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철(에모리대 교수)
미국 중간선거가 끝난 뒤 약 3주 후. 버니 샌더스의 정치적 고향 버몬트의 주도 벌링턴에선 수백 명이 샌더스 재단(Sanders Institute)이 주최한 2박 3일간의 작은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이 컨퍼런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와 시리자 출신의 전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뜻을 모아 출범한 ‘진보 인터내셔널(Progressives International)’의 첫 모임이기도 했다. 컨퍼런스에서는 세계적인 경제 불평등 개선 등 세계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의제들이 논의됐다. 기후변화와 경제 불평등에 대한 대안을 통합적으로 모색하고자 하는 ‘그린 뉴 딜(Green New Deal)’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린 뉴 딜이라는 아이디어는 1929년 대공황 이후 국가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로 경제 재생을 모색했던 프랭클린 D. 루서벨트 대통령의 ‘뉴 딜 정책’과 오늘날 기후변화를 최소화하기 위한 재생에너지 산업 등 환경정책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 개념은 2008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였던 토마스 프리드먼이 처음 제안했는데, 이후 유엔과 유럽연합을 비롯해 다양한 초국적 NGO나 좌파 정치세력도 지지를 표하고 있다. 2012년과 2016년 대선에서 녹색당이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정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그린 뉴 딜 논의는 11월 6일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 다수를 장악하면서 당내 진보블럭의 새로운 의제로 급격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기치를 내걸고 하원의원으로 처음 당선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콜테즈는 당선 직후 가장 먼저 그린 뉴 딜의 구체적인 계획과 입법을 논의하기 위한 의회 내 특별위원회 설치를 발의하고 나섰다. 현재 민주당 내 22명의 의원과 유력 대선주자들이 이 위원회의 설립에 지지의사를 표한 상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조차 녹색 뉴딜을 주창했듯, 그린 뉴 딜 논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그린다. 스스로를 ‘급진적 중도 주의자’로 표현하는 프리드먼의 입장이 시장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녹색경제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샌더스나 오카시오-콜테즈가 추구하는 그린 뉴 딜은 정부 주도 녹색 사회기반시설에의 투자를 통한 기후변화 극복과 불평등 해소가 그 핵심이다. 이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 확충을 위해 연방준비제도를 중심으로 연방과 주 단위의 공공은행을 설립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오카시오-콜테즈에 따르면 10년 안에 100%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은 엄청난 경제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그는 이것이 “미국에서 빈곤을 실질적으로 제거하고 모두가 부와 번영, 경제적 안정감을 향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역사적 기회”를 제공한다고 본다. 이 맥락에서 보면 그린 뉴 딜은 기후변화와 불평등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중장기적 경제변혁 프로젝트인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린 뉴 딜은 미 의회 내 진보적 의원들의 모임 (CPC; Congressional Progressive Caucus)이 추진하는 2019년의 민중예산과 맞물리며 더 큰 파장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민중예산(People’s Budget)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토지와 고소득에 대한 유례없는 세금부과를 통해 부의 재분배와 사회복지를 추구했던 예산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유럽에선 2015년부터 ‘유럽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 감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Watch Europe)’ 등을 주축으로 사회, 경제, 환경 정의의 기치 아래 민중예산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유럽의회의 예산안에 개입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1년 버니 샌더스에 의해 설립된 CPC가 진보적 의제를 담은 민중예산안을 들고 2014년 이후 매년 의회 예산안 결정에 개입해왔다.
2019년 민중예산은 지금껏 가장 포괄적이고 과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예산의 골격은 미국의 노후한 도로, 상수도, 대중교통, 학교 등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2조 달러의 투자다. 나아가 새로운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노동자 등 주변화 된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불평등을 양산하는 조세제도 개혁,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건강보험과 처방약 가격 조절, 정의로운 이민법 개혁, 녹색 산업육성 등 11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의 권력을 다시 민중들의 손에 돌려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 주류가 제시한 ‘더 나은 딜(Better Deal)’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구성이지만, 보다 더 야심찬 규모의 투자와 이를 통한 불평등 구조 완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2019년 민중예산은 민주당 내부에서 나온 예산안이다. 따라서 민주당 외부에서 제안된 그린 뉴 딜과 이질적인 부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둘 사이의 접점도 많다. 두 프로젝트 모두 기본적으로 국가재정으로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해 신자유주의 심화에 따른 정치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목표로 삼고 있다. 게다가 오카시오-콜테즈 등 의회 진출에 성공한 민주적 사회주의 그룹을 축으로 이 두 계획의 공통분모를 키워가려는 분위기 또한 역력하다. 2020년 대선에 다시 도전하게 될 버니 샌더스가 그린 뉴 딜을 기본 정책방향으로 채택하게 된다면, 그린 뉴 딜과 민중예산의 문제의식이 향후 몇 년 간 중요한 의제로 미국 사회와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게 될 가능성이 높다.
▲ 2019년 민중예산
|
이와 같은 진보 의제들이 주목받는 데에는 중간선거 결과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한 점, 그리고 오카시오-콜테즈를 비롯한 많은 진보 성향 인사들이 의회에 진입했다는 요인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중간선거 이후로 트럼프의 정국 장악력은 떨어지고 있고 미국의 정치적 격변은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과 트럼프와의 내통 문제를 다루는 특별 검사의 조사는 더 탄력을 받게 됐고, 세금관련 기록 공개를 거부해왔던 트럼프에 대한 의회 압박도 커질 전망이다.
얼마 전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이 56:41이라는 상당한 표차로 사우디아라비아가 깊숙이 개입된 예맨 내전에서 미군 전면 철수를 결정한 것은, 트럼프의 의회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진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자말 카쇼기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처참히 살해된 이후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지지를 거두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공화당 내부의 반란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2018년 중간선거 결과는 더 복잡하고 중층적인 양상을 띠었다. 한편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후보들이 선전하는 가운데 100여 명의 여성, 소수자 등이 의회로 진입하기도 했지만(이들 다수는 민주당 강세 지역에 출마했다), 하원선거에서 민주당 승리의 상당부분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강세지역에서 보수적인 민주당 후보들이 선전한 결과이기도 했다. 동시에 상원과 일부 하원선거에서는 트럼프가 선거운동을 했던 보수 후보 다수가 승리하면서 트럼프의 힘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그 결과 민주-공화 양당 사이의 정치적 양극화가 더 커졌고, 동시에 민주당 내 좌우간의 정치적 거리도 상당히 멀어지게 됐다.
어쩌면 중간선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음에도 절반에 가까운 미국인이 의료보험 문제를 가장 중요한 선거이슈로 꼽는 등 최저임금이나 경제 불평등이 가장 중요한 선거 의제가 됐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보통 경제상황이 좋을 때의 선거는 정치나 외교 이슈가 쟁점화 되면서 집권당에 유리하게 전개되는데(한국의 87년도 그러했다), 지난 중간선거는 이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는 4%를 넘나드는 미국의 경제성장과 3%대의 낮은 실업률에도 일반 시민들이 경제성장을 체감하지 못하는 탓이다. 주택, 의료, 등록금 따위는 생산성 증가와 맞물려 인상되는데 임금인상이나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의 질은 턱없이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간선거는 상하원을 비롯해 주지사나 시장, 각 행정단위의 검사장과 교육청장 등을 선출하는 것뿐 아니라 각 주나 도시의 의제에 따라 국민투표가 이루지기도 한다. 열 개가 훌쩍 넘는 표를 던져야 하는 곳도 수두룩했다. 이중 도드라졌던 것은 보수적인 주들 에서의 국민투표 결과였다. 공화당 텃밭이며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은 미주리와 아칸소에서는 각각 12불과 11불로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안이 통과됐고, 역시 공화당 텃밭인 네브레스카와 아이다호에서는 공화당이 과거 반대해왔던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장 시스템인 메디케이드(Medicaid) 확대가 결정됐다. 보수성이 강한 유타에서는 의료용 마리화나가 합법화되기도 했다.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전통적인 공화당 강세 지역에서조차 진보적인 정책들을 지지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선거전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보편적 의료보험 시스템, 공립대학 무료 교육, 부자에 대한 높은 세율 등 버니 샌더스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공약으로 내건 진보적 정책들이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미국인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수적 미국인들조차 삶의 질과 연결된 분야에서는 보다 진보적인 정책을 선호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2016년 버니 샌더스의 돌풍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오랜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 전통적인 좌우의 경계선이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민중생존권이 좌우를 넘나드는 핵심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20세기 초 나치와 파시즘의 등장이나 최근 헝가리와 폴란드, 미국 등의 사례에서 보듯, 경제위기 상황에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민중은 쉽게 극우의 이데올로기로 경도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뉴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경제위기는 전면적 경제구조 개편을 통해 최소치의 민중생존을 보장하고, 보다 왼쪽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정치지형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 좌파 정치권이 추진하고 있는 그린 뉴 딜과 민중예산은 신자유주의 단계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정치구도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으로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전 지구적 우경화는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정착되기 시작한 2차 대전 이후의 정치적 경쟁 구도가 신자유주의 시대에까지 연장된 결과다. 의회 내 좌우 경제정책의 차이가 점점 더 좁아지면서 정치이데올로기는 여성이나 소수자의 권리, 다양한 정체성의 문제, 환경 등을 둘러싼 입장의 문제로 갈려 왔다. 이런 문제들이 덜 중요한 것은 아니나 사회적 가치가 경제와 동떨어진 채 정치의 핵심기제로 작동된다면 민중은 제도정치로부터 주변화 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에서 한 달 넘게 진행되고 있는 노란조끼들의 투쟁도 신자유주의의 맥락에서 정치가 ‘정치적 올바름’을 축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기초적인 민중경제의 문제가 얼마나 주변화 될 수 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치 엘리트들과 곤궁한 민중 간의 간극이 커질 대로 커진 오늘, 그린 뉴 딜과 민중예산은 지엽적으로 벌어 지고 있는 민중투쟁의 방향성을 모아낼 수 있는 중요한 축으로 기능할 수 있다. 물론 주류정치의 벽은 높고 그린 뉴 딜이나 민중예산의 의회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민중예산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2017년에조차 하원 435석 중 108석만 지지를 표했 뿐이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를 눈여겨보는 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재생산 위기 심화의 맥락에서 유권자들로부터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현재의 정치판도와 경제구조를 변화시킬 큰 밑그림을 그리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린 뉴 딜과 민중예산의 실험은 한국의 진보운동에도 시사점을 던져주는 바가 적지 않다. 젊은 세대에서 ‘헬조선’이라는 자조가 퍼지고 하청을 통한 ‘죽음의 외주화’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는 것은 전통적인 좌우를 초월하는 현상이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서 부터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는 노인들까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피해자인 건 마찬가지다. 이런 현실에서 사안이 터질 때마다 하나하나 대응하며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는 투쟁방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보다 큰 정치적 그림을 밑바탕 삼아 과거와는 다른 연대축과 정치구도를 그려나가는 고민이 깊어질 때다.[워커스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