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호석 열사 유골함 탈취 3일 뒤인 5월 23일. 삼성전자서비스 사측은 돌연 노조와의 교섭에 나서기로 한다. 한 달여 간 비공개 노사 교섭이 이어졌다. 그리고 6월 28일, 노사는 임금단체협약(기본협약)을 체결했다. 76년 만에 삼성에 민주노조 깃발을 꽂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노조인정과 직접고용 쟁취를 위한 그들의 싸움은 계속됐다. 염호석 열사 4주기를 앞둔 최근, 검찰이 삼성 노조파괴 문건 수사에 착수했다. 열사의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소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 17일. 삼성전자서비스 노사는 직접고용과 노조 인정에 전격 합의했다. 《워커스》가 염호석 열사 시신탈취 이후의 단체협약부터 최근의 노사합의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봤다.
2014년 기본협약 체결 후 4년
최근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 노사 교섭에 삼성그룹이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검찰과 언론보도에 따르면, 5월 열사 사망 이후 삼성전자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측에 ‘블라인드 교섭’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원청 사용자성’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꺼렸던 탓에 노조에 비밀협상을 요구했고, 노조는 열사 문제 해결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또한 검찰이 삼성전자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마스터플랜’에는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에게 교섭을 위임하고 시간을 최대한 지연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당시 교섭에서 사용자 위원으로 경총 남용우 노사대책본부장이 나섰다. 심지어 미래전략실이 교섭에 개입했다는 정황까지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염호석 열사 이후 열린 ‘블라인드 교섭’이 삼성 노조파괴 시나리오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경총과 금속노조(삼성전자서비스지회 소속 노조)는 비공개 교섭 끝에 2014년 6월 28일 임금단체협약(기준협약)을 체결했다. 염호석 열사가 “지회의 승리를 바란다”는 유언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된 지 43일째 되는 날이었다.
기준협약의 첫 번째 항목은 염호석 열사 관련 합의였다. 원청(삼성전자서비스)이 애도와 재발 방지를 표명하는 보도자료를 발표하고, 열사 시신탈취 관련 책임자를 처벌토록 하는 것이었다. ≪워커스≫는 삼성전자서비스 측에 책임자 처벌과 관련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지회는 열사가 살아있을 당시 “빨갱이”, “종북”이라고 폭언했던 양산센터 팀장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그가 계약 해지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기준협약을 통해 처음으로 ‘기본급 120만 원(기준건수 60건)’을 얻었다. 과거에는 기본급 없이 제품 수리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수령하는 100% ‘건당 수수료’ 임금 체계였다. 비수기에는 한 달 수입이 100만원에 그치기도 했다. 2013년 최종범 열사는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다. 배고파 못 살았고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럼에도 기본급은 당시 최저임금의 110% 수준인 120만 원에 그쳤다. 또한 사측은 합의 조항을 악의적으로 해석해 기존에 지급하던 각종 수당을 기본급으로 산입했다. 지난해 9월에는 한 조합원이 수당 미지급 대표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기도 했다. 현재 지회는 소송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전체 체불임금은 최소 25억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측은 단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감을 줄이기도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콜센터에 제품 수리 문의가 들어올 경우, 본사가 내용을 접수한 뒤 각 센터 노동자에게 업무를 배치하는 식이다. 기준건수 60건 이상을 처리하면 노동자에게 성과급을 지급해야 하므로, 본사는 콜센터 상담 단계에서 고객이 직접 수리하도록 했다. 한 노동자는 “콜센터가 고장을 문의한 고객에게 본인이 직접 해결할 수 있다며 관련 동영상을 전달하기도 했다”며 “실제로 이 때문에 일감이 약 30% 정도 줄었다. 주변에도 임금이 하락하는 동료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기준협약 이후에도 노조탄압은 끊이지 않았다. 협력업체의 위장 폐업과 조합원 표적 감사가 이어졌다. 기준협약에 ‘상호 폐업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사측은 노조 활동이 활발했던 진주, 마산, 울산센터를 각각 2014년 10월, 2015년 1월, 4월에 폐업했다. 최근 검찰 조사에서는 삼성전자서비스가 협력업체 평가항목에 노조와해 성과를 주요 지표로 삼은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8년 4월 17일, 직접고용 전격 합의
지난 4월 17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삼성전자서비스(주)가 직접고용에 전격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은 이날 오전, 한 일간지의 단독 보도로 외부에 알려졌다. 오후 1시에 최우수 삼성전자서비스(주) 대표이사와 나두식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지회장이 직접고용 합의서를 작성했다. 합의한 항목은 총 5개로 △회사는 협력업체 직원들을 직접 고용한다 △회사는 노조 및 이해당사자들과 빠른 시일 내에 직접고용 세부내용에 대한 협의를 개시한다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고 합법적인 노조활동을 보장한다 등이다.
나두식 지회장은 입장서를 발표하고 “삼성그룹의 삼성전자서비스 직접고용을 환영한다”며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오늘 비로소 삼성그룹이 80년간 이어온 철옹성 같았던 무노조 경영을 폐기시켰다”고 밝혔다.
노동계도 일제히 환영과 축하의 입장을 밝혔다. 민주노총은 “오늘 합의를 삼성의 반 헌법, 반 노동 80년 무노조 경영방침의 포기선언으로 간주하고 적극 환영한다”고 밝혔고, 금속노조는 “삼성재벌의 무노조신화, 금속노조가 깨트렸다”고 벅찬 감정을 보였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노조 결성 후 5년간 노조 인정 및 직접고용 등을 요구하며 삼성을 상대로 지난한 투쟁을 벌여왔다. 무노조 경영 방침을 고수하던 삼성은 원청 사용자성도, 노조도 인정하지 않은 채 탄압으로 일관했고, 그 과정에서 최종범, 염호석 두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염호석 열사의 생모는 《워커스》와의 통화에서 “호석이 때문에 8천 명이란 사람이 정직원이 됐다. 호석이도 노조도 소원이 다 이뤄졌다”며 “이제는 정말 아들 혼을 찾아 양산 솥발산(열사 장지)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견고하고 끈질기게 ‘무노조’ 경영을 고수했던 삼성이, 간접고용 노동자 직접고용과 노조활동 보장을 약속한 것은 분명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는 검찰의 노조 와해 문건 수사가 삼성에 얼마나 큰 부담으로 작용했는지를 방증 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감옥에서 석방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삼성으로서도 빠른 ‘국면 전환용’ 카드가 절실했을 것으로 보인다.
5일 만의 번개 합의, 절차상 문제 나오기도
전격적으로 발표된 합의는, 과정에서도 전격적인 측면이 컸다. 삼성 측의 논의 제안부터 합의 발표까지 걸린 기간은 불과 5일 이다. 노조에 따르면, 지난 4월 13일 삼성전자서비스(주) 실무자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측에 직접고용 의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해 왔다. 이에 당일 저녁, 지회는 긴급 통합집행위 회의를 열어 사측이 제안한 논의자리에 참석할 것을 결정했고, 다음날 사측을 만나 제안 설명을 청취했다. 아울러 지회는 삼성 측의 제안과 지회의 검토의견을 정리해 금속노조에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금속노조 위원장 및 담당부위원장이 지회로부터 회사 측의 제안 및 진행상황을 보고 받은 것은 16일 오전이다. 또한 그 날 지회는 통합운영위 회의를 통해 상황을 보고하고 이후 계획을 논의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 오전, 언론 보도를 통해 노사의 직접고용 합의 사실이 알려졌다.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실을 비롯해 중앙 간부들조차 언론보도 전까지 합의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제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번 합의안에 포함된 ‘직접고용 ’ 전환은 조합원의 근로조건 유지, 개선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에 단체교섭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노사 교섭에 관한 단체교섭권한 및 단체협약체결권한은 금속노조 위원장에게 있다. 산별노조의 하부조직인 지회나 지부는 산별노조의 위임을 받아야 교섭 진행이 가능하다. 노조법 시행령 제14조에 따르면 교섭 위임을 하는 경우에는 교섭사항과 권한 범위를 정해 위임을 해야 하며, 위임 받은 자의 성명과 위임 내용을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 통상 금속노조는 지부나 지회에 교섭을 위임할 경우 위임장을 작성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합의서에는 체결권자인 산별노조 위원장의 날인이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삼성전자서비스 노사 합의서에는 금속노조 위원장이 아닌,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장의 서명이 담겼다. 위임장 등 별도의 위임 절차도 생략됐다. 때문에 합의 발표 당일 열린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문제제기가 나오기도 했다. 중집에서는 해당 안이 잠정합의(의견접근안)인데 합의서로 명기된 점, 합의주체인 금속노조가 빠지고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명의로 된 점이 문제제기 됐으며 이후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한다는 의견이 오갔다.
법률사무소 새날 김차곤 변호사는 “노사간 합의는 상호 서면 작성과 날인을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으며, 날인은 교섭권과 체결권이 있는 산별노조 위원장이 해야 한다”며 “만약 이런 원칙들이 계속 훼손되면 회사가 금속노조가 아닌 개별 노조를 상대로 교섭하려고 하는 등 편법이 생겨 금속노조의 교섭권과 체결권이 약화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은 “의견접근안인데 합의안 으로 잘못 명기가 됐다”며 “삼성 측에서 논의 제안이 온 뒤, 다음날 삼성전자서비스 지회장으로부터 전화로 구두 보고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계속 소통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민경민 금속노조 미비국장 역시 “형식과 절차를 갖췄어야 했는데 너무 전격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지회가 (합의서를) 작성하는 형식으로 정리가 돼 중집에서 이와 관련한 문제를 확인했다”며 “이후 본교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교섭의 형식과 절차를 명확히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일반적인 잠정합의서의 경우 조합원 총회에서 통과되기 전까지는 날인을 하지 않는다. 만약 조합원 총회에서 부결될 경우, 회사가 서명된 합의안을 빌미로 재협상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노조 지도부의 직권조인을 견제하는 측면도 있다. 협행법에는 이 같은 총회 인준권 조항이 위법하다고 보고 있지만, 민주노총 등의 노동계에서는 조합민주주의 원칙상 이것의 정당성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4월 17일 합의 이후, 삼성을 바꾸고 세상도 바꿀까
직접고용 합의라는 첫 단추를 꿴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현재 조직 확대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초기에 조직 확대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사측 주도의 복수노조 설립이나 비노조원을 상대로 한 회사의 포섭전략 등 역공이 들어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합의 이후 전국에 있는 지회 간부들은 연차를 내고 조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4월 22일 기준 약 350명의 신규 조합원이 가입해, 1천명으로 조합원이 확대됐다. 현재 지회는 삼성전자 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 5천5백여 명을 1차 조직화 집중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후 파견직 콜센터 직원 2천명, 간접영역 노동자 2천명 등 1만명을 대상으로 조직화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향후 교섭과정에서는 직접고용 방식을 둘러싸고 노사가 대립할 가능성이 크다. 성과급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과 직접고용 전환 시기 및 규모, 방법 등 논의 의제도 산적해 있다. 사측이 별도의 직무, 직군을 분리해 기존 정규직과의 임금차별을 두는 직고용 방식을 들고 나올 우려도 있다. 오기형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정책위원은 “삼성전자서비스가 보도자료를 통해 자신들이 자회사 방식이 아닌 직접고용 방식을 택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자회사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지만 이중임금체계 등의 이야기를 들고 나올 가능성은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계열사 노동조합들과 삼성 자본을 상대로 한 투쟁계획을 어떻게 그려나갈지도 관건이다. 현재 삼성그룹에는 삼성전자 서비스지회도 이외에 삼성지회, 삼성웰스토리지회, 삼성에스원 노조 등이 존재한다. 이들 노조들은 여전히 노조 불인정과 복수 노조를 악용한 노조 탄압 등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웰스토리 의지회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돼 있지만, 사측이 직접교섭을 피하기 위해 경총에 교섭권을 위임해 논란이 됐다. 민경민 금속노조 미비국장은 “오는 5월 4일 삼성지회, 삼성 웰스토리, 삼성전자서비스, 삼성에스원 등 4개 노조 지회장들 공동 회의가 있고, 12일에는 간부 수련회가 준비돼 있다. 이 자리에서 공동 대응 등의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워커스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