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다음 날인 지난 10일, 광화문 광장엔 일곱 번째 촛불의 밤이 밝았다. 최대치를 찍은 직전 집회의 절반 규모라 해도 여전히 80만이다. 모여든 얼굴들에선 자신감과 여유가 묻어났다. 일명 ‘박사모’도 등판했다. 같은 날 일찌감치 종로 일대를 행진하며 ‘탄핵 반대’를 외친 참이다. 세종로 사거리에서 메가폰을 잡은 나에게도 한 노인이 다가와 호통을 쳤다. “다 탄핵이 됐는데 왜 또 난리야?” 바야흐로 제2막이 열렸다.
물론 질문이 잘못됐다. 지난 7주간 광장에 울려 퍼진 구호는 박근혜 탄핵보다 하야와 구속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구호는 여야 힘겨루기의 결과를 따르겠단 대통령의 꼼수가 나온 이후 ‘즉각 퇴진’과 ‘박근혜 정권 끝장내자’로 강경해지기도 했다. 내게 시비를 건 노인은 아마 ‘박사모’ 중 하나였을 게다. 어째 신경이 쓰이지 않아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늘 이 작은 호통이 조만간 촛불이 맞을 혹독한 국면의 데자뷔면 어쩌지? 그때도 과연 무시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다수가 아닌 때에도?
지난 7주간 촛불 민심은 박근혜가 울먹이고 새누리당 ‘막말러’들이 숨죽이며 조선일보가 전전긍긍하는 비상한 장면을 끌어냈다. 야권이 늦게나마 탄핵을 결심한 것도 다 촛불의 힘이었다. 이 모든 요소가 가장 깔끔한 기술적 종합을 이룬 결과가 바로 9일 탄핵소추안 가결이었다. 자연스럽게 10일 광장에는 끝내 이겼다는 환호와 이제 시작이라는 다짐이 뒤섞였다. 다만 무엇의 끝이고 무엇의 시작인지는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광장의 정치를 모색했으나 무관심 또는 경찰에 막혀 온 사회운동 진영은 전국의 광장을 메운 이번 인파에 가슴이 다 뻥 뚫렸을 것이다. 찬밥신세였던 깃발이 만인에게 반겨지고 즐겨지는 분위기에선 희망을 보았을 것이고, 마침내 열린 광장에서 자신들의 의제를 알리는 데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촛불 집회 주최 측 역시 ‘재벌도 공범’, ‘이재용을 구속하라’라는 구호는 물론 ‘비정규직 철폐’, ‘노동개악 반대’ 같은 기존 사회운동의 구호를 받아 안으며 확전을 꾀했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이 이끈 사전 집회와 방송 차량은 본 집회와 묘하게 괴리되는 느낌을 주었다. 자신을 노조원, 비정규직, 알바생으로 소개한 이들도 대개는 공정성 화두에 할애된 무대 발언을 했다. 때마침 최장기간 파업을 이어가던 철도노조는 시위대의 큰 환호를 받았지만, 그 존재감이 대중적 분노 위에 성과연봉제, 낙하산 사장, 민영화, 외주화 문제를 얹을 만큼은 못 되었다.
물론 이번에 극적으로 드러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와 직접적 연관성이 떨어지는 만큼 노동 서민 의제가 당장 주도권과 파급력을 갖기는 힘들다. 이달 초 국민일보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이번 게이트는 무엇보다 공정하고 부패 없는 사회를 향한 국민적 열망에 기폭제가 된 게 분명하다.
말하자면 청와대가 재벌과 거래했단 추정은 매우 합리적이지만, 그 정황이나 당사자들의 모르쇠가 최순실의 태블릿PC보다 충격적이지는 않다. 태반주사 의혹만큼 황당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익숙한 적폐이자 우리가 몸담은 세계 그 자체로까지 느껴진다. 그렇다 보니 청와대와 재벌의 유착을 박정희-박근혜 체제의 연속성 문제로 규정하려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이 적폐가 특정 정치 유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청와대라는 쉽고도 확실한 창구를 통해 노동자 민중을 더 많이 쥐어짜고 이윤을 더 많이 쌓고 사회적 부를 더 많이 독점하려는 자본가와 자본주의의 본질에 기인하는 거라면 어떨까?
어려운 이론 얘기가 아니다. 그간 우리네 가족과 이웃이 살아온 경험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노동자와 서민은 경제가 위기라고 선전되고 협박되는 성장 둔화의 국면마다 삶의 수준과 그에 대한 기대를 함께 낮추도록 강요받았다. IMF 위기 때가 그랬고, 또 지금이 그렇다. 12일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6’에 따르면 현재 우리 국민의 20%는 자신을 최하층민으로 여기고 60%는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모두 IMF 위기 전에 비해 크게 악화한 수치다. 실제로 지난 5년, 10년, 20년 동안 더 팍팍해진 삶과 해고, 실업, 가계부채, 산재, 여타 경제권 박탈로 내몰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아픈 상처가 건드려지고 울분이 치미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을 터다. 아울러 2012년 박근혜가 글로벌 경제 위기라는 악재 속에서 복지 확대와 경제 민주화를 약속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사실을 기억해낸다면, 그 상처와 울분이 개인사적 불운이나 무능이 아니라 정부의 기만과 무의지 탓이라는 점 역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탄핵 이후를 위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유신 체제에서 87년 체제로 나아간 정치 투쟁의 교훈만이 아니라, 97년 IMF 구조조정 이후 다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본 축적의 동력을 떠받친 대다수의 신음 어린 삶이기도 하다.
97년의 위기를 틈타 노동 유연화라는 수혈을 받아낸 대자본은 이제 또 위기를 운운하며 대대적인 노동법 개정과 규제 완화를 꾀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재벌 총수들을 청문회에 세우고 잠깐의 망신을 주는 거로는 많이 부족하다. 이번 게이트 수사가 종결되고 촛불 정국이 마무리된 다음에도 우리는 대기업들이 지금의 경제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엄격히 감시하고 직접 요구하고 필요하면 협박도 불사해야 한다. 노동자 민중에게 이것은 이재용이 청문회 도중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라고 답한 수준의 훈계나 타박의 문제가 아니다. 절박한 삶과 죽음의 문제다.
촛불에서 경제 개혁의 에너지를 길어내기 위해 지금 당장 쌓을 수 있는 블록은 뭘까? 먼저 광장이 우리의 것임을 선언해야 한다. 이번처럼 특종과 결정적 증거가 우리 앞에 놓이지 않더라도, 세월호 유가족 같은 참담한 희생자이자 투사가 없더라도, 압도적 다수가 단번에 합심하는 속도전이 없더라도, 경찰의 차벽과 물대포가 다시 나타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광장의 정치를 기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광장에서 대한민국을 움직였단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선포하고 그 자부심을 집단 기억으로 확립해야 한다.
광장이 우리의 것이란 선언은 다가오는 싸움을 위한 대비 태세기도 하다. 《워커스》 지난 호(27호)의 표지 제목은 ‘Winter is coming(겨울이 온다)’였다. 엄혹한 계절이 오고 있으니 대비하란 뜻을 담았다고 한다. 마침 탄핵소추안 발의 시점부터 조선일보는 연일 사설을 통해 “국가의 나침반은 법치뿐”, “안보, 경제 진짜 위기”를 강조하고 나섰다. ‘법치’, ‘안보’, ‘경제’를 하나씩 뒤집어 보면 지금 수구 세력이 “불법 종북 좌파”를 입안에 굴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맞서 광장의 정치에 더 많은 의제를 모으고 토론해야 한다. 지금의 기세를 몰아 청와대, 재벌, 국회, 검찰의 정치를 압박해야 한다.
이번 촛불 정국의 담론들은 앞으로 광장에서 함께 할 우리가 누구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미 거론하기도 했다. 《워커스》 26호는 대기업의 어두운 재단 활용법을 폭로한 기사에 “최순실에 간 재벌 기부금, 우리 것이어야 했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5차 촛불 집회가 열린 날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반올림, 사회진보연대 등이 주최한 ‘삼성 이재용-최순실 게이트 시민법정’을 보도한 <미디어오늘>은 “검찰이 안 하면 우리가 한다, 이재용은 유죄”라는 제목을 지었다. <참세상> 기고에서 명숙 사랑방 상임활동가는 “우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 자연스럽게 ‘우리’를 부르고 있다.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하나의 끝이자 시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다. 누군가는 새로운 조직화와 실천을, 또 누군가는 더 나은 언론과 기사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은 매년 돌아오지만 당하기만 하란 법은 없다. 대비하고 돌파해야 하는 게 또 겨울이다. 부디 자신감을 갖고 임하자. 우리는 박근혜를 탄핵하고 청와대-재벌의 견고한 체제를 무너뜨릴 사람들. 바로 세월호 세대, 구의역 세대, 박근혜 퇴진 세대가 될 것이다. (워커스 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