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과 대선사이
국회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로 넘어 가면서 여야 정치권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헌재가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면 그날부터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다하더라도 12월에는 대선이다. 그러니까 빠르면 3월, 늦어도 12월 사이에 대선이 있다. 이렇듯 대선인 듯 대선 아닌 시간이 당분간 계속되겠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는 탄핵이 확정돼야 진행할 수 있다. 당내 후보 경선도 탄핵 결정 직후 곧 바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60일 안에 후보 경선과 대선 선거운동을 다 마쳐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실제 동력이 광장에 나온 촛불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즉각 퇴진과 구속 수사를 촉구하며 지난 7주 동안 쉼없이 거리로 나온 촛불이야말로 현재 국면의 최대 변수이며, 정세를 움직이는 최대 동력이다. 거국내각, 2선 후퇴, 예고 하야, 즉각 퇴진, 탄핵 등 수차례 입장이 오락가락하던 야당과 새누리당 비박계의 주도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지만 이들도 촛불민심이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7주 동안 750만 명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 즉각 퇴진을 외쳤는데, 정치권이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대선 구도를 펼칠 수는 없는 일이다. 뭔가를 해야 하는데, 준비된 것이라고는 2012년 대선에서 보여준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얘기들뿐이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개악이나 경제살리기에 대해 국민의당이나 더불어민주당도 정책적인 차이가 크지 않다. 구조조정 시 재벌 특혜지원 논란을 낳았던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스리슬쩍 통과됐고, 노동개악 비판을 받는 양대 지침(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도 노동자들만 총대를 맸다. 특히 재벌지배 경제구조나 사회구조의 변화를 예견하기는 어렵다. 어느 당의 정책을 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언사만 거칠어지고 있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촛불항쟁 이후 각각 적폐 대청소와 정치혁명을 말하고 있지만 구두선에 그치고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촛불 여론에 편승해 기대주로 부각했지만 여전히 많은 검증을 거쳐야 하고, 그 조차 민주당원일 뿐이다.
역시 관건은 촛불의 역할이다. 촛불이 단순히 탄핵과 대선 과정을 감시하는 감시자의 역할에 머문다면, 대선 역시 별다른 변화 없이 ‘평화롭게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촛불이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아 움직인다면 대선 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대선후보로 급부상한 것도 촛불이 기성 후보를 대신할 대안을 찾아서 움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들끓는 마그마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솟구치면서 지각을 움직이는 것처럼, 수백만 촛불의 기운이 언제 어디서 분출해 판을 바꿔 놓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개헌, 찻잔 속 태풍?
대선으로 가는 길목의 큰 변수 중 하나는 개헌이다. 개헌은 애초부터 정치권의 요구였다.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중임제 개헌을 얘기한 이래, 지난 10년 동안 권력구조 개편 개헌 시도는 계속해서 존재했다. 또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요구가 개헌으로 모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개헌은 촛불의 요구가 아니다. 대통령 임기가 남은 상태에서 즉각 퇴진을 요구한 것 자체가 헌법을 초월한 주장이며, 그 맥락에서 촛불은 개헌도 초월한다.
개헌론이 주로 정치권의 관심사라는 점은 개헌이 정치개편, 정계개편과 떼려야 뗄 수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려준다. 특히 이번 국면에서 개헌은 다른 무엇보다 보수재편과 맞물려 있다. 당장, 탄핵연대를 구성했던 민주당-국민의당-비박연대에서는 개헌을 둘러싸고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고 있다. 대선후보 1순위인 문재인은 개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거듭 개헌에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적폐에 대한 대청소와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기정권의 몫으로 개헌문제를 뒤로 미뤄야 한다는 논리를 명확히 했다.
반면, 국민의당 인사들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문 전 대표와 친문 진영을 향해 “개헌파를 공격하는 호헌파”라고 공격하며 정면충돌했다. 특히 손학규 전 대표는 “87년 체제 속에 대선을 치르자는 측은 한마디로 기득권 세력으로, ‘제2의 박근혜가 나와도 좋다, 나만 대통령이 되면 된다’는 말”이라며 “호헌세력의 진면목”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제7공화국을 위한 ‘국민주권 개혁회의’을 만들겠다며 비문 세력화에도 시동을 걸었다.
박근혜 게이트 이후, 개헌은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 몰락의 대안으로 형성될 보수대연합의 물질적 기초가 됐다. 조선일보는 친박과 박근혜를 버리고 보수혁신을 통한 보수대연합을 추구했고,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보수대연합의 조건으로 봤다. 하지만 거리의 촛불은 수그러듦 없이 완강하게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고, 탄핵 심판이 진행되면서 개헌에 기댄 보수대연합 형성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다. 그럼에도 개헌 논쟁은 새누리당의 향배가 결정되면 더 격렬해질 것으로 보인다. 소위 비박계가 당권을 잡아 당명부터 모든 것을 다 바꾸든, 아니면 탈당해 보수신당을 만들든, 유력한 대선후보가 없는 한 대선 판에 끼어들 여지가 개헌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남은 변수인 반기문의 행보가 개헌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힐지에 따라 개헌프레임은 한층 복잡해 질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개헌연대를 통해 제3지대론의 가능성이 보이면 개헌은 더 적극적인 요구로 분출될 가능성이 있다.
직접 민주주의의 시간들
촛불의 명시적인 요구는 박근혜 정권 퇴진이다. ‘퇴진’ 요구는 단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뿐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 구축해 놓은 모든 적폐를 일소하는 것, 나아가 구체제를 해체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12월 10일 7차 범국민행동까지 연인원 750만 명이 정권퇴진을 외치며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촛불집회를 관리했던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퇴진행동)은 탄핵과 즉각 퇴진에 대한 압박과 박근혜 적폐를 청산 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퇴진행동이 내 놓은 적폐청산을 위한 6대 과제는 세월호 진상규명, 백남기 특검, 국정교과서 중단, 언론 독립, 성과퇴출제 중단, 사드배치 중단 등이다. 주로 현안 해결에 집중해 있다.
그러나 박근혜를 끌어 내리고 몇몇 현안을 해결하는 것으로 현 상황이 마무리 될 수도, 마무리 할 수도 없다. 법률과 헌법을 초월하고 정치적 위탁과 대리를 넘어서고자 했던 직접 민주주의의 시간은 계속 확장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과 대통령이라는 정치 대리인을 뽑는 시간 속에서도 이 직접 민주주의의 열망은 감시와 견제라는 고전적 역할을 넘어, 새로운 체제에 대한 변화의 요구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대표를 뽑아 시민의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또 다른 대리주의와 ‘완장 질’로 비판받으면서 중단됐다. 각 대학교에서 시국선언문도 총학생회나 학생단체에 일임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 구성원 개개인들의 참여로 새롭게 다시 쓰여 졌다. 이른바 직접 민주주의의 시간은 광화문을 넘어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확대되고 있다. 촛불이 한국사회 변화를 위한 정치적 열망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문제는 퇴진과 구체제의 해소 이상의 요구와 전망을 아직 촛불 스스로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박근혜를 당장 물러나게 하고 눈앞에 보이는 적폐들을 해소하는데 전력했지만 그 이상의 요구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여러 이유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구체제의 해소 앞에서 촛불은 하나일 수 있지만, 새로운 사회에 대해서 아직까지 촛불은 하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촛불이 적폐와 구체제를 일소하고 바로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수백만 촛불의 열기는 탄핵 심판 과정에서 다소 잠잠해질 수 있지만, 일차적으로 대선을 통해 모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아직 대중적 관심이 크지 않고, 주류정치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는 진보민중진영의 움직임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들은 보수 야당에 촛불의 성과를 헌납할 수 없다며 독자적인 대선대응 계획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 돌풍과 유럽 좌파 정당의 약진에 비견할 수 있는 움직임이다. 특히 민주노총은 이번 대선에 이른바 민중경선을 통한 민중진영 단일후보를 추진하고 있다.
확장된 직접 민주주의의 공간 속에서 진보민중진영이 대선이라는 과정에 결합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거가 사람 하나 뽑는 과정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새롭게 재구성할 동력과 근거를 만드는 과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촛불의 사회, 정치적 요구를 확대하고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와 결합한 선거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