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옷자락을 흔드는 바람이 시원하다. 한낮의 햇살이 뜨겁지만 가림막 하나면 충분하다. 야외에서 영화보기 참 좋은 계절. 해마다 5월말 6월초면 서울인권영화제가 열린다. 이명박 정부 출범이후 사실상의 사전검열인 영상물등급분류위원회 심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극장을 대관하지 못해 거리 상영을 한 지 벌써 10년째다.
‘불온하라, 세상을 바꿀 때까지’라는 슬로건을 걸고 6월 1일부터 열린 22회 서울인권영화제는 보고 싶은 영화들로 가득했다. 좋은 영화들이 많아 간만에 호사를 누렸다. 그 중에서도 내 가슴을 뛰게 한 건 폐막작인 <씨씨에게 자유를!>(2016, 재클린 가레스)이다. 미국의 흑인 트랜스여성에 대한 폭력과 그녀의 저항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정상성을 증명하기 위한 폭력
영화는 힘 있고 빠른 배경음악과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영화의 메시지와 맞닿는다. 흑인 트랜스여성이 어떻게 세상에 목소리를 내게 되는지, 여러 소수자들이 공명하며 함께 힘을 키워가는지 담았다.
흑인 트랜스여성인 주인공 씨씨는 친구들과 길을 걷다 백인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처음에 그들을 희롱하던 백인 남성이 씨씨가 트랜스여성임을 알게 된 후 혐오는 더욱 거세진다. 영화 속 전문가의 언급처럼, 그 가해남성은 자신이 혹했던 여성이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한 것이다. 자신의 끌림 때문에 ‘정상적 남성성’이 훼손된 것은 아닌지, 혹은 자신의 남성성이 ‘정상적 기준’에 벗어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려는 듯 더 큰 혐오폭력을 행사한다. 실제 한국에서도 2010년 남장여자임을 뒤늦게 알고 격분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변명한 사건이 있다. 흔히 가해자들은 그녀가 트랜스젠더임을 몰라 혼란스러워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죄일 뿐이라 말한다.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혼란스러운 일일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남과 여, ‘이분법적인 성별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가 자라난다.
‘정상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두 개의 성에 포괄되지 않는 트랜스젠더는 이물질이자 사회를 오염시키는 존재로 여겨진다. 경계를 흐리는 존재 또는 구획을 넘나드는 존재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타자화와 그로부터 발생한 불안으로 혐오는 더 격해진다. 게다가 그녀는 흑인이다.
살인자가 아니라 생존자
도망치는 씨씨를 뒤쫓던 백인 남성은 겁에 질린 그녀가 들고 있던 가위에 찔려 사망한다. 어떻게 그가 죽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언론에는 흑인 남성이 살인했다고 보도된다. 그녀가 아니라 ‘그’(he 또는 man)로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남성 전용 감옥에 갇혔다. 그녀의 성정체성은 그렇게 숱하게 삭제된다.
이를 알게 된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씨씨의 석방운동을 전개한다. 만약 그녀가 자기를 방어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살인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씨씨의 석방운동을 하는 트랜스젠더활동가들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외친다. “필요하다면 가위를 들고 맞서세요!” 이 연설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마음이 뒤숭숭했다. 혐오에 맞서 싸워 감옥에 갈 것인가, 혐오에 무기력하게 맞아 죽을 것인가!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는 현실은 얼마나 참혹한가.
그들만의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감옥
전 세계 시민들의 석방운동으로 그녀는 1급 살인죄에서 과실치사로 감형된다. 그녀는 출소 후 유색인종 트랜스젠더 인권을 옹호하는 활동가로 거듭난다. 감옥폐지운동도 한다. 그녀가 감옥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적인 통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른 수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반바지도 입지 못했다.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그녀의 몸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2006년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자교도소에 수용돼 있다가 여성용 내의와 호르몬치료 요구가 거절당하자 자신의 성기를 절단하며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제12조는 ‘남성과 여성은 분리하여 수용한다’라고 규정돼, 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이다. 남녀라는 성별로 확고하게 구분된 한국의 구금시설에서 트랜스젠더 수용자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맞는 진료나 옷에 대한 요구는 배제당할 뿐 아니라 교도관과 다른 수용자들로부터 차별과 괴롭힘까지 겪는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트랜스젠더는 ‘사회’의 바깥이다.
한편, 씨씨가 불사조 의상을 입고 화보촬영을 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런 문구가 있다. ‘누구의 페미니스트인가?’ 그것은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차이를 무화하지 않는 페미니즘, 소수자의 시선과 입장을 견지하는 페미니즘이 ‘정상’을 만들어내고 ‘정상’을 훈육하는 가부장적 남성권력이 가하는 혐오에 맞설 수 있다.[워커스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