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만 작가/ 사진 정운 기자
인물 소개
지민 —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지민은 보안 담당자로 새로 부임한 하미강 대위와 함께 가상 현실 속 평양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홀로 평양을 지키고 있는 김정은을 만난다.
지민은 김정은, 아니 김 주사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선 그의 임무가 무엇인지, 그가 말하는 해방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김 주사를 알고 있는 이는 미강뿐이었기에 지민은 미강을 보았지만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의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말씀하신 임무가 무엇인지부터 들어야겠네요.”
지민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 주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긴 한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주사의 본명은 김형태였다. ‘직원’으로 통칭되는 국정원 요원 중에서 그만 주사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인천시 지방 공무원에서 국정원으로 채용된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탈북민 정착을 지원하는 부서에서 일하던 그는 30대 초반부터 김정은을 빼다 박은 외모였다. 넉살 좋은 성격과 차분한 일 처리 때문에 탈북민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던 그는 국정원 채용 권유를 받고 탈북민 커뮤니티 내에서 대북 정보를 수집하는 일로 국정원 생활을 시작했다. 2025년 이후 국정원은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제안했다. ‘페르소나’라는 코드만 붙은 이 시스템은 이전에 구축된 인공 지능 시스템의 도움을 얻어 김정은과 주변 인물들의 행동을 예측해 대북 협상 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김형태의 역할은 그 시스템 안에서 김정은을 전문적으로 연기할 배우였다.
“나는 단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아내 소원대로 다이어트를 좀 더 열심히 했다면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요.”
김형태는 약 반년간 격리 상태로 김정은을 연기하기 위한 집중 수업을 받았다. 당시 국정원이 동원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해 그를 교육하고, 유사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도록 만들었다. 2년 뒤 김형태를 활용한 ‘페르소나’ 시스템이 그 효과를 입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정상 회담을 조율하기 위한 협상 테이블에 나온 명성철은 대외적으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었다. 3일간 치른 1차 협상 후 국정원은 명성철이 의사 결정권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근거는 반년 전 노동당 대회를 보도한 북한 뉴스 자료에서 명성철이 김정은을 가까운 거리에서 따르고 있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국정원은 명성철을 협상 최종 결정권자로 지목하고 이를 정부 협상단에 알리려 했지만 김형태는 반대 의견을 냈다.
“협상단을 교란하기 위해 반년 전부터 준비한 카드입니다. 명성철은 허수아비입니다. 영상에서 보면 거리상 가깝게 따르지만 김정은은 그에게 시선을 거의 두지 않고 있습니다. 측근들에게 자주 취하는 손짓이나 스킨십도 없고요. 이자는 김정은의 측근처럼 보이도록 연기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책임자는 명성철을 보좌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일 수 있습니다.”
상반된 평가를 놓고 의견이 갈렸기에 협상단은 명성철이 아닌 그의 보좌역에 시선을 집중해 보기로 했다. 2차 협상이 시작되고 하루가 지나자 명성철은 북쪽 협상단에서 교체됐다. 쟁점이었던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은 남쪽 의도대로 정상 회담 전제 조건에서 제외됐다. 김형태는 이후 남북 정상 회담에서 의전 절차나 회담 진행, 경호 등의 계획을 세울 때 김정은의 대역으로 메소드 연기를 펼쳐 보였다. 김정은처럼 생활하고 사고하는 것이 업무가 된 그는 사생활과 자신의 일을 분리시키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김정은의 대역을 맡은 지 4년 후 이혼했지만 페르소나 팀은 북한 지도부에 대한 훌륭한 시뮬레이터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강이 훈련받았던 네메시스 팀의 훈련장에서 특별한 직책이 없는 그의 신분 때문에 네메시스 팀원들은 그를 김 주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몇 년 뒤, 네메시스 팀이 해체되고 난 후 김 주사는 다시 대북 심리전단 페르소나 팀으로 복귀해 김정은에 대한 분석 업무에 투입되었다. 국정원과 정부는 필요한 시기마다 언론에 흘릴 북한 내 쿠데타설을 증명할 만한 자료를 페르소나 팀에 요구했다. 그럴 때마다 팀은 미리 정해진 답안에 그럴듯한 살을 붙여 동향 예측 자료만 생산했다. 김 주사는 자신의 건강 상태마저 김정은과 비슷하게 악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 다음 회사에 퇴직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십 년간 수행해 온 임무 덕택에 그는 김정은 행동 예측에 상당한 수준의 전문가가 되었고 그에게 집중된 기밀 정보의 양도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 유배됐습니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왕국에 말입니다.”
김 주사는 손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분명 햇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교묘하게 배치된 나무와 구조물들로 인해 평양 시내 전경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인민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나는 내가 죽어서 나 혼자만의 지옥에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나서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나는 김정은이 아니니까요. 아니,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처럼 입고 먹고 행동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지민은 그 순간에도 에이도스가 만들어낸 지금 이 공간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 김 주사라는 인물만 홀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지민은 질문했다.
“에이도스, 말해 봐. 북한은 오메가 플랜에 가입되지 않아서 그냥 텅 빈 공간으로 남는다고 했어. 그리고 여기 있는 김 주사가 김정은이 아니란 건 분명해. 그는 자신의 삶 그대로 복원이 되어야 하고. 그런데 어째서 김정은 흉내를 내며 유령처럼 혼자 있는 거지?”
“그건 북한에 대해서는 복원 기준이 그 실체보다 대상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뭔 소리야?”
“북한은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나라라는 이야기예요. 그곳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어떤 삶이 있는지보다는 위협이라는 기능으로서만 존재한다고요. 마찬가지로 빅 프로즌에 생성될 북한 역시 그러한 기능에 맞춰 복원될 예정이고요. 실체는 없고 오직 위협만 존재하는 유령 국가로요.”
지민은 에이도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방문하고 있는 평양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관람객이 들어오지 않는 테마 파크 같았다. 실제 평양을 모사하고 있지만 도시로서의 진정한 기능은 보이지 않았다. 기능을 수행할 시민이 없었기에 그곳은 평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공동체를 단결시킬 수 있도록 외부에서 지속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위협의 기능만 하는 공간. 그것이 평양의 역할이었다.
“새로운 지구의 후손들은 북한이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실체를 본 적은 없고, 항상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괴물로만 인식하게 되겠군요. 이곳을 단지 빈 공간으로만 남겨 놓지 않으려 한 이유를 알겠어요. 단지 빈 공간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테니까요. 결국 이곳에 김 주사를 바탕으로 만든 김정은이라는 위협이 필요했던 거군요.”
지민의 말에 미강은 김 주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은 김정은입니까? 아니면 김정은을 연기하던 김 주사라는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입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원하는, 그렇게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모습의 김정은이오. 텅 빈 왕국에서 홀로 핵전쟁을 꿈꾸며 미사일 발사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미치광이.”
김 주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나 자신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소. 난 기능으로서만 존재하는 인간이 되었으니까. 아니, 아니…. 내가 인간인지조차도 모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