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무차장)
4월 11일 새벽 5시. 울산 성내삼거리 고가도로 높이 15m 교각 위에 두 사람이 올랐다. 이들은 제일 먼저 교각 앞뒤로 길이 12m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현수막에는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 대량해고·구조조정 중단’과 ‘비정규직 철폐, 블랙리스트 분쇄, 하청 노동기본권 보장’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두 사람의 이름은 이성호, 전영수.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이자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다. 두 사람이 일하던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동양산업개발은 이들이 교각에 오르기 이틀 전인 4월 9일 폐업했다. 동양산업개발에서 일하던 노동자 57명 중, 조선소가 지긋지긋하다며 떠난 이들과 하청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들은 모두 다른 사내하청업체로 고용 승계됐다. 그러나 두 사람을 포함해 4명의 조합원들은 고용 승계에서 배제됐다. ‘블랙리스트’ 때문이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은 조선업 경기불황을 핑계로 2015년부터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이미 그 전부터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도급대금(기성금)을 삭감해왔다. 이로 인해 하청업체들의 폐업이 줄을 이었고 2015년부터 지금까지 2만 명이 넘는 하청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청노조 조합원들은 블랙리스트에 걸려 다른 하청업체로 이직조차 할 수 없었다.
현대중공업의 블랙리스트, 하청노조 탄압은 역사가 깊다. 2003년 현대중공업사내하청노동조합 설립 직후 현대중공업은 하청업체의 폐업을 유도해 조합원들을 공장 밖으로 내쫓았다. 현대중공업이 한 짓은 2010년 대법원에서 ‘부당노동행위’로 최종 판결을 받았다. 근로기준법 상 사용자가 아닌 원청이 노조법상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당사자로 인정된 의미있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판결은 부당노동행위가 있은 지 7년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게다가 현대중공업은 조합원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다른 사내하청업체는커녕, 다른 조선소로의 이직조차 가로막았다. 때문에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에게는 ‘하청노조 가입하면 업체 폐업되고 다른 업체나 다른 조선소에도 취직 못 한다’는 두려움이 깊게 새겨졌다. 그로 인해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오랫동안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수만 명이 일하는 공장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기 위해 싸웠다. 2013년에는 조합원 가입 범위를 현대미포조선까지 확대했고, 2014년에는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12개사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2015년에는 원청 현대중공업노동조합과 함께 ‘하청노조 집단가입 캠페인’을 벌였고 2016년에는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교섭도 요구했다. 그러나 하청노조의 힘이 커지는 만큼 자본의 공격도 거세졌다.
2015년 4월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KTK선박이 폐업했다. 사장은 기성금 받아 빚 갚고 나니 남는 게 없다며 밀린 임금과 퇴직금은 체당금으로 해결하라고 했다. 하청노동자들은 원청 현대미포조선을 찾아가 체불임금과 고용 승계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원청 현대미포조선은 하청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이들을 공장 밖으로 내쫓았다. 100여 명의 노동자 중 4명이 남아 투쟁을 했다. 그 중 한 명이 이성호였다.
▲ 전영수(좌), 이성호(우) [출처] 전국금속노동조합 현재중공업사내하청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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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는 1970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나와 부산의 한 인쇄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거래처에서 회계를 보던 아가씨와 연애를 했고 6개월 만에 결혼했다. 99년 첫 아들이 태어났고 2001년 둘째 딸이 태어났다. 10년 넘게 같은 일을 하니 직접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부도난 인쇄소들이 있었다. 기계들이 싸게 나왔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사업이 1년 만에 부도가 났다. 첫째가 5살, 둘째가 3살이었다. 괴로워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는 형님이 그에게 조선소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구미의 처형 집에 남겨놓고 울산으로 와 현대중공업에서 조선소 일을 시작했다. 물론 하청노동자였다.
2011년에는 현대미포조선으로 옮겨갔다. 그러던 중 그가 일하던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KTK선박이 폐업을 했다. 함께 일했던 김영배, 현재창, 김규엽과 함께 현대미포조선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형 집에 얹혀 살고 있는 가족들이 눈에 밟혔다. 결국 그는 끝까지 함께 하지 못 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투쟁을 접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낚시를 하려고 바닷가에 앉아있으면 농성자들이 틀어놓은 투쟁가가 들렸다. 다시 달려가고 싶었지만 미안한 마음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2015년 11월 KTK 투쟁이 끝났다. 김영배는 투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복직이 거부됐지만 현재창, 김규엽은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로 복직했다.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현대미포조선에서 일하며 알고 지내던 동생 오종환이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했다. 2015년 11월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환창기업에 입사했다. 오종환이 알고 지내던 전영수에게도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장생포공장 하청업체로 복직한 김규엽 형님도 환창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오종환, 이성호, 전영수, 김규엽이 함께 일하게 됐다.
전영수는 1975년 부산에서 3형제 중 막내로 자랐다. 대학에선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제대하고 보니 IMF 외환위기로 먼저 취직했던 선배들도 일자리를 잃은 상태였다. 다행히 작은 형의 소개로 넥센타이어 공장에 정규직으로 취직했다. 벌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었다. 이런 저런 사업에 손을 댔는데 처음에는 재미가 좋았다. 한 달에 몇 백씩 벌고 썼다. 그러나 결국 사업은 망했고 직장까지 그만둬야 했다. 신용불량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사람들이 일하기 꺼려하는 염색공장에 들어갔다. 첫 월급이 70만 원이었다. 게다가 너무 위험했다.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영수는 2005년 STX에서 물량팀으로 일하던 큰형과 함께 조선소 일을 시작했다. 2011년에는 현대미포조선으로 옮겨왔다. 오종환의 권유로 2014년 12월 환창기업에 입사했다.
하청노조에도 가입했다. 넥센타이어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때 노동조합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소 하청은 노조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이 고민하다 가입했다. 기왕 노조에 가입했으니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영수는 조직부장을, 이성호는 대의원을 맡았다.
환창기업은 2016년 5월 동양산업개발로 이름을 바꿨고 동양산업개발은 2017년 4월 폐업했다. 이성호, 전영수, 오종환, 김규엽은 원청 현대미포조선이 하청노동자들의 고용 승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외쳤다. 제2의 KTK 투쟁이 두려웠던 현대미포조선은 하청업체들을 통해 동양산업개발 노동자들의 고용을 승계했다. 그러나 끝내 하청노조 조합원들만 고용 승계에서 배제됐다.
이미 작년에 해고된 후 블랙리스트로 고용 승계에서 배제된 6명의 조합원이 6개월 넘게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노숙농성을 해오고 있었다. 게다가 1월에는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건우기업이 폐업을 하며 4명의 조합원이 해고됐고, 4월에는 동양산업개발이 폐업하며 4명이 일자리를 잃고 공장에서 쫓겨났다.
두 사람은 웃으며 싸울 것이다
결국 대의원 이성호, 조직부장 전영수가 고공농성을 결의했고 2017년 4월 11일 울산 성내삼거리 고가도로 높이 15m 교각 위에 올랐다. 성내삼거리는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이 있는 울산 동구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3개의 큰 길이 교차하는 지점이라 차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더구나 농성자들이 머무는 곳은 고가도로 상판 바로 아래라 소음과 진동, 매연이 심하다. 무엇보다 바람이 가장 큰 문제다. 얼마 전에는 비바람이 몰아쳐 물건이 다 날아가고 침낭은 젖고 똥통까지 넘어지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
농성 초기에는 한 사람이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다른 사람이 새벽 2시부터 새벽 6시까지 교대로 잠을 잤다. 처음 올라왔을 때는 전기를 쓸 수 있었는데 이틀만에 고가도로 관리업체가 전기를 끊어버려 이후에는 손전등이 전부였다. 밤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잠자리에 일찍 든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는 차들 때문에 하룻밤에도 몇 번씩 깬다. 아침에는 5시 30분쯤 일어난다. 운동을 하고 6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출근 선전전을 하고,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 선전전, 오후 5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는 퇴근 선전전을 한다. 낮에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거나 생전 읽지 않던 책을 읽는다.
두 사람 다 땅에 내려가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목욕이다. 이성호는 두 달 동안 목욕을 두 번 했다. 발에 있던 굳은살이 떨어져 발이 보드라워졌다. 기분이 묘했다. 다시 굳은살이 박히더라도 하루 빨리 현장에 돌아가 일하고 싶다. 낚시도 가고 싶다. 물안개도 파도소리도 그립다.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 가고 싶다. 올라오기 전 가족들에게 얘기도 못 하고 올라왔다. 올라와서 뉴스를 보내줬다.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며 일하느라 농성장에 찾아올 틈도 없다.
전영수는 올라오기 전날 아내와 소주를 한 잔 마시며 “어디 올라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내는 걱정하면서도 이해해줬다. 하지만 농성이 길어지자 아내는 걱정이 많아졌다. 부산이 고향인 아내는 전영수를 따라 울산에 와서 많이 외로워했다. 아내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일자리가 없어 전영수 혼자 울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전영수가 노조 활동한다며 바쁘게 지내자 아내도 다시 울산으로 올라왔다. 노조 활동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아내가 고맙다. 내려가면 아내와 밥 먹고, 이야기 나누며 ‘일상’을 누리고 싶다.
고공농성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노조 활동하고 나서 소식이 끊어졌던 사람들에게도 연락이 와서 반갑다. 한 동료가 현대미포조선 같은 큰 회사랑 싸우는데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성호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데 뭐가 두렵겠냐”고 답했다. 얼마 전에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이 회사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더니 노조에 가입했다. 작지만 변화들이 느껴진다. 작은 변화들이 모여 큰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때까지 두 사람은 웃으며 싸울 것이다.[워커스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