 이번 길 찾기에선 그가 만나야 할 사람을 통해 그의 길을 앞서보고자 합니다.
A 타입 트럼프
예로부터 제후국은 새 왕이 즉위하면 천조국에 이를 알리고 책봉을 받아왔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재조지은, 즉 망할 뻔했던 나라를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자며 아예 나라를 들어 바칠 수준이었는데요. 대선이 끝나기 무섭게 보수일간지의 사설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하루빨리 미국에 가서 트럼프를 만나야 한다는 얘기가 가득했습니다. ‘중국보다 미국이 중요하다’, ‘미국 없이 북한 문제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복하면서 말입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정부 출범 직후 미사일 발사실험을 했습니다. 한미동맹 강화에 더 힘이 실리는 가운데 트럼프는 한미FTA를 가리켜 “끔찍한” 협상이라고 되풀이했죠. 사드 배치 비용을 한국이 지불하라고 했던 폭탄선언에 이어 한미FTA 재협상 논란이 불거지자 한미동맹을 외친 이들은 다급히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시급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얄궂게도 이 나라가 탄핵의 터널을 지나자 이제 그 불씨는 태평양을 건너 워싱턴에 떨어졌습니다. 미국에 가서 뭘 건져올 수 있을지 기대되는 시점입니다.
B 타입 한상균민주노총 위원장
새 정부의 ‘노동친화행보’가 화제입니다. 최악의 청년실업, 천만 비정규직 시대, 임금은 낮고 OECD 최장 노동시간을 기록하는 현실은 ‘헬조선’이라는 말조차 물리게 합니다.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면 박근혜를 몰아낸 대중의 불만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노무현 정부가 지지율 저점을 찍으며 이명박에게 정권을 내준 과거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이번에는 이전과 달라진 행보를 준비했을 겁니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이상한 점들이 보입니다. 얼마 전 민주당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2020년까지 달성’에서 ‘임기 내(2022년) 달성’으로 시행시점을 늦추려고 했죠. 지금까지의 평균 최저임금 상승률만 반영해도 문재인 정부 임기가 끝나는 시점엔 최저임금이 1만 원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최저임금 상승 목표는 실질적으로 사라진 셈입니다. ‘정규직을 찾기 어렵다’는 인천공항 노동자 정규직화 역시 실상은 무기계약직 전환이었죠. 임금이나 노동조건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후퇴하기도 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즉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한국사회에 전면 도입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노동자가 죽고 얻어맞으며 그 10년을 싸웠습니다. 그 후계자를 자처하는 신정부의 불안한 약속을 바라보며 앉아서 손뼉 칠 수 없는 이유입니다.
C 타입 이재헌 금속노조 갑을오토텍 지회장
지난 반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헌법의 가치’를 말했습니다. 헌법 제1조는 서울 도심 곳곳에서 노래로 울려 퍼지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박근혜가 헌법을 위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지가 없다며 박근혜를 파면했습니다. 헌법은 이 나라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했지요.
그런데 노동권은? 헌법이 최고의 가치라면, 헌법에 명시된 파업할 권리를 비롯한 노동권 역시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존엄한 가치는 사장의 말 몇 마디에, 공장을 에워싸고 노동자들을 폭행하는 용역깡패들 앞에, 그 깡패들에게 길을 터주는 경찰의 비호 속에 산산이 부서집니다. 충남 아산의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은 헌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반헌법적이라 해야 할 노조파괴가 법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노조파괴로 사람이 죽었는데 그 노조파괴를 변호한 사람이 청와대 공직자로 발탁됐습니다. 이에 대한 민주노총의 규탄성명은 속칭 ‘조리돌림’을 당했지요. 헌법이 신성하다면 노동권 역시 신성합니다. 헌법 위반이 탄핵 사유라면, 노동권을 짓밟아 헌법을 유린한 자 역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요.
D 타입 황상기故 황유미 씨 아버지, 반올림 교섭단 대표
문재인 정부는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경영세습을 위해서라면 불법, 편법은 물론이고 국민 노후자금까지 동원하는 삼성. 그러면서 권력에 수백 억대 뇌물을 바치며 기름칠에도 능숙한 삼성. 삼성공화국이라는 오명은 다름 아닌 노무현 정부 때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정부정책의 실질적인 기획팀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지요. 후보 시절 문재인 캠프에도 삼성 고위급 출신이거나 친(親)삼성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재벌개혁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재계와 보수언론은 ‘반(反)기업’, ‘포퓰리즘’ 등의 변함없는 언어로 재벌개혁을 저지하려 합니다. 박근혜조차 약속했던 경제민주화와 재벌의 지배구조 개편. 그 약속이 사라지는 데에는 반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영입했던 양향자 민주당 최고위원은 삼성직업병 문제로 싸우고 있는 반올림을 ‘귀족노조’라 칭했지요. 선거캠프에 합류했던 김호기 교수는 삼성이 반올림을 배제하고 독단적이고 막무가내로 진행한 보상위원회 위원이었습니다. 재벌개혁의 최소한의 진정성, 재벌에 의한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될 겁니다.
E 타입 심상정
‘심상정 노동부 장관설’이 잠깐 흘러나왔지만, 새 정부도 정의당도 현시점에서 연립정부에는 선을 긋는 모양새입니다. 대선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당장 입각이나 연정은 서로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테니 ‘설’은 ‘설’로 곧 수그러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연립정부론은 다시 또 불거져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독 수권이 어려운 정의당은 장기전략으로 연립정부를 설정한 바 있고, 새 정부가 개혁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도 있겠지요.
이번 대선에서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캐치프레이즈로 걸었던 심상정 대표. 조직노동운동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던 과거와 달리 적극적인 친노동행보로 이번 대선을 완주했는데요. 6월 최저임금 결정 국면을 앞두고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예고한 상황에서 지금 새 정부에 들어가기엔 더욱 부담이 클지도 모릅니다. 홍준표의 귀족노조론에 맞서 민주노총을 변호했던 심상정 대표, 이제 곧 신정부냐 민주노총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참여정부 당시 터져 나온 삼성 X파일 사건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이후 이를 재차 폭로한 노회찬 의원이 오히려 의원직을 상실하기도 했는데,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규명 없이 문재인 정부에
선뜻 참여할지도 주의 깊게 지켜볼 대목입니다.
F 타입 홍준표
민주노총에 대한 ‘귀족노조’ 딱지붙이기는 이번 대선에서 홍준표의 전매 특허였죠. 그런데 민주노총이 최저임금 1만 원 총파업을 예고하고 ‘노조파괴 변호사’ 박형철의 반부패비서관 선임을 규탄하고 나서자 이제 정부 지지자들이 민주노총을 귀족노조라 공격합니다. 홍준표의 막말을 다시 듣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겁니다. 어느새 민주노총은 새 정부의 발목을 잡는 ‘적폐’세력으로 규정돼 버렸습니다. 홍준표 역시 ‘강성귀족노조’를 적폐로 선언한 바 있었죠.
시급 1만 원, 월급 환산 209만 원. 이걸 요구하는 게 귀족일까요? 이 나라 노동자의 절반은 월 200만 원도 안 되는 임금으로 살아갑니다. 그럼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달하는 이들은 ‘귀족’으로 찍히는 게 두려워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요? ‘민주노총이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 참여정부 때에도 나왔던 말입니다. 정부는 발목잡기로 느낄지 알 수 없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목숨줄이 달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새 대통령이 홍준표에게 ‘한 수 배우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G 타입 홍석현
노무현 정부에서 주미대사 요직에까지 올랐던 전 중앙일보·JTBC 회장 홍석현. 대선 국면에서 갑자기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대선 출마, 킹메이커 등 말이 많았는데요. 자신을 주미대사에 임명한 노무현과의 관계를 풀어낸 동영상을 공개하더니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미국특사로 파견됐습니다.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에서 민주당의 기존 스탠스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에서도 향후 기용될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홍석현 전 회장은 지난 4월 심상정이나 노회찬이 노동부 장관을 했으면 좋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언이 흥미로운 이유는 홍석현 전 회장이 바로 삼성 X파일 사건, 즉 삼성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떡값 명목으로 수백만 원씩의 뇌물을 돌렸다는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 사건을 폭로한 사람이 바로 노회찬 의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는 삼성 X파일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넘어갔는데요. 이건희 회장의 처남이자 이재용 부회장의 외삼촌인 홍석현. 문재인 정부가 제2의 삼성공화국으로 회귀할 것인지, 그 중심에 선 인물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H 타입 이재용
지난 5월 17일, CJ 이재현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했습니다. 2013년 1,600억 원 대 탈세와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된 지 4년, 지난 2016년 광복절 특사로 재벌총수 가운데 유일하게 석방된 지 9개월만입니다. CJ는 이재현 회장 특별사면을 기대하고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금을 내고, K컬처밸리 사업 등 문화산업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는데요. 현재 구속기소 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이재현 회장의 사촌동생이기도 합니다. 옥중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사촌형의 경영복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문재인 정부는 범죄를 저지른 재벌총수들을 엄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재용을 선처하기엔 여론이 매서워서라도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박근혜조차 기업인 사면은 엄격히 제한하겠다고 했으면서 돈을 받고 풀어줬다는 의혹들이 드러나고 있죠. 재벌개혁, 노동존중의 목소리가 높아진 상황에서 재계와 보수언론은 경제논리를 앞세워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이 경제논리 앞에서 재벌에 칼을 빼든 모든 정권은 슬그머니 그 칼을 노동자들에게 돌렸죠. 문재인 대통령이 웃으며 이재용 부회장과 악수하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은 재벌개혁을 공식 폐기하는 선언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워커스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