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이 12월 2일 탄핵 표결을 강도 높게 예고한 상태에서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가 아닌 대정치권담화(정두언 말대로 대비박계 담화다)를 내놓았다. 예상대로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지 않고 임기 단축을 포함한 퇴진 문제를 모두 국회에 맡기겠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좁게는 며칠 후로 예정된 야권의 탄핵절차를 중지시키고 야권의 탄핵 절차에 동의한 새누리당의 비박계를 원 위치시켜 새누리당을 재건하고 개헌과 대선 시나리오를 이어나가겠다는 뜻이다. 또한 아주 좁게 말하면 조기 하야를 요청한 서청원 등 친박들의 건의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 친박 ‘폐족’ 사태를 막고 국회에 책임 떠넘기기를 통해 내년 중반기로 예상되는 대선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고착방정식 꼼수가 숨어 있다. 먼저 헌법 70조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5년이고 중임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임기 단축을 하려면 개헌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하야는 위헌이므로 개헌을 해서 임기 단축을 해주면 물러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임기를 다 채우겠다는 꼼수다. 박근혜 퇴진을 요구했던 촛불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가 어떤 협상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은 것’이다. 국회가 대통령의 생살여탈권을 ‘줘도 못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던진 폭탄에 벌써 새누리당 친박은 탄핵 유보를 주장하고 있고 탄핵 정국은 주춤거리고 있다. 여기서 당장 탄핵 불발이냐 탄핵이냐 하는 두 가지 변수가 등장한다.
유승민 등은 여야 합의 없으면 탄핵으로 간다고 하지만 새누리당 의총에서 탄핵 의결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을 보면 새누리당 비박의 회군도 가능하다. 벌써 대국민담화 이후 10명이 회군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탄핵 칼자루를 쥐고 있는 김무성은 침묵하고 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이 탄핵 불발을 우려하지만, 비박이 회군하던 안 하던 중요한 것은 탄핵 성사 여부가 아니다. 탄핵이 성사되던 불발로 끝나던, 대통령이 던진 폭탄에 맞아 정치권은 ‘탄핵연대’에서 ‘개헌연대’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다. (편집자주 – 대통령의 3차 담화 이후, 12월 2일 6차 범국민행동에 역대 최대 인파인 232만 명이 참가함으로써, 4월 퇴진이나 임기단축 개헌 등 질서 있는 퇴진론은 거부되고 급속하게 탄핵으로 기울고 있다.)
탄핵이 성사되면, 몸값이 올라간 비박은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재편과 대선시기를 조절하자고 요구하면서 비박-국민의당-비문 연대를 추진할 것이고 이것은 개헌연대로 옮아갈 것이다. 만일 탄핵이 불발돼도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4년 중임제를 놓고 여야가 허송세월하겠지만, 내년 1월 반기문 총장이 국내에 들어온다면 개헌연대 움직임이 그때 가시화될 것이다. 남경필 등이 새누리당을 탈당하기도 했지만 비박이 친박과 재합성할 필요도 없다. 문재인도 정치공학상 대통령 즉각 퇴진이 자신에게 유리하기에 탄핵 절차를 다소 꺼려 왔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의 폭탄은 소위 말하는 제3 지대로 옮겨 가게 되고 이곳에 개헌파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는 탄핵 정국이 파국을 만든다는 이유로 2선 후퇴를 요구했는데 이 또한 개헌연대를 부채질하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대통령의 3차 담화가 나오기 전인 11월 9일에 이미 “朴대통령 ‘다 내려놓겠다’ 선언하는 게 낫다”는 사설을 내놓았다. 20일 만에 우리는 대통령 담화에서 ‘다 내려놓는다’는 담화를 데자뷔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대통령에 대해 갑질을 하는 것이든, 최순실처럼 지시를 내리는 것이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든, 형국은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보수대연합 쪽으로 가고 있다.
애초부터 탄핵 얘기는 없었다. 권력을 잡는 데 혈안이었던 더민주당, 국민의당, 비박이 촛불에 떠밀리고 박 대통령에 떠밀려 탄핵정국이 생긴 것뿐이다. 탄핵의 성사나 불발은 보수대연합을 구축하는 데에는 큰 영향이 없다. 탄핵이 불발로 끝나더라도 비박계는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국민의당, 비문계와의 네트워크를 끊을 이유가 없다. 탄핵연대가 무너진 마당에 국민의당이나 비문계도 살길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 반기문이 가세하면 금상첨화다. 문재인은 애초부터 대통령이 하야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애써 뭉개며 지금까지 왔다. 개헌연대를 통한 권력구조 재편을 막을 수 있는 역량 또한 문재인에게는 없다. 친박을 청산대상으로 삼고 진짜 보수의 불씨를 살리려고 하는 조선일보의 보수대연합 프레임은 이미 한 달 이전부터 가동되고 있었다.
보수대연합의 대선 구도는 짜였다. 비박계-국민의당-비문과 문의 대립구도가 구축된 것이다. 반기문, 이재명, 박원순 등은 촛불에 따라 움직일 것이고 개헌과 대선 일정은 속속 다가올 것이다. 박근혜 이후에 촛불과 진보세력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제헌헌법은 유토피아다. 진보세력에 의한 촛불 헌법, 촛불 국회도 상당히 난항을 겪을 전망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촛불은 그래도 평화를 지킬 것인가. 노동자 파업의 존재감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정세에서 반전을 꾀할 수도 없다. 개헌연대 카드로 보수지배세력들이 위로부터 정치적 반격을 가하는 시대에 평화는 진압(pacification)의 별칭이고 보수대연합을 허용하는 보수대연합의 평화일 따름이다. 촛불은 평화의 이름으로 진압당하고 있다. (워커스 27호)
이득재(대구가톨릭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