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훈 기자
편집자주
공공 의료가 위협받기 시작한 건 오래됐다.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에 그 책임을 떠넘기지만 사실 김대중 정부 말기에 나온 <경제자유구역의지정및운영에관한법률>이 의료를 산업화하겠다는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참여정부의 의료 선진화 정책도 그 궤를 이어받았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의료 민영화나 의료 영리화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체는 다르지 않다. 공공 의료를 포기하고 국민 건강을 민간 자본에 맡기는 것. 반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의료 영리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가 있다. 삼성이다. 이 기획에선 삼성이 의료 영리화의 시대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그 대비를 위해 어떤 작업을 해 왔는지, 삼성의 의료 영리화 로드맵은 얼마나 완성이 됐는지 살펴본다. 첫 번째로 삼성이 의료 영리화 시대를 대비해 그린 청사진을 엿본다. 다음은 의료 영리화를 대비하여 병원을 소유하는 방식을 삼성병원의 사례에서 찾아보고, 세 번째로는 삼성과 정부가 합작해 의료 영리화 정책을 수립한 과정을 살핀다. 끝으로 의료 영리화가 이루어진 해외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점친다.
1993년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 경영 선언을 했다. 본격적인 이건희 시대를 알렸던 이 선언 이후 삼성전자는 국내 휴대 전화 시장에서 업계 1위가 됐다. 반도체 산업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2010년 또 한 번의 선언이 있었다. 삼성은 바이오 산업과 의료 기기, 태양 전지, 자동차 전지, LED 사업의 5개 신수종 사업을 발표했다. 삼성은 이 5개 신수종 사업에 모두 23조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그룹 전체 매출의 80%가 삼성전자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 모델이 필요했던 삼성의 선언이다. 그에 발맞춰 삼성가의 경영권 승계에도 속도가 붙었다. 1대의 백색 가전과 2대 반도체에 이은 3대째 이재용의 삼성이 어떤 사업에 주력하게 될지를 천명한 셈이다.
발표 당시 5개 사업 중 삼성이 가장 관심을 보인 분야는 태양 전지와 자동차용 전지 사업이었다. 삼성은 태양 전지에 6조, 자동차용 2차 전지에 5조 4000억 원, LED에는 8조 6000억 원을 투자하는 반면 바이오제약과 의료 기기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2조 1000억 원과 1조 2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6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행보는 애초의 계획과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태양 전지 부문은 일부 방향이 틀어지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불투명해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LED 부문 역시 신수종 사업화 이후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지만, 이후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지 않은 데다 사업이 삼성전자에 흡수된 이후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정도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남은 건 바이오산업과 의료 기기 산업이다.
삼성 그룹은 HT 체제로 개편 중
삼성경제연구소는 2010년 보건복지부로부터 연구 용역을 의뢰받아 보고서를 발표한다. <미래 복지 사회 실현을 위한 보건 의료 산업 선진화 방안>이라는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HT 산업’이다. 보고서는 ‘HT(Health Technology)’를 “건강 증진 또는 질병의 예방·치료를 위한 제반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기존에는 의료 기기 및 제약 산업을 ‘BT(Bio Technology) 산업’의 영역에서 주로 다뤘다. 그러나 ‘HT’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면서 의료 정보 시스템과 건강 보험은 물론 원격 의료 등 ‘건강’을 둘러싼 모든 내용이 ‘돈벌이’의 범주에 포함됐다.
보고서는 한국이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의료 수요가 증폭한 배경을 제시하며 건강 관리 서비스의 시장화와 원격 의료의 도입을 강조한다. 핵심은 이 수요를 공공 부문이 아닌 기업이 감당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예방 및 재활 의학·건강 검진 등 정부가 제공하던 서비스를 민간 영역으로 넘기고, IT(정보 기술)를 기반으로 원격 진료를 도입해 환자의 질병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의료의 공공성을 배제한 ‘영리화’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HT 분야 산업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직접적인 의료 서비스 뿐 아니라 건강 관리와 예방 의학 등 그동안 공공의 영역이 맡아 오던 부분에도 민간 기업이 진출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삼성을 위한 영리화 정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의료 영리화가 이대로 추진되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건 삼성이 분명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보고서가 나온 지 6년이 지난 지금 삼성의 연구와 제안에 따라 의료 영리화는 현실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최대의 수혜자 역시 삼성이 될 공산이 크다. 삼성은 전 계열사를 동원해 HT 산업에 뛰어들었다.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한 의료 기기와 바이오산업뿐 아니라 병원, 전자, 보험, 원격 의료 산업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3년 삼성전자 컨퍼런스콜에서 “삼성전자가 의료 등 신사업을 통해 2020년까지 400조 원의 매출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이 HT 산업에 걸고 있는 기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의약품 제조 개발 업체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달 연간 생산 능력 15만 리터 규모의 제2공장 가동을 시작했고 지난해에는 총 8500억 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인 18만 리터의 제3공장도 짓기 시작했다. 목표대로 2018년부터 3공장이 가동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연간 36만 리터를 생산해 시장 점유율이 32%에 달하는 업계 1위로 부상한다.
삼성은 원격 의료 사업도 추진 중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4년 중국에서 열린 보아오 포럼에서 삼성전자의 모바일 기술과 헬스케어 사업을 접목할 사업 계획을 언급했다. 갤럭시S5에 심박 센서를 탑재해 원격 의료의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삼성SDS가 대주주인 365홈케어는 ‘우리 가족 평생 주치의’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사이버 건강 관리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의료기기사업부를 따로 두고 국내 최대 의료 기기 업체인 메디슨을 비롯한 의료 기기 업체들을 잇달아 인수했다.
삼성은 국내 ‘빅 5’ 병원으로 꼽히는 삼성의료원도 갖고 있다. 삼성의료원은 1990년대 초반 삼성이 성균관대 경영에 참여하고 성균관 의대 설립을 인가받으면서 성균관대의 부속 병원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했으나 지난 2010년까지 지키지 않다가 교육부의 제재를 받고서야 삼성이 소유한 병원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삼성창원병원을 부속 병원으로 전환했다. 서울에 소재한 대규모 병원을 의료 영리화 정책이 안착한 이후 영리 병원으로 전환하기 위한 포석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이 HT 분야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건 삼성의 인사에서도 드러난다. 삼성은 지난 연말, 삼성 그룹 내에서 ‘해결사’로 불리는 전동수 전 삼성 SDS 사장을 삼성전자 의료기기사업부장으로 임명했다. 재계에선 GE와 지멘스 등 세계적 규모의 대기업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의료 기기 사업에 수완이 좋은 전동수 사장을 전진 배치 한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전 사장이 3년간 삼성 SDS에서 소프트웨어와 솔루션 사업을 추진한 경력을 들어 스마트폰과 의료 기기를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헬스케어 사업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삼성은 전사가 HT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는 일각의 시선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피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몇 가지 새로운 품목을 개발하는 것일 뿐 HT 분야 산업에 발 벗고 뛰어든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 꾸준히 HT 산업을 준비하고 주도해 온 것 아니냐는 질문에도 “해외에서도 이미 오랫동안 관련 보고서가 나오고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며 삼성이 특별히 HT 분야 산업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부와 삼성, 밀어 주고 당겨 주고
그런데, 삼성이 신수종 사업을 발표한 2010년부터 최근까지 삼성이 주목한 사업에 정부가 호응하는 형태의 양상이 이어지고 있다. 삼성의 HT 산업 진출이 정부의 의료 영리화 정책 추진과도 맞아떨어진다.
2010년 삼성이 의료 기기 사업과 바이오산업을 신수종 사업으로 선택했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부의 의뢰로 작성한 보고서에서 의료 산업 선진화를 위해 의료 기기와 원격 의료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호응하듯 이명박 정부는 원격 의료 허용안을 국회에 제출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명박 정부가 국회의 반발로 원격 의료 허용안 제출에 실패하자 박근혜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의료 산업 선진화로 포장된 의료 영리화 정책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어 공공 지방 의료원인 진주의료원 폐쇄를 시작으로, 투자 활성화 대책을 통해 병원 부대사업 확대, 영리 자회사 허용, 메디텔 허용, 영리 병원 첫 허가 등을 추진했다. 이밖에 ‘의료 관광’을 명목으로 국내 병원의 해외 영리 병원으로의 자산 유출 등을 허용하는 <의료해외진출및외국인환자유치지원에관한법률>을 제정했다. 아울러 원격 의료 추진을 강행하고 있으며, 예방, 관리 영역인 ‘건강 관리 서비스’까지 가이드라인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공공 병원 폐쇄, 병원 부대 사업 확대, 건강 관리 서비스까지 모두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면
삼성이 아무런 문제없이 HT 분야 산업에 진출하고 있지만은 않다. 의료 영리화의 핵심으로 거론되는 민간 의료 보험에서 삼성은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국내 최대의 민간 의료 보험 회사인 삼성생명은 공공 의료 보험을 민간 보험으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을 일찍부터 밝혀 왔다. 삼성생명은 2005년 ‘민영 건강 보험의 현황과 발전 방향’이란 보고서에서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보험을 최종 단계로 제시했다. 2010년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그리는 의료 영리화의 최종 단계에서도 보험을 포함한 ‘건강 관리’의 모든 영역을 민간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촛불 집회 이후로 의료 민영화가 전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그 핵심으로 민간 의료 보험이 지적되면서 민간 의료 보험을 필두로 하는 의료 민영화는 말을 꺼내기도 어렵게 됐다. 정부도 민간 의료 보험 허용을 대놓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의료 영리화를 추구하는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민영화가 아니”라며 변명하는 한편, 은밀하게 건강 보험이 보장하는 영역을 지속해서 축소해 민간 보험이 수익을 내는 길을 터 주는 것뿐이다. (이를 증명하듯 건강보험공단의 흑자 폭은 해마다 커지고 있다. 건강 보험이 보장 영역을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 민영화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삼성과 정부의 의료 영리화 구상에 빗장을 친 셈이다.
의료 영리화 정책이 거센 반대에 부딪히면서 정부도 시시각각 새로운 전략을 내놓고 있다. 강석훈 새누리당 의원이 내놓은 ‘지역 전략 산업 육성을 위한 규제 프리존의 지정과 운영에 관한 특별법안’ 같은 게 그 예다. 14개 시도별로 전략 산업을 선정해 규제를 일시에 철폐해 주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법은 전면적 의료 영리화에 따르는 반대를 피해 주요 거점 지역에서부터 영리화를 하겠다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 이 법이 통과되면 규제 프리존으로 지정된 모든 지역에서 식약청이 허가하지 않은 의료 기기의 제조와 시판이 허용된다. 심박 센서가 부착된 갤럭시S5도 식약청의 허가 없이 팔 수 있는 셈이다. 또한 규제 프리존에서는 각 개인의 동의 없이 개인 의료 정보 활용도 가능하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그동안 의료 영리화를 대중들이 비교적 잘 막아 오면서 의료 영리화를 추진하는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규제 프리존 같은 새로운 방식의 영리화 정책이 나타날 때마다 이를 반대하고 막아 내는 방법도 거듭 갱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워커스8호 201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