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영화를 좋아하는 인권활동가)
영화든 텔레비전이든 법정드라마가 한창이다. 법정드라마의 매력은 치열한 법정 공방만이 아니라 증거를 확보해가는 고군분투와 사건을 만든 부조리한 사회현실이 폭로된다는 점이다. ‘법’을 피해 살 수 없는 현대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정드라마는 관객을 다른 사회구성원과 연계시키며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도록 이끈다. 영화 속 세상과 현실이 오버랩 되며 관객들은 정의감에 차오른다.
그래서 법정드라마는 긴장감이 있는 플롯만으로는 선과 악, 암투와 조작이라는 뻔한 서사로 귀결되기 쉽다. 그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그렇듯, 결론이 아니라 영화에서 보여주는 폭력의 사회구조,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매력이다.
사유 없는 정보가 도달할 수 없는 진실
최근 개봉한 믹 잭슨 감독의 영화 <나는 부정한다>가 입소문을 타고 있다. 유대인학살의 진실을 법정에서 규명하는 드라마다. 일본군 위안부 사건을 부정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나, 518 광주 학살을 부정하는 전두환 독재세력이 기세등등한 한국현실 탓에 공감하기 쉽다.
1994년 영국인 역사가 데이비드 어빙(티머시 스폴)이 홀로코스트 연구의 대가인 미국인 역사학자 데버러 립스타트(레이철 와이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며 사건은 시작된다. 홀로코스트가 없었기에 그를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로 비판한 립스타트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선 미국과 달리 원고인 어빙이 아니라 피고인인 립스타트가 홀로코스트 존재 사실을 입증해야한다. 그는 립스타트의 강연장에서 “누구든 홀로코스트의 증거가 되는 문서를 가져오세요!”라고 외쳤듯 법정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인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학살을 위한 가스실이 있었는지, 가스실이 있더라도 그것이 학살을 위한 것임이 증명되지 않는 한 그건 진실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어빙이 말하는 증거는 이른바 아우슈비츠 학살 관련 문서(정보)다. 그러나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는 진실에 도달하기 어렵다. 철학자 한병철이 《타자의 추방》에서 말했듯, 정보를 대규모로 모아둔 빅데이터에도 지식은 들어있지 않다. 정보(사실)간의 상관성은 알 수 있으나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사유 없는 정보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의 결합이 만들어낸 학살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사유하지 않을 때 역사는 ‘증거 찾기’로 매몰되고 진실은 뒤바뀔 수 있다. “(가스실의 존재를 증명하는) 구멍이 없었으니 홀로코스트도 없다”는 신문 헤드라인이 나오는 영화 장면이 단적인 예다. 최근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개별 경험(또는 정보)에 기반한 팩트 논쟁이 답답한 이유다. 특정한 입장에 강박돼 사유하지 못하는 정보는 사건성을 띄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광주학살을 ‘북한의 도발’로 몰기 위해 피해자얼굴의 특징을 일부만 왜곡하는 자료나, 역차별을 강조하기 위해 ‘연애할 때 돈을 내지 않는 여성 경험’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법정드라마이니 증거 찾기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법적 언어가 지닌 ‘합리적 이성’과 ‘대리주의’를 강변하고 있어 불편하다. 실제 법정 투쟁이 어찌됐는지는 모르지만 영화에서 고소된 역사학자도, 아우슈비츠 피해생존자도 말할 수 없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판결이 불리하게 날 수 있다며 그녀들의 입을 막았다. 립스타트는 생존자에게 ‘아픔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했지만 법 논리를 강조하는 변호인단에게 눌려 지킬 수 없었다. 피해자의 경험은 ‘감정’으로 치부되고 변호사의 말하기는 ‘합리적 이성’의 상징이 된다. 수용소에서 겨우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 피해생존자는 증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이것이 합리적 이성의 세계가 틀어막은 진실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존재가, 그녀들의 증언이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국주의 전쟁의 젠더폭력의 참상을 만천하에 폭로했음을 우리는 안다. 역사에 진실이 기입될 수 있었던 건 피해자들의 목숨을 건 외침 덕이며 이것을 들은 사람들의 손잡음이다. 영화에서 재판이 끝나고 립스타트가 피해생존자의 손을 잡았듯, 들리지 않는 소리를 잡기 위해 우리가 손을 뻗을 때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혹여나 <나는 부정한다>를 본 관객들이 역사는 감정과 신념의 산물이 아니라거나 거짓을 누르기 위해서는 감정을 억눌러야한다는 결론에 이를까 두렵다. 우리의 삶은 감정과 이성의 총체이고, 진실은 역사적 배경과 맥락 속에 존재하기에 사유 없는 개별 사실의 나열로는 도달하기 어렵다.
그에 비해 김태윤 감독의 <재심>은 약간 다르다. 2000년 발생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실화인 영화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10년 옥살이를 한 조현우(강하늘)의 삶을 짓밟은 사법구조(경찰의 강압수사, 증거조작)를 폭로한다. 재심에서 나온 무죄 판결은 조현우에 대한 진정한 사과일 수는 없어도 국가의 사과를 받는 첫발이다. 이 영화에 끌렸던 이유는 조현우가 누명으로 겪은 고통의 서사가 법정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국가폭력의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법정 영화는 현실을 잘 재현하든 못하든 사법체계의 음울함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되묻는다. 법의 언어를 뛰어넘는 진실규명은 불가능한 가라고.[워커스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