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이 주류 정치권과 언론 같은 ‘상층부의 이슈’로만 머무는 까닭은 또 있다. 아무리 헌법을 고치고 만든다 한들, 진짜 내 삶을 바꾸기는 힘들 것이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랄까. 헌법의 지당한 문구들은 번번이 하위 법률에 가로막혀 찢어지고 훼손되기 일쑤. 헌법은 그저 ‘선언적 의미’의 조항일 뿐, 진짜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헌법을 무력화하는 각종 악법들이다. 하위 법령이 헌법을 무력화하는 ‘주객전도’의 대표적 사례들을 모아봤다.
헌법 제33조 ⓵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노동계와 민중진영이 ‘헌법 개정’을 투쟁 슬로건으로 전면배치한 사례는 없다. 언제나 이들의 주요 투쟁 구호는 ‘노동법 개정’이었다. 노동진영으로서는 ‘헌법 개정’ 보다는, 실제 현장에서 그들의 노동3권을 무력화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이 훨씬 시급했다. 실제로 헌법에는 ‘단결권’이, 노조법에는 ‘노조설립 자유의 원칙’이 각각 명시돼 있다. 신고절차만으로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노조법 시행규칙에서 발목이 잡힌다. 시행규칙에는 설립신고서와 규약 외에도 노동조합 형태, 대표자의 신원정보, 조합원 수, 사업장별 명칭 등 무수한 추가 정보를 제출토록 하고 있다. 이밖에도 행정관청이 요구하는 자료를 거부할 경우 노조 설립신고가 반려되기도 한다. 사실상 행정관청이 노조 설립에 ‘허가’를 내주는 꼴이다. 최근에는 특수고용노동자인 대리운전기사들이 노조 설립신고증을 전국 단위로 변경하는 조직변경 신고를 냈지만 노동부가 이를 반려해 논란이 됐다.
헌법에 명시된 ‘단체교섭권’은 노조법 29조 제2항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 조항으로 무력화되기 일쑤다. 이 법에 따르면,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사용자와 교섭을 하기 위해서는 교섭대표노동조합을 정해야 한다. 교섭대표노동조합은 과반수 노조, 즉 다수노조가 된다. 이는 결국 소수노조의 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제약하는 결과를 낳는다. 심지어 이는 사측의 ‘노조파괴 시나리오’에 빈번하게 활용된다. 직장폐쇄 후 어용노조를 만들어 다수노조를 선점한 뒤, 민주노조로부터 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박탈하는 수순이다.
단체행동권, 즉 파업권은 박제된 문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불법파업’이라는 딱지를 붙여 천문학적인 손배가압류를 청구하는 것이 정부와 사업주의 ‘관습법’으로 자리 잡은 까닭이다. 노조법에는 ‘정당한’ 쟁의행위에 대한 민사면책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정당한’이라는 요건은 현실에서 전혀 정당치가 못하다. 쟁의행위 주체, 목적, 절차, 방법이라는 4가지의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파업의 목적은 ‘근로조건을 위한 것’으로만 제한된다. 부당해고? 임금체불? 정리해고? 민영화? 모조리 파업의 목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불법파업으로 낙인찍히면, 그때부터는 거액의 손배가압류가 뒤따른다. 노동자에게 청구된 손해배상 누적금액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1,867억 원, 가압류는 180억 원에 달했다.
헌법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헌법 제18조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그리고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는다. 뭐가 그리 궁금한지, 정부와 공권력은 빈번하게 국민들의 통신 기록을 털어간다. 지난 2015년 12월 민중총궐기 전후. 수사기관은 1천 명이 넘는 시민들의 통신자료를 무단으로 수집해 갔다. 노동계와 시민사회 인사와 일반 시민을 비롯해 언론사 기자의 통신 기록까지 광범위하게 들여다봤다.
당시 진보진영에서는 통신사를 상대로 ‘통신자료 제공사실 열람신청’을 조회하느라 분주했다. 《워커스》 기자들의 통신기록도 경찰청과 국정원 등 수사기관에 제공됐다. 광범위한 통신자료 무단수집 논란이 일자, 경찰 측은 ‘피의자와 통화한 상대방이 공범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해괴한 해명을 내놨다. 통신기록을 무단수집 당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원고 패소. 지난해 12월 27일, 법원은 ‘(통신)자료를 이용해 피의자를 검거하는 등 수사 자료로 활용했다’는 경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헌법에 명시된 ‘사생활의 비밀’과 ‘통신의 비밀’을 유명무실하게 만들 수 있는 근거는 무궁무진하다. 우선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에는 수사기관이 수사 등을 위해 통신자료제공을 요청하면 전기통신사업자가 그 요청에 따를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수집 범위는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 아이디 등 다양하다. 특히 주민등록번호만 손에 넣으면 건강보험 정보, 소득수준, 학적, 차량 이동 경로 조회, 수사경력자료 등 엄마도 모를 만한 개인정보를 쓸어갈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통신비밀보호법 제13조에는 수사기관이 수사를 위해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통신사실 확인 자료의 열람이나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끝
이 아니다. 국정원법 제3조 1항에는 국정원이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 및 작성, 배포가 가능토록 규정해 놨다. 사실 ‘국내 보안정보’는 대공,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에 관한 것이어야 하지만, 국정원은 국내 문화예술인과 정치인 등을 상대로 광범위한 사찰 행위를 벌이곤 한다. 또 있다. 지난 2016년 6월 시행된 테러방지법 제9조는 국정원이 ‘테러 위험인물’에 대한 출입국, 금융거래 및 통신이용, 개인정보, 위치정보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할 수 있도록 했다. ‘테러 위험인물’이라는 애매한 개념은 테러 예비, 음모, 선전, 선동이 ‘의심’될 만한 인물들까지도 모조리 포함하고 있다.
헌법 제7조 ⓶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헌법 제33조 ⓶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헌법의 책임은 생각보다 가볍다. 많은 조항들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하위 법령에 각종 제한 조치를 위임하기 위한 수사다. 헌법의 선언적 문구들은 하위법령으로 갈수록 억압되거나 무력화된다. 공무원, 교사의 정치적 자유와 노동기본권이 대표적인 예다. 헌법에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규정에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라는 단서 조항을 달아 놨다. 그렇다면 ‘법률이 정하는 바’가 무엇일까.
교원노조법 제3조에는 ‘교원의 노동조합은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해 놨다. 이는 세월호 참사 당시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정치활동’으로 규정하고, 각종 징계해고를 발생시킨 근거로 활용됐다. 지난해 8월 서울고등법원은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들을 1심과 같은 ‘유죄’로 판결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상 ‘정치적 중립성’이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셈이다.
공무원의 처지도 비슷하다. 검찰은 지난 2010년(273명)과 2011년(1,700여 명), 민주노동당에 월 5천원~1만원의 소액후원금을 낸 교사·공무원들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무더기 기소했다. 지난해에는 공무원들이 선거 및 정치관련 SNS게시물을 공유하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불가하다는 선관위의 지침이 내려오기도 했다.
헌법에 따르면 공무원 역시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해서는 노동3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법률이 정하는 자’는 우정사업본부 공무원과 비정규직 공무원뿐이다. 사실상 공무원의 노동3권은 원천봉쇄 수준이다. 국가공무원법 제66조에는 ‘공무원은 노동운동이나 그밖에 공무 외의 일을 위한 집단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002년 출범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16년째 법외노조 신분에 머물러 있다. 현재까지 총 5차례 노조 설립신고를 냈지만 모두 반려됐다.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고된 노동자만 136명에 달한다.
교원노조법 제2조에는 아예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을 법률로 명시해 놨다. ‘해고자’의 경우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 판정이 있을 때까지만 교원으로 본다는 내용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벌이다 해고된 교사들의 조합원 자격유지 규정을 두고 있는 전교조는, 이 법률로 말미암아 ‘노조 아님’ 통보를 받았다. 2013년 법외노조가 된 전교조는 5년째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헌법 제21조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긴 세월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려 온 한국사회에서 ‘사상’이란 매우 불온한 단어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로 퉁쳤다. 양심의 자유가 곧 사상의 자유까지 포괄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양심의 자유’란 무엇일까.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이 소리’란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행동하지 않고는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도 일단 씹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수’로 감옥 생활을 면치 못한다.
울던 아이도 뚝 그치게 한다는 무서운 악법. 헌법 위에 법이라는 ‘국가보안법’은 무려 70년간 양심과 사상을 지배해 왔다.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8년 1월 현재 감옥에 수감된 양심수 25명 중 15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라는 죄목을 달고 있다. 진보정당 인사들을 비롯해, 개인 사업자, 사회단체 회원, 인터넷 논객 등도 국보법으로 실형을 살고 있다. 현재 국보법 위반으로 수감 중인 C씨는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2013년 박근혜 정권 초기에 인터넷 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조국통일의 당위성’을 올렸다가 서울 경찰청 보안과로부터 사무실 및 자택 압수수색을 당하고 기소됐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은 C씨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이후 교통사고로 인해 집행유예가 실효돼 1년간 복역 중이다.
양심의 자유에 따른 생존권 및 노동권 투쟁도 ‘감빵 생활’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난해 8월, 홍만기 전 대전세종건설기계지부 사무국장은 1일 8시간 노동 쟁취투쟁을 벌이다 구속됐다. 죄명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공갈협박’과 ‘떼쓰기’. 홍 전 사무국장은 그저 건설현장에서 하루 8시간 노동과 건설기계 임대차 표준계약서 작성 등을 요구했고, 지자체와 국민신문고에 공사현장에서 비산먼지가 발생한다며 투서를 넣었을 뿐이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영주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도 여전히 감옥 안에 있다.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와 세월호 범국민 추모행동 등의 집회 및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다. 정권이 바뀌어도 변한 것은 없다. 민주노총의 집회는 그 목적과 결과 여부를 떠나, 여전히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를 해하는 행위로 규정된다.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도 감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 8월까지 최근 5년간 종교 및 기타 신념을 이유로 입영 및 집총을 거부한 청년은 총 2,356명이다. 그중 1,693명이 징역을 살았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개헌
헌법 제33조의 노동3권은 노동법으로 제한이 가능하다. 헌법 제119조의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민주화 조항은 파견법과 기간제법 등 각종 비정규악법으로 무력화할 수 있다. 불온한 사상을 가진 자들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을 적용해 격리시키면 된다. 기업과 자본에게 지금의 헌법은 큰 걸림돌이 아니다. 그래서 자본은 지금의 개헌 이슈가 마뜩잖다. 피곤한 기본권 조항들이 헌법에 삽입되기 전에 빨리 이 소요가 가라앉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지난해 2월 3일 국회에서 열린 헌법개정특별위원회 회의. 이 자리에는 양대노총 인사를 비롯해, 남용우 한국경영자총협회(한국경총) 이사와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이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재계 인사들은 개헌에 대한 속내와 바람을 털어놨다. 이들의 가장 큰 바람은 바로 개헌논의가 ‘권력구조 개편’ 논의 안에만 매몰되는 것. 개헌 이슈가 괜히 기본권이나 경제민주화 조항 논쟁으로 불 붙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남용우 한국경총 이사는 이 자리에서 “저희 경총에서는 이번 개헌 논의가 가급적 통치구조 변경을 중심으로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며 “그러지 않고 논의 범위가 무리하게 확대되고, 논의 기간이 길어질 경우 정치·사회적 갈등과 불확실성이 지속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기본권이나 경제 관련 조항을 헌법에 지나치게 세부적으로 규정할 경우는 급변하는 경제·사회 상황에 따른 정책 대응이 오히려 어렵게 되고 국정 운영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우려를 갖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렇다고 재계의 포지션이 ‘수비’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헌법에 ‘노동3권’과 대등할 만한 ‘경영권’ 조항을 도입하자고 요구했다. 헌법에 ‘경영권’을 명시해, 노동자를 비롯한 제3자의 경영참여를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다. 남 이사는 “최근 들어 노동계에서는 경영권 침해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근로자의 경영 참여를 확대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경영권의 본질적인 내용이 침해되는 폐해를 개선하고 근로자 경영 참여 등 과도한 요구나 불필요한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경영권을 근로3권과 동일한 위상으로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헌법에 명시된 국가의 시장 개입 조항과 경제민주화 조항에 대해서도 수정 혹은 삭제를 요구했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정부 개입이 지나쳐서 (헌법 119조) 1항의 시장경제 원칙을 침해할 경우, 우리 경제와 기업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떨어뜨려서 해법을 내놓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결과를 유발할 것”이라며 “경제를 민주화 대상으로 설명하고, 의사결정이라든지 기업 경영의 참여를 활성화할 경우 시장 메커니즘을 왜곡시킬 수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청년고용촉진법’ 등 기업에 의무를 부과하는 법안들이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이어졌다. 이 본부장은 “청년고용촉진법이 국회에 계속 발의 되고 있고, 이런 것이 도입될 경우 기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청년 고용이 더 어려워지는, 비정규직만 양산하고 청년들의 올바른 일자리를 찾는데 마이너스가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데 이런 법안들이 여전히 명분 때문에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 많이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