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민(문화연구자)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
자동기계들 색색거리는 이 라인 저 라인 홀로계신
우리 엄마도 이 내 젊음도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다
돌아가누나
90년대 초반 이후 다시는 듣거나 부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노래들을 최근 다시 듣게 됐다. 민중가요 작사·작곡가인 김호철의 파업가 30년을 기념하고 그에게 헌정하는 음반을 통해서다. 이 음반의 제작을 후원하고 리워드로 CD 음반을 받았는데, 80년대부터 이어진 현장 노동자 투쟁의 정서가 순식간에 음악을 통해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 정서는 너무 낯설기만 했다. 심지어 이 CD라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장치를 찾기에도 여의치 않을 만큼 시대는 많이 변했다. ‘잘린 손가락’과 ‘컨베이어 벨트’는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낡은 산업 시대의 유령 혹은 유물처럼 보였다. 아니 들렸다. 기계에 잘린 손가락을 어딘가에 묻고 돌아오는, 어두운 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떠나보내는 젊은 노동자의 축 처진 어깨 같은 이미지는 지금의 21세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유령에 대한 기억을 모두가 잊었을 때, 그것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생각조차 잊었을 때,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음을 혹은 되돌아왔음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올해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의 연료공급용 컨베이어 벨트 사고로 숨진 김용균 씨도, 지난 2016년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몸이 끼어 사망한 김 군도 그 유령의 희생자다. 이 유령은 그저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노동과정 혹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 드는 힘든 육체노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업장이나 기계 장치의 작동에 있어서 노동자에게 특별한 위험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 유령은 자본주의적 욕망과 맹목적 효율성의 추구가 빚어내는 인간성에 대한 망각이다. 기계작동의 효율성을 위해 인간 노동과 삶의 가치를 모조리 부정하는 도구적 효율성 속에서 불현듯 으스스하게 나타나는 그 어떤 저주다.
20세기 초 컨베이어 벨트가 발명되고 가장 먼저 사용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석탄 광산이었다. 생각해보면 광부들이 캐낸 석탄을 손수레에 퍼 넣고 좁은 갱도에서 밀고 나오는 것보다 얼마나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식이었을지 알 수 있다. 캐낸 석탄을 퍼 담아 올려놓기만 하면 기계가 저절로 갱도 바깥까지 옮겨주니 광산 노동자에겐 구세주 같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머지않아 그 유명한 헨리 포드가 자동차 조립 공장 설비에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다.
이제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자의 힘을 절약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끊임없이 일거리를 가져다주는 도구가 됐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의 리듬에 맞춰 노동자의 몸이 움직여야만 했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어떻게 컨베이어 벨트의 기계적인 운동이 인간의 고유한 움직임을 규정하고 포섭하고 명령하는지를 코믹하지만 서글프게 보여줬다. 심지어 기계 속에 빨려 들어가 그 기계의 먹이가 된 듯한 장면은 공장의 기계장치와 인간의 교합이 만들어내는 미적 앙상블 때문에 숨이 멎는 경험을 주기도 했다.
위험이 외주화된 공장과 삶이 하청된 작업장들
많은 노동자가 단지 그 기계장치에 깃든 유령 때문에 희생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끊임없이 정상적인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비정규화하고 외주화함으로써 값싼 목숨으로 만들어버리는 악순환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피라미드처럼 아래로 무수히 가지친 하청의 하청 과정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 삶의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온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가 있다. 점점 바깥으로 내몰아 인간의 삶을 쓰레기로 만들어 온 정치경제적 제도의 역사가 있다. 그 인간의 탈을 쓴 제도의 역사는 흔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자꾸만 노동자의, 아니 인간의 삶 자체를 불안정의 영역으로 내몬다.
하청과 외주화로 값싸게 매겨진 청년들의, 단순노동자들의,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은 그 유령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 불안함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하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무도 그 안전과 안녕을 책임지지 않는 그 값싼 목숨은 사고나 재해를 가장한 살인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삶조차 비정규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안전의무 규정 위반으로 혹은 과실치사 혐의로 회사의 잘못을 판결하고 죗값을 묻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삶과 노동의 가치는 점점 값싸게 매겨지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위험과 불안의 영역으로 내몰리고 있다. 사회 전체의 반성을 통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어 효율적으로 나르기 위해 고안된 그 기계장치가, 여전히 발전소에서 석탄을 태우고 나르며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다. 21세기의 공장과 작업장이, 혹은 석탄 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가 집어삼키고 태우고 있는 것은 그저 화석 연료만은 아니다. 거기에 자신의 삶이 외주화되고 하청된 사람들이 있다. 위험이 외주화된 공장과 삶이 하청화된 작업장들을 당장 멈추고 제발 거기 누가 있는지 살펴라. 그들을 보살펴라. 사회가 그들의 삶을 책임져라.[워커스 50호]
청년들에게 호소한다! 청년들이 앞장서서 대정부, 대자본 투쟁으로 죽음의 행렬을 끝장내자!!
만성적 청년실업과 그것이 강요하는 불안정노동, 위험 노동으로 청년들이 고통 받거나 죽어가고 있다
2018년 12월 24살 청년 노동자인 김용균이 참혹하게 죽었다. 사고 전에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 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환은 직접고용으로!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 노동자입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손피켓 사진을 유언처럼 남겼다.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김용균 개인만의 불운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짧은 삶과 비극적인 죽음은 한국사회 청년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2017년 1월 22일 LG유플러스 협력회사 콜센터 한 현장실습생은 저수지에 몸을 던져 숨졌다. LG유플러스에서는 그 이전에도 자살하는 노동자가 있었는데 과도한 노동착취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7년 1월 25일 고3인 실습생은 여수산단 대림산업 협력업체인 금양산업개발에 수습사원으로 일을 하다가 과중한 업무지시, 그리고 상급자의 폭언 등으로 고통 받다가 자신이 일하던 자재창고에서 목을 매고 숨졌다.
2017년 11월 제주 용암 해수단지의 한 음료제조 공장에서 산업체 현장실습을 하던 19살의 고등학교 3학년이 제품 적재기에 목이 끼여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6년 5월에는 20세 청년 노동자가 서울메트로 협력업체 노동자로서 구의역에서 혼자서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다가 참혹하게 죽었다.
이에 앞서 2011년 12월에도 18세 고3실습생인 청년이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주 70시간 가까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까지도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
한 해 6만여 명의 현장실습생들이 초저임금과 극악한 노동조건, 무권리 상태로 일하다가 빈번하게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갔던 노동자들도 대다수 20대 청년 노동자들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용균이 겪어야 했던 노동의 고통은 한국사회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노동의 고통이다. 김용균의 참혹한 죽음 이전에도 제2, 제3의 또 다른 김용균의 죽음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청년들의 죽음도 있고, 구의역 참사처럼 사회적으로 떠들썩하게 관심을 쏟아 부으며 대책을 내놓고 있는 죽음도 있지만, 그러한 대책이 무색하게도 이처럼 한국사회 청년들의 고통과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사회 청년 학생들 대다수도 값비싼 등록금과 주거비, 학자금 대출,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저임금 알바 노동을 전전하며 고통 받고 있다. 청년들의 주거문제 또한 심각한 상태인데, 1평 감옥 같은 고시원이 상당수 청년들의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좁디좁은 고시원에서 상당수 청년들은 자격증 준비를 하거나 취업준비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고시원에서 홀로 죽었던 한 청년 노동자는 가족들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부패한 시신으로 발견되는 참담한 일도 벌어졌다.
아름다운 청년 김용균의 삶은 한국사회 10대, 20대 청년들,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하고 있으며, 김용균의 죽음은 청년들의 삶을 죽음으로 강요하는 이 사회체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전태일 열사가 당시 청년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대변했듯이, 김용균은 2018년 전태일이고, 2018년 청년들의 삶과 투쟁을 대변하고 있다.
청년 노동자 김용균은 전태일 열사처럼 성실하게 일했고 부모에게는 다정다감한 자식이었다.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의 가난한 부모들이 있었다. 가난한 부모들은 하나 같이 자식들의 참담한 죽음 앞에 오열하며 성실히 일할 것을 요구한 당신들을 자책하고 있다. 구의역 청년 노동자의 어머니가 그랬고, 김용균의 어머니 역시 그랬다.
청년들이 고통 받고 죽어 가고 있다면, 그 청년 노동자들의 가족 역시도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살다가 자식들의 비통한 죽음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무엇이 청년 노동자 김용균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김용균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 “위험의 외주화”가 원인이라는 점은 이제 상식적인 일처럼 되었다. 심지어 권력을 잡은 민주당 원내대표 이해찬은 태안화력 발전소와 고 김용균 유가족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주를 준 것”이고, “외주에다가 비정규직으로 근무를 해 위험에 이중으로 노출됐다”고 말하며 근본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이해찬은 상시 근무를 한다고 하더라도 원하청 관계의 외주화가 곧 비정규직화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저들은 외주화와 그에 따르는 비정규직 확산의 주범이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파견법을 도입한 민주당과 김대중 정권이라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또한 그 정권 하에서 2002년 에너지 산업 민영화 정책의 일환으로 한전에서 발전과 배전이 분리되고, 발전 5개사가 한전의 자회사 형태로 분리되고 발전사는 생산 업무 일부를 외주화 하면서 자신들이 죽음의 외주화를 낳은 주범들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모른 체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도 자신들이 호시탐탐 영리병원 도입을 부추기고, 자본을 위해 규제완화법을 통과시키고, “위험의 외주화”를 외치는 그 입으로 바로 며칠 전에 모든 공공시설 투자에 민간자본 투자를 허용한다는 사실을 함구하며 제2, 제3의 사회적 살인을 부추기고 있는 기만적이고 이중적인 작태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뿐인가? 여전히 지하철에서는 “경영효율성”, “인력 효율성”을 내세워 노후차량을 교체하지 않고 가동하고 있으며, 1인 승무제를 원래대로 2인 1조 체제로 대체하여 기관사와 승객들의 안전을 도모하라는 상식적인 요구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지난 12월 8일 강릉선 KTX탈선 사고처럼 최근 빈번하게 KTX사고가 나고 있는데, 문재인 정권은 “안전마저 무시한 대규모 인력 감축, 정비 축소, 철도 운영 분할, 시설과 운영의 분리 등 효율화로 포장된 철도 민영화 정책을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는 철도노동자와 시민의 목소리를 외면해 왔다”(철도노조 성명)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는 모든 문제를 설명하는 만사형통의 구호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위험을 막고 죽음을 방지하는 대책은 “자본 활성화”라는 명목 하에 외면되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라는 저들의 구호는 “책임의 외주화”로 나타나며 근본책임을 호도하고 회피하는 면피성 구호가 되고 있다. 구의역 사고 당시에 저들의 추모와 부산한 대책마련은 사태를 호도하는 미봉책으로 나타나면서 새로운 사고를 낳는 촉매제가 되었을 뿐이다.
김용균이 들었던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는 손피켓은 낮은 수준으로 표현되었지만 사실 대정부 정치투쟁의 요구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청와대, 국회, 검찰청을 오가며 투쟁했다. 그런데 당시에 조선일보를 위시로 언론에서는 “민노총 불법 폭력” 운운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과 분노를 은폐하면서 저주어린 악선전을 해댔다. 진실보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 청년들이 당하는 고통을 정면으로 직시하기는커녕, “폭력 세력”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어대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요구를 외면했다. 그것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을 얼굴을 공개하며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청년 노동자 김용균에 대한 모욕과 조롱, 비난에 다름 아니었다.
언론을 비롯해서 이 땅의 지배계급은 김용균의 비통한 죽음이 가져오는 청년들의 분노의 동참과 저항이 점점 더 거세질 기미가 보이자 “죽음의 외주화” “위험의 외주화”를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으나 김용균을 죽음으로 내몬 악랄한 모독의 당사자들이다. 저들은 “죽음의 외주화” “위험의 외주화”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부산을 떨면서도 정작 그 외주화, 하청화의 주범인 파견법, 기간제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외면하고 있다.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 판결도 외면하면서 심지어는 계약해지를 자행하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기조차 한다.
왜 청년들은 김용균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분노하고 있는가? 김용균이 겪었던 참담한 상황이 자신들의 문제로 여기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그 양상은 달라도 자신들이 앞으로 당할 수 있는 상황으로 처지를 공감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실업으로 고통 받고 있다. 청년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런데도 이 사회는 이를 청년들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서 “일자리위원회”를 만들고 일자리 전광판을 설치하며 부산을 떨지만 만성적 실업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실업은 청년들에게 집중되고 있는데, 이것이 청년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런데 만성적인 청년 실업은 청년들에게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 위험한 노동, 힘든 노동의 일자리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있다. 김용균의 경우에도 10여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가 태안화력에 취업할 수 있었다. 막장 수준의 처참한 발전소 외주 사업장을 선택하는 것이 마치 이후 정규직 전환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력으로 작용하면서 청년 노동자들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신경안정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실습생이라는 명목으로 정규직 노동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악랄하고 비열한 착취를 합리화 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은 수치상의 실업률 저하를 기대하면서 낮은 임금, 무권리의 “광주형 일자리”를 대안으로 제출하고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자회사 직고용으로 상대적으로 고용은 안정될지 모르지만, 이는 실제적인 정규직 전환 요구를 가로막고 영구적으로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도록 하고 있다.
청년 실업은 그 자체로 청년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청년들을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위험천만한 노동, 무권리의 상태인 불안정 노동으로 내모는 원흉이 되고 있다. 불안정 노동자들은 그 자체로 실업의 일부인 반(半)실업자들이다. 완전실업이 불안정 노동의 비정규직 반(半)실업 상태로 내모는 것이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이 사회의 전반적 고용 형태가 되고, 청년들 대다수가 그 대상이 되면서 청년실업과 그 실업의 한 형태인 불안정 노동은 개인의 선택사항,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청년들이 처한 전반적 문제가 되었다.
“죽음의 외주화”의 직접적인 대책은 비정규직 철폐이고 이중, 삼중, 사중의 첩첩의 고용구조를 혁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하청의 연쇄적 고리는 원청자본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안전과 고용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었다. 실제적인 기업의 소유자는 원청인데 하청화, 외주화로 형식적으로 소유를 분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기업의 보편적인 형태가 되고 있다. 이중, 삼중의 하청화, 특히 건설현장에서 중층적 도급화는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위장하고 있다. 이 첩첩의 착취 구조 속에서 제일 꼭대기에 앉아 있는 원청 자본은 최대 이윤을 추구하고 그 착취사슬 아래의 외주, 하청 자본은 최고층 원청 자본이 남긴 이윤 일부를 절약하고 최대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안전설비를 외면하고 인력을 최대한 감축하고 노동자들에게 최대한 노동하게 만든다. 이러한 복잡한 첩첩의 원하청 구조는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하나의 자본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본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에서는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고 산재 사망 사고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 실소유 자본은 하청, 외주 기업에 책임을 전가하고 나 몰라라 한다. 하청자본이 첩첩의 착취 구조 하에서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하여 사회적 살해의 직접적인 당사자라면, 원청은 실질적인 사회적 살해자들이다. 국회의 정치인 권력자들 절대 대수는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일가들이 자본가의 구성원이고 자본의 이해관계와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반노동, 친자본의 입법으로 노동자를 죽음을 부추기는 자본의 법적, 권력적 비호자들이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필두로 한, 자본의 언론들은 그 노동자 살해를 부추기는 선동자들이고, 방송과 신문에 나와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학자, 전문가라는 작자들은 자본의 이해를 포장하여 전달하는 모사꾼들이다.
구의역, 태안화력에서 우리의 청년 노동자들이 남긴 유품들은 그들이 얼마나 열악한 조건에서 장시간의 위험천만한 노동을 강요당했는지를 고발하는 사회적 고발물이 되고 있다. 구의역에서 태안화력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던 노동자들의 유품을 보며 우리는 또 다시 분노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위험의 외주화”는 하청제도 자체, 비정규직 철폐의 요구가 담겨 있지만, 저들이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입 발린 소리로 떠들어대는 “위험의 외주화”는 외주 자체가 아니라 외주 업무 일부에 한정해서 자회사로 직고용 전환하겠다는 면피성 구호에 불과하다.
“죽음의 외주화”에 반대하는 저들에게 우리는 묻고자 한다. 그렇다면 삶의 외주화도 있는가? 노동자의 삶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그러한 외주화가 있는가? 외주화 자체가 노동자를 열악한 노동조건의 저임금 빈곤 노동자, 불완전 노동으로 내몬다.
연간 2400여명이 산재로 사망하고 있다. 수천 명의 김용균, 청년 김용균만이 아니라 중년의 김용균, 노년의 김용균이 불타죽고 떨어져 죽고 깔려죽는다. 이것은 전쟁이다. 계급 간 전쟁이다. 전쟁을 강요하는 자들의 최상층에는 재벌들이 있고 그 재벌의 자식들은 대를 이어 재벌이 된다.
죽음의 외주화가 직접적인 사회적 타살의 원인이라면 그 원인의 원인에는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권은 이 착취체제의 영구적 보전과 강화를 위해 선두에서 반민중적 조치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청년들이 앞장서서 대자본, 대정부 투쟁으로 죽음의 행렬을 끝장내자
문재인 입으로는 촛불정부를 자처하며 적폐청산을 외치고 있으나 행동으로는 역사적 모순의 해결 앞에서, 구조적 모순 앞에서 뒷걸음치며 민중을 기만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유지하고 국가정보원을 존치시키고 있다. 기무사 역시 이름만 바꿔 운용하고 있다. 사법거래 범죄자들을 일망타진하기는커녕 눈치를 보며 적폐의 똥무더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수천 개의 핵으로 무장한 미제국주의의 핵에 대해서는 입벙끗하지 못하면서 북의 일방적인 비핵화를 압박하며 무장해제를 강요하고 있다. 자국 민중의 철저한 무권리 상태나 반인권적 사태, 무복지와 사회적 살해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제국주의의 압살 포위 공세 속에서도 실업을 일소하고 무상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에 대해서는 “북한 인권” 운운하며 적반하장의 작태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승인을 기다리며 판문점 선언에서 약속했던 정전선언조차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임시 배치라고 둘러댔던 사드의 영구배치로 민중을 기만하고 있다.
입으로는 노동존중을 외치며 행동으로는 자본존중을 실현하고 있으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으로 전체 사회 정규직 전환을 이루는 마중물은 악취나는 구정물이 되고 영구적 저임금화, 열악한 노동조건의 비정규직화가 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은 “포용성장”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자본의 성장을 위해 노동자에 대한 공세를 은폐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정권은 고위 관료들의 입과 언론을 등에 업고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성토하고 노동자 투쟁의 중심에 있는 민주노총에 대해 사회적 낙인을 찍어 고립시키고 있다.
한국사회 청년노동자들이 집중적으로 당하고 있는 고통은 전체 노동자들의 상태이기도 하다.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대에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다수도 언제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로 잘릴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있다. 계층적으로 ‘청년’ 노동자들의 반대에 있는 ‘노년’ 노동자들 대다수가 퇴직 이후에 빈곤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있다.
노년의 노동자들은 수십 년 이 사회의 생산과 발전에 기여한 대가로 연금으로 노년의 안정적인 삶을 품위 있게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알량한 연금조차도 추가로 개악될 상황에 놓여 있으며 노년은 병고 고독고 무위고로 시달리거나, 60대 대다수, 심지어 70대까지 상당수 노년은 노동고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실업과 청년들의 고통과 존엄하지 못한 노년의 현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의 고통과 죽음은 이 사회 전체 노동자들의 고통과 죽음의 집중적인 표현이다. 한국사회 자본의 지배체제가 낳은 일반적이고 전반적인 모습이다.
자본의 언론에서도 청년들의 삶을 ‘삼포, 사포, 오포, 육포, 칠포’ 운운 신조어를 만들어내서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와 집을 포기한 무기력한 청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태반이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청년 노동자들 대다수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개인이 벗어날 수 없는 천형처럼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청년들의 희망이자 투쟁의 상징 김용균은 불굴의 의지로 고통스런 노동을 감내하며 생전 마지막 시기에는 그것을 투쟁하며 고발했다. 김용균은 2018년 전태일이다.
청년이여 일어나서 자본의 지배체제를 분쇄하자. 삼포칠포는 자본의 지배체제가 조장했다. 자본의 세계는 실업과 청년 빈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비관, 무기력, 자탄과 실의, 패배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삼포칠포는 있으되 청년들의 능동적이고 투쟁하는 모습은 은폐되고 있다.
왜 포기하고 체념하는 청년들의 모습만 부각하는가? 분노하고 투쟁하여 쟁취하는 청년들은 어디로 갔는가? 희망으로 격동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없는가?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 등 청년들은 역사의 고비마다 선진적으로 떨쳐 일어나 구 사회를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역할을 했다. 청년들이 역사를 열어 제치며 투쟁했다.
자본과 권력이 강요하는 경쟁체제의 최전선에서 고통 받고 있는 청년들이 앞장서서 학습해야 한다. 자본물신주의, 이 노동자 살해체제가 어떻게 유지되고 사회적 살해의 직간접적인 당사자들이 어떻게 숭배되고 우상화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자본숭배 체제의 근원을 인식해야 한다.
이 부당하고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원인, 불평등 원인에 대한 역사적 원인, 구조적 원인을 학습하여 진실을 인식해야 한다. 저들은 청년들이 이 사회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거꾸로 현대사를 인식시켰다. 반공주의 종북몰이는 청년들의 과학적, 역사적 인식을 가로막는 마취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본의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역사, 민중학살 위에 들어선 대한민국과 미제 주둔군, 억압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제주4.3항쟁에 나섰던 민중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이 동포학살을 거부한 여순의 군인들과 민중들의 전국적 항쟁과 그것을 백색테러 민중학살로 짓밟은 반역의 역사를 철저하게 거꾸로 인식시켰다. 국가보안법으로 투쟁하는 민중을 학살했으며, 간첩조작 반북선전, 종북몰이로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 민중을 위한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진보적 민중의 투쟁을 왜곡시켰다. 그 대신 반북 종북몰이로 자본주의 체제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대안이 없다는 역사 패배주의를 조장하고 개인에게 체념을 강요했다. 청년들의 삼포에서 칠포는 그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제 청년들이 앞장서서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비정규직 초과착취 체제, 저임금과 무복지 빈곤의 체제를 분쇄해야 한다. 죽음의 외주화를 넘어 죽음의 체제를 분쇄해야 한다. 이제 청년들이 김용균의 죽음을 넘어 살아서 투쟁하는 제2, 제3의 김용균이 되자. 새 세대의 청년들이, 학생들이, 청년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구시대의 어둠을 불사르고 착취와 억압이 없는 새 사회를 건설하자. 노/정/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