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제 무식자다. 내리막길을 살아가는.
내리막길을 살아간다는 건, 실업‧구조조정‧해고‧20대 고독사孤獨死 기사가 온통 내 이야기로 들린다는 것이고, 그래서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건 품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리가 맞이하게 될 유토피아는 방사능으로 오염돼 있을 것이란 섬뜩한 전망이 단지 머리가 아니라 폐부를 파고들어 ‘아,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은데 하루라도 빨리 흙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서툰 고민이 맴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지체 없이, 성실하게 내려가는 와중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문을 두드려 본다. 절반의 의구심과 절반의 기대로. 무식자를 벗어나고픈 지적 욕망의 발로는 아니다. 그냥, 내가 살아가는 이 뭣 같은 시대에 대해 어떤 설명이든 듣고 싶은 거다. 왜 이 모양이 된 건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한국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공황론 전문가인 김성구 한신대 교수가 기꺼이 품을 내주었다. 선생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내리막길에서 마주하는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이 어떤 맥락 위에 놓여 있는 것인지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경제 유식자가 들으면 화끈거릴 만큼 유치하고 천박한 질문들을 낯 두꺼운 어린 양이 되어 뻔뻔하게 해 볼 생각이다. 돌싱에게 왜 이혼했냐고 물어야 하는 심정이 이럴까.
대담: 김성구, 경제 무식자 1, 2
정리: 경제무식자 3
자본주의 안에 사회주의 있다
[사진 / 정운]
경제 무식자 / 몇 년 전부터 경제가 안 좋다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는데요, 하긴, 경기가 좋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조만간 1997년 외환 위기 때 같은 경제 위기가 또 올 거란 얘기도 있던데, 왜 경제는 늘 안 좋은 거예요?
김성구 /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지금 장기 불황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불황이 오래 가고 있다는 건데, 1970년대 이래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져 있어요. 자본주의 역사상 세 번째 장기 침체입니다. 물론 국가별로 장기 침체에 빠져드는 시기는 좀 다릅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는 대부분의 국가가 이런 상황이죠. 원래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모순들 때문에 주기적으로 과잉 생산, 공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폭발해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조절 시스템이 마비돼 버리고요. 이런 모순과 위기를 분석할 수 있는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뿐이죠.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재적 위기는 없다고 가르칩니다. 역사에서 공황이 10년마다 반복되는데도 말이죠. 그런데 자본주의는 공황을 통해서 다시 시장 경제가 재생산을 재개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돼요. 공황으로 공황의 모순들을 모두 정리하고 경기 순환을 통해서 경제가 새롭게 확장해 나가는 거죠.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19세기에는 문제없이 돌아갔어요. 시장 경제가 가장 완성된 형태로 발전된 시기죠.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오면 이런 시스템이 작동을 안 해요. 그 변화의 정점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입니다. 그 이후로 자유주의 시장 경제가 명백한 위기에 처하게 되고, 공황과 경기 순환을 통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을 유지해 나가는 길이 종료돼요. 그 상징적인 사건이 1930년대 대공황입니다. 대공황 이후에는 그게 불가능하게 됐어요. 심각한 장기 침체에 빠진 거죠. 자본주의 경제가 고도로 성숙한 형태에서, 발전기를 지나 쇠퇴기로 들어섰다는 의미죠. 자본주의가 자기 발로 움직이는 게 어려워진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경제 무식자 / 선생님 말씀대로면 수십 년 전에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망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성구 /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오자 바로 그곳에서 국가가 개입합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를 관리하고 공황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구제해야 하는데 이런 기능을 국가가 떠맡게 돼요. 국가 개입주의가 그때부터 제도화되기 시작합니다. 국가 개입주의가 자리를 잡게 됐다는 말은 자본주의가 노쇠했다는 표현이기도 해요. 자본주의 모순과 위기가 심화된 거죠. 국가 개입의 주요한 토대는 국가 재정, 국가 소유, 관리 통화 제도, 이렇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어요. 통화 제도의 경우 그 이전까지는 금 본위 제도였어요. 금 본위 제도하에서는 중앙은행도 금 본위 제도 법칙에 기본적으로 종속돼 있는데, 관리 통화 제도가 되면 통화 정책에서의 자율성을 얻게 돼요. 그렇게 위기관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경제 무식자 / 그러니까 국가의 개입이 자본주의의 쇠퇴를 반증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구원한다는 거죠?
김성구 / 단지 쇠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개입 자체가 일정한 사회화, 사회주의적 요소라는 것이죠. 국가 재정은 사적 범주가 아니라 사회적 형태잖아요. 국민 세금으로 집단적 지출을 해 소비를 진작시켜 주는 거니까요. 또 국유 기업이라는 건 국민 전체 소유의 기업이라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사회주의 기업이죠. 이런 요소들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요소들이에요.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딪히면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을 미래 사회에서 얻는 거지요. 그러니까 뉴딜이 들어설 때 자본가들의 저항이 강력했어요. 그건 명백한 사회주의 정책이었거든요. 우파는 소련 간첩이라는 선동까지 하면서 루스벨트를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당시 자본주의를 수정 자본주의니 혼합 경제니 하는 말로 표현하는 거예요. 혼합 경제라는 건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를 섞었다는 얘기예요. 수정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해서 자본주의를 수정했다는 말이고요.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딪히면서 자본주의 구원을 위해 사회주의적 요소에 의지하는 과도기 경제 체제가 된 겁니다.
경제 무식자 / 그래도 사회주의는 너무 먼 얘기 같아요. 영원히 안 올 것 같기도 하고요. 선생님은 사회주의가 실현될 거라고 믿고 계속 연구하시는 거예요?
김성구 /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이념을 위해서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 집단적 계획을 주장하는 건 아니에요. 자본주의 모순의 발전이라는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은 위기 심화로 국가 개입 없이 자본주의적인 사적 경제 메커니즘만으로 자본주의를 조절하고 관리할 수 없는 상태예요. 19세기에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역사 속에서 불가피하다고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예요.
사적 자본주의적 경제가 완전하게 작동을 해 나간다면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어려울 겁니다.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와 시장 경쟁에 기반해 있는데, 사회주의는 공동 소유와 계획에 근거한 거잖아요. 노동자들이 혁명을 통해 국가 권력을 장악한다 하더라도 시장 경쟁으로 연결된 수십만, 수백만 사기업들을 국유화해서 재생산을 계획적으로 조직할 수 있겠습니까? 성공할 수가 없어요. 마르크스도 그런 고민이 있었을 겁니다. 19세기 마르크스가 미래 사회를 구상할 때 현실에는 그런 사회주의적 범주들이 없었던 거죠. 일종의 강령적인 딜레마가 있는 거예요. 근데 20세기에 오면 그렇지가 않아요. 독점 자본, 재벌 경제가 형성되면서 그 범주들이 뚜렷하게 생깁니다.
19세기 말이 되면 주식회사들이 전반적으로 일반화돼요. 그리고 카르텔이라든지 트러스트라는 독점 조직들이 만들어지고요. 주식회사 자본은 어느 한 재벌 총수의 기업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주주의 공동 소유 기업이잖아요. 또 카르텔과 트러스트는 시장 경쟁을 제한하고 시장을 계획적으로 조직하려는 겁니다. 이렇게 재벌 경제는 이미 사회화가 진전된, 미래 사회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노동자 계급이 재벌 부문을 사회화해서 확장된 국가 부문을 토대로 사회주의적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