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리, 윤지연 기자
권력에 무릎 꿇은 재계. 최순실 앞에서 을이 된 대기업.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강제 모금을 비판하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들이 갑을 관계였다는 뉴스도 이어진다. 총수 일가의 사면이나 검찰 수사와 관련해 속이 타는 기업들을 고의로 노린 게 아니냐는 의심도 내비친다. 막강해 보이던 재벌도 권력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뉘앙스를 담은 뉴스에 재벌은 갑작스레 ‘피해자’가 된 듯하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적게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을 지원한 기업은 과연 어쩔 수 없이 강제 모금에 동참한 것일까. 주판알을 굴리지 않고 권력에 굴종해 빼앗긴 돈일까. 이들이 박근혜 정부에서 챙긴 이익은 없었던 걸까. 이들은 박근혜 정부하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워커스》가 짚어봤다.
삼성의 돈벌이, VIP가 밀어준다
삼성은 최순실 씨가 전권을 행사했다고 알려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가장 많은 돈을 낸 기업이다. 삼성 계열사들은 204억 원을 내놓았다. 정유연 씨를 위해 독일에 승마장을 구입해 제공하는 등 정 씨의 해외 승마 연수를 지원해주고 있다는 의혹도 나왔다. 삼성의 지원 뒤에 남모를 ‘특혜’는 없었을까.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생사의 고비에 놓인 후 경영승계는 삼성의 중요한 이슈였다. 2012년 이재용 씨가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취임하고 그는 삼성그룹 경영 전반을 지휘했다. 삼성 계열사 6곳을 매각했고 남은 계열사도 사업부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속도가 붙은 것이다. 계열사 정리 작업은 지배구조 개편의 사전 단계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지난달 27일.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전자 등기 이사로 등재됐다.
이재용 부회장의 대관식 이후 삼성은 어떤 행보를 취하게 될까. 사실 삼성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갈 것이라는 예측은 꾸준히 제기됐다. 현행법상, 지주회사는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자회사로 둘 수 없다. 이 때문에 삼성생명이나 삼성전자가 같은 지주회사로 묶일 수 없다. 하지만 정부가 중간금융지주회사를 허용하도록 법을 바꾸면, 삼성전자를 지주회사로 두고 삼성생명을 중간금융지주회사로 지주회사체제를 완성할 수 있다. 이처럼 삼성이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하고, 이재용 체제를 굳히기 위해서는 정부의 도움이 절실하다. 때맞춰 공정거래위원회는 2일, 연내에 중간금융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하는 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의 경영 승계를 위한 적재적소의 법안이다.
삼성이 ‘미래사업 분야’로 준비해 온 ‘의료와 헬스케어’도 그렇다. 삼성은 그룹 사업을 전자·금융·바이오 중심으로 재편했다. 동시에 전 계열사가 HT(Health Technology) 산업에 뛰어들었다.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한 의료 기기와 바이오산업뿐 아니라 병원, 전자, 보험, 원격 의료 산업까지 손을 뻗치기도 했다. 사실 삼성의 의료와 헬스케어 육성은 오래전에 짜 놓은 시나리오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10년 보건복지부로부터 의뢰받아 <미래 복지 사회 실현을 위한 보건 의료 산업 선진화 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당시 보고서는 의료 산업 체계의 큰 그림을 원격의료와 건강관리서비스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관리서비스 사업을 위해 개인 질병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삼성이 내세운 청사진에 착실히 부응했다. 창조경제의 핵심사업 중 하나인 ICT 융합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 정책에 포함된 ‘ICT 힐링 플랫폼’ 사업은 개인의 질병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이다. 삼성이 추구해온 건강관리서비스사업과 맥이 닿아있다. 의료 분야의 규제완화 역시 박근혜 정부에서 더욱 활발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이후 국정 기조를 ‘경제 성장과 규제 완화’로 삼으며, 의료 영리화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했다. 신의료 기술에 대한 규제도 완화했다. 본격적으로 의료가 공공의 영역이 아닌 시장의 분야로 넘어갔다.
현대차는 왜 68억을 헌납했나
현대자동차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68억 8,000만 원의 기부금을 출연했다. 물론 박근혜 정부에서 현대차가 챙긴 수혜를 들여다보면 68억 원은 그야말로 ‘수고비’ 정도의 떡값이다.
현재 정부, 여당이 추진 중인 ‘파견법 개정’은 현대차그룹을 위한 선물꾸러미다. 파견법 개정안에는 파견과 도급의 구별기준을 축소해, 현대차에 만연한 불법파견에 대한 법적 판단을 어렵게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개정안에 담겨 있는 ‘뿌리 산업’ 파견 확대는, 그동안 금지돼 왔던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의 파견 허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현대차로서는 6년여 간의 불법파견 속앓이를 끝낼 ‘사이다 법’인 셈이다. 2014년 한국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2,500억 원에서 장기적으로 6,100억 원가량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들로서는 재단 기부금 68억 원이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정부로부터 화끈한 세제 혜택도 받았다. 현대차는 지난 2014년 9월, 서울 삼성동 한전 부지를 무려 10조 5천 500억 원에 매입했다. 이로써 현대차는 국내 10대 그룹 중 땅 부자 1위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차가 쌓아 둔 114조 원의 사내유보금을 특혜성 땅 투기에 사용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정부는 ‘투기’가 아닌 ‘투자’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현대차에 특혜를 몰아줬다. 정부는 다음 해 2월, 법인세법 등 18개 시행규칙을 발표했다. 업무용 건물의 범위를 공장과 판매장, 영업장, 본사, 연수원 등으로 확대해 이를 기업소득 환류세제상 투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업소득 환류세제는 일종의 ‘사내유보금 과세제도’로 한 해 기업 이익을 투자, 임금인상 등에 사용하지 않으면 추가 과세하는 제도다. 정부의 통 큰 혜택으로, 현대차는 부지 매입과 추가 개발비용 등 총 15조 원 가운데 70~80% 이상을 투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현대차로서는 8천억 원 가량의 세금이 줄어든 셈이다.
단돈 800억으로 그들이 얻은 것
롯데와 SK도 이해타산은 분명하다. 롯데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각각 28억과 17억 원의 출연금을 전경련을 통해 보냈다. 롯데가 이유 없이 ‘투자’한 것일까. 지난해 롯데는 면세점 특허 심사에서 월드타워점 운영권을 상실했다. 이어 올해 6월 관세청이 공고한 신규 면세점 입찰에 참여했다. 국내 1위이자 세계 3위인 롯데면세점 입장에서 올해 신규 사업권 입찰은 중요하다. 롯데가 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롯데에 대한 의혹이 흘러나왔다. 이번 면세점 입찰이 롯데에 특혜로 돌아갈 가능성을 따진 것이다.
또 지난 5월에는 70억 원을 K스포츠재단에 보냈다. 신동빈 회장 등 롯데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수사가 죄어 오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K스포츠재단은 5월 말 받은 돈을 그대로 돌려줬다. 이후 검찰이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일종의 ‘뇌물’을 받아놓고, 봐주기 수사가 통하지 않자 급히 돌려준 셈이다.
SK는 미르-K스포츠재단에 모두 111억 원을 출연했다. 삼성그룹, 현대차그룹에 이어 세 번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500억 원의 회사자금을 횡령해 징역 4년을 받은 중범죄자였다. 최 회장은 2015년 8.15특사로 구치소를 나오고 불과 두 달 후에 거액의 자금을 재단에 기부했다. 또 SK는 올해 박근혜의 이란 방문 당시 사절단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의 사면 역시 중요한 문제로 안고 있다.
역시 사건의 중심에 선 것은 전경련이다. ‘정치권의 로비 창구’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경련 해체’ 요구도 반짝 떠올랐다. 전경련의 태도 혹은 목표는 한결같다. 기업 ‘로비 사건’이라는 여론의 풍파를 피해가는 것, 즉 기업에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불똥이 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난 1일,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재단 모금은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그들은 여론을 따라 자신을 ‘피해자’로 자처했다. 하지만 정권과 기업은 결코 ‘갑-을’관계가 아니었다. 정권은 5년이면 바뀌지만, 기업의 지배구조는 완고하다. 정권으로부터 얻을 만큼 얻어낸 기업 입장에서는 끈 떨어진 정권과 결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4년 3월, “규제는 쳐부술 원수이자 암 덩어리”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뱉어내며 ‘규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총대를 멘 정부는 기업을 위한 ‘신문고’까지 만들며 기업의 요구를 무더기로 관철해 나가기 시작했다. 규제개혁 포털 사이트에 마련된 ‘규제개혁 신문고’는 말 그대로 기업 맞춤형 서비스다. ‘경제단체 건의 개선 현황’ 자료에는 2년간 경제 단체들이 건의한 규제 철폐 정책이 게시돼 있다. 여기에는 임원 보수 공시 규제 완화, 대기업 공시 규제 완화 등을 포함해 기업 합병 분할 등에 대한 감면지원 일몰 연장, 빅데이터 관련 개인정보보호 규제 완화 등 ‘대기업 특혜’ 방안이 다수 포함 돼 있다. 정부는 이들이 건의한 310개 중 90%에 달하는 277개의 처리를 완료했다.
정부가 규제 철폐의 근거로 내세웠던 것은 ‘일자리 창출’과 ‘투자 활성화’다. 하지만 전경련이 올해 30대 그룹을 대상으로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 이 중 21개 그룹의 신규채용 규모는 작년 수준 이하로 줄었다. 기업 투자도 제자리걸음이다. 2015년 30대 그룹의 시설, 연구 개발 투자 실적은 전년 대비 0.1% 상승했을 뿐이다. 반면 오너 일가가 받아 챙긴 배당금이나 기업 사내유보금은 수직 상승했다. 올해 30대 그룹 오너 일가가 받은 배당금 규모는 9,500억 원에 달한다. 작년 대비 무려 23.7%가 증가했다. 올 상반기 30대 그룹 사내유보금은 759조 6,413억 원으로, 작년보다 35조 107억 원(4.8%)이 늘었다. 이 30대 그룹 중 미르-K재단에 기부금을 출현한 그룹은 18곳. 이들은 800억 원으로 정부와의 밀월관계를 청산할 수 있게 됐다.
청년희망재단, 제2의 미르-K스포츠재단 되나
청년희망재단이 미르-K스포츠재단의 맏형 격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설립과정과 모금방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청년희망재단은 지난해 9월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의 자발적 기부로 기금을 만들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이 2,000만 원을 기부해 1호 기부자가 됐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억 원,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150억 원, 구본무 엘지그룹 회장이 70억 원을 냈다. 한 달 만에 800억 원대가 모였다. 청년희망재단은 최근까지 1,400억 원의 기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 자발적인 성금을 재원으로 한다고 했지만 대기업의 주머니를 통해 이루어진 재단을 두고 최순실 씨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최근 한국노총은 청년희망재단에 현재까지 모금내역과 집행내역, 기부자 및 신탁기부자 명단과 금액, 임직원 명단 등에 대해 자료를 제공하라고 요청했다. 한국노총은 “최근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재단 기금 모금과 예산집행 과정에서도 미르재단과 유사한 과정이 있었던 의혹이 불거짐에 따라 재단에 해당 자료를 요구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비슷한 의혹이 나왔다. 야당 의원들은 지난 9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기업들이 모금에 앞 다퉈 동참한 것은 모금의 당사자가 재단이 아닌 정부이기 때문 아니냐”고 비판했다. 청년희망재단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고용노동부 직원까지 재단에 파견했다. 이처럼 청년희망재단은 미르-K스포츠재단의 전초전이었을까? 부패한 정권과 재벌의 주고받기식 유착관계는 어디까지 드러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