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부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썼는지 알 수 없다. 사회 공헌 차원으로 낸 기부금 총액은 감사보고서에 공개하지만, 기부 내역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부 내역을 공개하라는 여론에도 기업들은 회사 법인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한다. 그런 기부금 일부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발견됐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고 하지만, 정승처럼 썼는지, 개처럼 썼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대기업 기부금. 이런 기부금은 사실 한두 푼이 아니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500대 기업 기부금 총액은 지난해에만 2조 5,577억 원에 달했다. 그중 1, 2위를 차지한 삼성전자와 삼성생명만 해도 5,000억 원이 넘는다. 그 뒤를 이은 SK텔레콤의 725억 원, CJ제일제당의 677억 원, 현대자동차의 662억 원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4,464억 원(매출액의 0.22%), 삼성생명은 803억 원(매출액의 0.29%)을 기부금 명목으로 썼다고 한다.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삼성이 쓴 이 5,000억 원은 어디로 갔을까?
삼성 기부금 5,000억 중 절반, 행방이 묘연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기부금’만으로 삼성은 전경련을 통해 미르재단에 125억 원, K스포츠재단에 79억 원을 냈다(뒤에 얘기하겠지만, 삼성은 기부 외에 직접 지급한 돈 등이 더 있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는 500억 원을 기부했다.
이 외 2,000억 원에 가까운 뭉칫돈은 삼성그룹이 운영하는 공익재단으로 들어갔다.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에 500억 원, 삼성문화재단에 400억 원, 삼성생명공익재단에 659억 원, 삼성복지재단에 260억 원, 호암재단에 50억 원 등 총 1,879억 원을 출연했다.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생명 공익재단은 이재용 부회장이 이사장으로 있고, 삼성복지재단도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호암재단 이사장인 손병두 전 서강대 총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 시절 삼성에서 일한 인물이다. 또 삼성생명공익 재단은 삼성생명 지분 2.18%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은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물산 등에 총 7.9%의 지분을 갖고 있다(삼성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재단의 이사장은 모두 이재용 부회장이다). 자사 계열사끼리 기부금 형태로 자산을 운용한 셈이다.
나머지 일부 액수는 삼성사회봉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삼성전자가 한국전참전용사기념재단에 12억 원, 대한적십자사에 5억 원, 경기도 LED 사업에 30억 원을 출연했고 이외 4천만 원 정도를 기타 기부 활동에 썼다. 하지만 이 같은 삼성의 기부도 재능 기부나 캠페인성, 참여형 기부 활동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외부에서 확인된 삼성의 기부 금액은 2,630억 원 정도다.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공개한 기부금 5,000억 원 중 절반밖에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다. 삼성 관계자들에 전화를 시도했지만, 남은 기부금 지출 내역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삼성그룹 사회봉사단 관계자는 《워커스》에 “(삼성그룹) 홈페이지에서 삼성의 후원 활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구체적인 금액(내역)은 공개하고 있지 않다”며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사이트에 가면 공시가 의무화돼 있고 (기부금 총액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부금의 구체적인 지출 내역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전했다.
게이트 중심에 있는 재벌 사내유보금
삼성, 현대차 등 재벌 대기업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기부한 금액은 사실상 사내유보금에서 나온 것이다. 그동안 전경련 등 재벌그룹은 사내유보금이 현금성 자산이 아니라며, 사내유보금 환수나 출연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번 게이트에서 드러났듯 사내유보 될 돈뭉치들은 비선 실세의 재단과 회사 등에 흘러들어 갔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자료에 따르면, 재벌 대기업들은 많게는 수천억에서 적게는 수십억 원까지 기부금을 비용으로 처리했다. 사내유보금은 주로 이익 잉여금을 말하는데, 이는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에서 배당 등을 제하고 남은 금액을 말한다. 즉, 기부금을 비용 처리하지 않았으면 이익 잉여금으로 남아 그대로 사내유보 될 돈이다. 재벌들은 이 사내유보금으로 ‘최순실의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을 낸 것이다.
사실 삼성은 기부금 형태로만 이번 게이트에 연루된 것이 아니다. 삼성은 비선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이 실소유주인 비덱스포츠에 35억 원을 송금했고, 차은택이 단장으로 있던 창조경제혁신센터엔 400억 원을 펀드로 출자했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위해 명마 ‘비타나V’도 10억 원에 구입해 줬다. 또 삼성은 ‘정유라 승마 국가대표 장기 로드맵’을 위해 180억 원의 대한승마협회 지원 계획 세우고 있었다. 지난해 9월부터 최순실의 조카 장시호가 실소유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삼성이 10억 원 이상을 지원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지금까지 게이트에 연루된 삼성의 자금만 줄잡아 635억 원에 달한다.
물론 삼성만이 아니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재벌의 기부금은 800억 원에 달하며,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조성한 펀드에 투여된 대기업 출자금은 5,687억 원이다. 이렇게 대기업의 자금은 기부금, 펀드 출자, 지원 등 다양한 형태로 흘러들어 갔다. 액수만 6,700억 원이 넘는다. 이런 곳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모두 사내유보금으로 적립될 돈이다.
재벌사내유보금환수 운동본부 김태연 집행위원장은 “그동안 재벌이 사내 유보금을 풀지 못한다는 주장은 허구였다”고 말했다. 김태연 집행위원장은 “재벌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서는 사내유보금을 한 푼도 쓸 수 없다고 했지만, 정권의 비선 실세에 뇌물을 바치는 데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송명관 참세상연구소 연구위원은 재단 기부를 통한 재벌의 자금 운용을 두고 “기업은 통상 기부금을 비용 처리 하지만, 기부로 기업의 사회 공헌 이미지 포장과 (감소한 이익 잉여금으로) 세금을 줄이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며 “재단을 이용해 사내유보금을 분산 배치하는 편법은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과거 청계재단을 만들어 장학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크게 한 게 없다. 그래서 비난이 일자 사회복지재단으로 성격을 바꾸기도 했다”고 꼬집었다.
최순실에 500억, 삼성 직업병 피해자엔 500만 원
삼성은 사내유보금으로 박근혜 정권과 최순실의 비위를 맞췄다. 반면, 노동자에게는 어떻게 대했을까. 단적으로 삼성은 직업병 피해자들에게는 이 돈의 0.01%로 생색을 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지난 15일 오전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전자는 최순실에 500여억 원, 삼성 직업병 피해자엔 500만 원을 줬다”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인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구속 처벌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애초 지난해 7월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원회)는 삼성에 공익재단을 설립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조정위원회는 삼성에 1,000억 원을 재단에 출연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작년 10월 7일 재단 설립을 거부하며 독자 보상 체계를 일방적으로 추진해왔다. 반올림 관계자는 “삼성은 독자 보상 구조를 만든 이유도, 지금까지 독자 보상을 얼마나 진행했는지도 감추고 있다”며 “삼성전자는 보상받은 사람에게 비밀 유지 서약서까지 쓰게 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삼성전자는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산업 물질과 환경에 대한 정보 공개마저 거부해 왔다. 반올림은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 노동자는 산재 인정을 위해 삼성전자가 쓰는 화학물질 작업환경, 안전보호구 정보가 필요하지만 영업 비밀이라며 숨기고 있다”고 전했다.
고용노동부는 오히려 이런 삼성을 두둔해온 장본인이다. 지난 9월 26일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이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삼성전자에 정보 공개를 요청했지만 삼성이 제출한 것은 17%에 불과하다. 거부한 것은 83%다.
삼성은 다 영업비밀이라며 모든 것을 숨기고 있다”고 질의하자, 고용노동부 이기권 장관은 “어떤 (화학) 물질은 기업의 생존과 관련됐다. 개인 사생활 정보가 포함된 정보는 (공개하기) 힘들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반도체 직업병으로 노동자 76명이 사망하고, 224명은 아직도 후유장해를 앓고 있다. 그러나 삼성은 재해율이 낮다는 이유로 산재 보험료 1,009억 원마저 감면받았다.
자본에 ‘사회 공헌’ 기부금은 없다
재벌 대기업들이 기부금 형태로 정부나 재단에 낸 돈은 비리 연루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대기업과 재벌 총수들이 박근혜 정부가 조성한 프로그램에 기부한 금액만 2,164억 원이다. 재벌은 이런 정부의 모금이 ‘준조세’라며 피해자 시늉을 해왔다. 그러나 기업의 조세부담률이 바닥을 쳐 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법인세 조세부담률은 18%다. 더불어민주당은 현행 법인세에서 3%p 인상을, 국민의당은 2%p 인상을, 정의당은 3~5%p 인상을 주장하고 있다. 현행 법인세가 5%p 인상돼도 23%로, 김대중 정부 때 27%보다 낮고, 노무현 정부 수준이 된다.
이렇듯 정부와 재벌의 거래가 이뤄지는 기부금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또 다른 현안이다. 재벌의 기부금 규모는 1년에 조 단위로 움직인다. 대기업은 기부금 내역 공개 의무가 없으니, 기부금을 일종의 뇌물로 삼아 성과연봉제나 임금피크제 같은 ‘노동개악’과 거래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재벌 기부금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아닌 자본의 무기, 사회적 흉기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