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령으로 박근혜를 인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주말마다 청와대는 촛불에 포위된 채 경찰과 차벽에 의지해 불 꺼놓고 쥐죽은 듯 숨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대통령이 임기를 채워야 한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보수언론들까지도 논조는 조금씩 다르지만 탄핵, 2선 후퇴, 질서 있는 퇴진 등을 요구하고 있지요. 불과 1달 전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박근혜는 이미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상태이기도 하지요. 이제 문제는 정권 퇴진과 함께 그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수많은 부역자, 그리고 복잡한 정치권의 계산속에 자칫 박근혜만 사라진 채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격동하는 요즘,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지만, 향후 정국을 더듬어보며 각자의 길을 찾아봅시다.
A type 비선/측근/친박
이 사태의 시작점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꼽히는 비선실세, 측근, 그리고 친박. 애초에 박근혜 대통령이 몸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연설문도 혼자 못 쓰는 사람이 몸통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죠. 그렇다면 최순실이 몸통인가? 비선이든 측근이든 그들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 권력에 기생하는 깃털 중의 깃털일 뿐입니다. 우병우, 김기춘 정도를 제외하면 비선실세나 측근들은 이미 줄줄이 죄수복을 입고 포승줄을 찬 상태.
다만 친박은 어떻게 될까요, ‘폐족’ 될까요? 안타깝게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 옛날 한나라당 시절 ‘친박연대’라는 현대의 정당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이름으로 당을 박차고 나가 독립생활을 한 적도 있으니, 질서 있는 퇴진이 보장된다면 그들 역시 생존을 보장받겠지요. 어차피 나중에 누가 친박이었고 누가 아니었는지 기억할 사람도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저 의리 하나는 잘 지키더라는 인상만 심어주면 된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B type 재벌
뇌물 혐의로 재벌이 수사대상에 오르자 재벌들은 억울하다는 듯 자신들은 피해자이며, 한편으로 역대 정부에도 ‘공익사업’에 기부금을 내 왔다며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이 별도의 비리사건이 아니라고 항변했습니다. 재벌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지만, 모든 정권에서 그들은 돈을 내왔고 그만큼 정권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마치 미국이 ‘누가 대통령이든 상관없다’고 한 것처럼, 재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벌의 대명사가 된 삼성이 이만큼 큰 건 ‘민주 정부’ 10년 동안이었죠.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라고 말한 건 재벌 입장에서는 풋내기의 치졸한 자랑일 뿐입니다. 그 돈 쥐여준 게 바로 재벌이니까요. 친박이건 비박이건, 여당이건 야당이건, 박근혜건 누가 되었든 변하지 않는 권력은 따로 있는 셈입니다.
C type 비박계
김무성이 이런 말을 했었죠. ‘최순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이다.’ 뒤집어보면, 자신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 알면서도 4년 가까이 침묵하고 동조하고 부역해온 ‘역적’들이 이제 정국의 캐스팅보트를 쥐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일단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박근혜, 친박들과 선을 긋고 탈당도 불사하면서 도망치려 했는데, 탄핵정국이 열리고 공이 국회로 넘어오자 야당들이 협조를 구해야 하는 세력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됐죠. 이제 비박계는 자신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4월 퇴진, 6월 조기 대선’으로 입장을 정한 뒤 도리어 야당에 협상을 요구하고 있지요.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를 대표할 새로운 보수, 비박계의 재탄생이 예고됩니다.
D type 조선일보
지금까지 정치권을 향해 지속적인 행동지침을 보냈던 조선일보. 조선일보의 지침은 ‘이제 고마해라’인 것 같습니다. 가장 노골적으로 보수정권 재창출을 주문했던 조선일보는 더 이상의 혼란도, 광장의 촛불도 바라지 않습니다. 벌써 박근혜 ‘사면’을 운운하는 칼럼까지 띄웠더군요. 박근혜와 친박의 세력을 꺾었으니 조선일보로서는 이제 촛불의 필요는 다한 셈. 보수 세력의 재편성에 충분한 준비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촛불을 잠재우고 질서를 되찾아야 하겠지요. 그렇기에 대통령 담화문에 대해 ‘실질적 하야 선언’이라고 크게 띄워주며 ‘이제 다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거국 총리 모시고 개헌 정국으로 넘어가야 보수정권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니까요. 이제 변수는 조선일보가 만든 질서를 촛불이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이제 요동치는 시간이 다가옵니다. 조선일보의 뜻이 어디까지 관철될지, 촛불이 답할 차례입니다.
E type 민주당
탄핵정국을 주도하려던 민주당은 대통령 담화문 발표 이후 하루 만에 비박계에 이어 국민의당에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거국내각, 책임총리, 2선 후퇴 등 사태의 초기부터 갈팡질팡하던 민주당은 탄핵으로 가닥을 잡고 선두에 서나 했는데, 대통령의 역공에 말려버린 형국이 되었군요. 탄핵이라는 선택지부터가 비박계에 캐스팅보트를 쥐여주는 것이었으니, 애초에 스스로 폭탄을 안고 간 것이긴 했지만. 민주당이 정세 주도권을 쥘 능력이 있는지,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때까지 민주당은 광장의 촛불이 필요할 겁니다. 그게 민주당의 유일한 압박수단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 정치권 모두 박근혜의 임기를 언제까지로 할 것이냐 하는 협상에 들어가게 되면, 딜을 끝내고 대선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들에게도 촛불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겁니다. 지금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광야를 질주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F type 국민의당
그 어느 때보다 박지원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렸습니다. 트럼프의 정치 스승이 이런 말을 했다죠. “긍정적으로 유명해지든, 부정적으로 유명해지든 중요치 않다, 어차피 사람들은 이름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는다.” 노회한 정객 박지원이라는 이름은 다시금 대중에게 각인될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가 보수정권 재창출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면, 박지원은 국민의당의 이름을 알리고 문재인을 까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정치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던가요, 이제 비박계와도 손을 잡으려는 국민의당. 뜬금없이 국민 70%가 개헌을 원한다며 개헌 정국을 들이미는 박지원. 탄핵카드를 쥐고 ‘할까 말까’ 간을 보는 모습에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욕을 했지만, 어쨌든 대중을 견제하고 무리수를 두지 않으면서 합종연횡을 구사하는 제도정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G type 촛불시민
대통령의 담화문도 성난 민심을 달래지는 못한 듯합니다. 이제 촛불의 요구는 대통령 퇴진에 이어 새누리당까지 해체하라고 요구하고 있지요. 매주 백만, 이백만이 청와대 코앞까지 밀려오자 어쨌든 박근혜 임기를 끝까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박근혜는 명실공히 버려진 카드가 된 셈이죠. 그런데 박근혜가 사라진 자리, 그 자리의 주인이 촛불이 될 것 같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구하는 박근혜 탄핵, 속이 후련해질 것 같지만 탄핵은 헌재 재판관들이 하는 것이지 국회의원도, 시민들에게도 전혀 권한이 없습니다. 복잡해진 정치권의 계산속에 촛불의 향배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정치권의 갈팡질팡하는 행동이 촛불에 기름을 붓게 될지, 조만간 확인할 수 있게 되겠지요.
H type 좌파
정치권의 계산이 복잡해지는 만큼 좌파의 머릿속도 복잡해집니다. 잠깐 밥이라도 먹고 오면 어느새 탄핵이니, 개헌이니 새로운 얘기들이 연이어 속보로 날아옵니다. 이러다간 이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정치권 주도로 결국 정국이 정리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입니다. 예상보다 광장의 촛불은 1달 넘게 이어지며 이미 200만을 돌파했지만, 이제 슬슬 광장을 닫기 위해 정치권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대통령 임기단축을 둘러싸고 개헌 떡밥이 다시 날아왔는데, 어차피 내각제든 대통령중임제든 개헌은 지금 국면에서 국회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도 없고, 87년 ‘직선제 개헌’처럼 여론의 열망을 반영한 것도 아닙니다. 전형적인 시간 끌기, 그리고 촛불 국면을 마무리하겠다는 셈법이 보입니다. 벌써 여섯 번째를 맞이하는 대규모 촛불, 그러나 여전히 무엇을 할 것인지가 공백인 좌파의 시름은 깊어만 갑니다. (워커스 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