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가 살짝 둥근 빨간색 사각형 안에 작고 하얀 삼각형 하나가 모서리를 오른쪽으로 향해 있다. 누구나 동영상을 찍어 공유할 수 있는 동영상 공유 네트워크인 유튜브(YouTube)의 아이콘이다. 이 빨간색 사각형 안 세모는 자연스럽게 손가락 터치나 마우스 클릭을 부른다. 이 아이콘에는 이미 이것을 눌러서 어떤 콘텐츠(음악이든 동영상이든)를 재생한다는 행위가 포함돼 있다. 또한 아이콘을 누르는 행위는 그것이 연결해줄 신세계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함축하고 있다.
2005년 페이팔 출신 세 명의 엔지니어가 설립하고 2006년 구글에 16억5천 달러(약 1조9천억 원)에 매각된 이후, 지금까지 유튜브는 명실공히 21세기 최고의 뉴미디어 서비스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튜브는 2018년 현재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10% 이상을, 전체 모바일 트래픽의 70%를 차지할 만큼 많은 사용자(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 하루에 58만 시간 분량의 비디오가 유튜브에 업로드되고, 매년 4만6천 년이라는 시간을 유튜브 사용자가 비디오 콘텐츠를 시청하는 데 소비할 정도로 방대한 잉여시간이 유튜브에 빨려 들어간다.
유튜브 혁명, 1인 미디어의 신세계
“당신 자신을 방송하라!(Broadcast Yourself!)”라는 당시 유튜브의 슬로건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는 사람들의 꿈을 손쉽게 이루어주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미디어 기업들의 홍보, 뮤직비디오, 영화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개인들이 만들어 올리는 (흔히 UCC 혹은 UGC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동영상은 전 세계인 모두를 개인 창작자로 만들었다. 애초 개인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들은 아마도 개인 소장 혹은 가족 공유의 목적이 다수였겠지만, 개인이 미디어의 창작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튜브는 텔레비전과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일조했다. 개인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 내에서 ‘생산하는 소비자’로 거듭나고, 획일화되고 상업화된 문화산업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얻게 됐다.
이제는 대학에서 선호 미디어에 관해 물어보면, 텔레비전 대신에 유튜브를 시청한다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 수도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는 동영상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는데 자신의 취미나 생활, 의견이나 재능 등을 보여주는 1인 방송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1인 가구와 갖가지 혼족(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예컨대 혼밥, 혼놀, 혼술 등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경향, 모바일 스마트폰과 같은 1인 미디어 기기의 보편화는 1인 방송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미디어 콘텐츠의 생산과 창작, 그것의 소비와 향유에 있어서도 개인 역량으로 충분한 사회·문화적 조건들이 마련돼 있는 셈이다.
혐오를 확산하는 플랫폼
유튜브는 참으로 매혹적인 미디어 플랫폼이다. 그것은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위로하며 또 후회하게 한다. 유튜브가 시청자에게 내미는 감정적 쓸모는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게임 스트리밍과 뷰티, 먹방과 K-pop 콘텐츠에 마음을 빼앗긴 젊은 세대의 유튜브 세계가 있는 한편, 마인크래프트 게임과 장난감 리뷰, 상어 가족과 뽀로로에 사랑을 바치는 어린이들의 유튜브 세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유튜브 세상은 젊고 어린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첨단 미디어 기술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노령의 보수층들이 어느새 유튜브에 몰려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동영상 플랫폼을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을 방송하며 열린 정치에 참여하는 보수 노인들은 광범위한 시청자 수와 상당한 구독자 수를 확보하고 놀라울 만큼 그들의 세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카카오톡이 그들 세계의 경계를 넘어 거짓과 혐오를 퍼트리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어 왔듯이, 유튜브 또한 극단적 보수 우파와 혐오 조장 세력들이 스스럼없이 (왜냐하면 정말로 그렇게 믿기 때문에) 가짜뉴스와 혐오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공장 역할을 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손쉽게 찍어 올려 보여주면 믿을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은 기꺼이 보고 믿고 공유한다. 물론 이것이 보수 성향 미디어 사용자들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소위 ‘합리적 의심’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추적하던 진보 성향의 미디어 사용자들도 거기서 비켜가진 못한다.
우리를 위로하는 플랫폼인 동시에 우리에게 혐오를 심어주는 플랫폼, 매시간 끊임없이 새롭고 흥미로운 콘텐츠로 우리를 매혹하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감을 보장하는 유튜브의 세계는 우리의 갈증을 채우면서 허기지게 한다. 타인의 먹방을 보는 것만으로 잠깐의 대리 위로가 가능하겠지만, 점점 더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신체적 허기는 계속해서 먹방을 찾게 만든다. 혐오를 퍼트리는 가짜뉴스의 달콤함과 명치를 치는 사이다 같은 통쾌함에 익숙해지면서 사용자는 화면의 오른쪽에 끝없이 늘어선 유사한 추천 영상에 계속 손을 가져간다.
유튜브에도 텔레비전은 살아있다
모두가 팩트를 외치는 상황에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유사 진실들 사이에서 혐오를 걸러 낸다면 가짜는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혐오표현금지나 차별금지를 법제화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짜뉴스의 확산을 막아내는 데 유효한 해법이 될 수 있다. 박근혜의 당선이 가짜뉴스의 생산, 소수자나 진보 세력에 대한 혐오의 확산을 위한 도구로 카카오톡의 덕을 어느 정도 보았다면, 다음 대선은 아마 유튜브를 중심으로 (페이스북도 큰 몫을 할 테지만) 벌어질 대대적인 유사 진실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룹에 기회가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으로 유튜브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급부상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과 친구가 되고 직각으로 반듯한 사각형 LCD 스크린에 익숙한 이 아이들은 유튜브 아이콘의 이 빨간색 모서리 둥근 사각형이 무엇을 형상화했는지 알고 있을까? 유튜브의 ‘튜브’는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불리는지 궁금하기는 할까? 우리는 아직 그 시대의 텔레비전에서, 텔레비전의 낡은 세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워커스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