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은 미강의 말에 숨을 멈췄다. 변명을 할지 부인을 할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동안 미강은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정 박사님이 하려는 일을 방해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조치를 했겠죠. 저는 여전히 에이도스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세계가 장래에 새로 복원될 지구와는 별개의 세계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요. 그냥 VR2) 모드로 훈련받는 정도이겠거니 하고 따라 들어와 봤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그게 소름 끼치긴 하지만요.”
미강은 자신의 불룩한 배에 땀으로 젖은 셔츠를 펄럭거리며 중얼거리듯 불평했다.
“땀 냄새 같은 것까지 재현할 필요는 없잖아. 에이도스, 지나치게 디테일에 집착하네….”
지민은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찡그리는 가상 현실용 미강의 얼굴에서 기묘하게 그녀의 원래 표정이 겹치고 있음을 느꼈다.
“이곳 보안대로 온 것은 저를 감시하기 위해서였군요.”
“그것도 임무 중 하나일 뿐이죠. 어차피 오메가 플랜에서 걱정하는 것은 복제 인스턴스가 아니라 오리지날 인스턴스 즉, 원본이 되어야 할 ‘빅 프로즌’이 위변조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거든요. 제가 받은 가이드라인도 그렇게 지정하고 있고요.”
“에이도스는 하 대위가 제 감시자란 것을 알고 있겠죠?”
미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리고 우린 같은 신세잖아요.”
지민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미강을 바라보았지만 입 밖으로 질문을 내뱉지는 않았다.
“아니, 꼭 우리 둘이라기보다는 인류 전체겠지요? 우린 모두 사형 날짜를 받아 놓고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들이니까요. 아모르 파티!3)”
지민은 아빠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다 걸린 아이마냥 아무 말도 못 하고 차 안의 계기판만 쳐다봤다.
“아무래도 제가 정 박사님을 오해했나 봐요. 상부에서는 정 박사님이 뭔가 반체제적인 실험을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일을 보니 그렇지도 않네요.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야겠어요.”
미강의 말이 건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비아냥대는 것인지 지민은 혼란스러웠다.
“기혜영은 정합성에 위반되는….”
“네, 박사님한테는 그저 데이터일 뿐이죠. 오류, 혹은 버그. 저도 이 세계가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란 것쯤은 알아요. 외계인의 컴퓨터 속에 저장된, 우리 세계를 복사해 놓은 가상의 데이터뿐이란 것도. 하지만 가상의 세계일지라도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인물들은 모두 우리의 현실에 기반을 두어 만들어진 게 확실한 거죠? 그렇다면 기혜영 역시 살아 있는 존재겠네요. 이 세계에서는 200일째 혼자서 고공 농성을 벌이는 어린 아가씨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하지만 난 지금 여기 있는 기혜영의 삶을 보고 있는 게 더 좋아요. 일어난 적 없는 사건이고, 앞으로 기록에 남을 사건도 아니지만. 새로운 지구로 가져갈 수 없는 역사라 하더라도 이 순간만이라도 새롭게 쓰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등받이에 육중한 몸을 깊숙이 파묻은 덥수룩한 수염의 남자가 지민을 돌아봤다. 얼굴은 달랐지만 눈빛은 묘하게도 미강의 그것이었다.
“어차피 저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일인데 뭘 그렇게 고민해요?”
지민은 미강을 바라보며 손으로 핸들을 가볍게 두들긴 다음 시동을 걸었다.
“좋아요. 탑 위의 공주님을 구하러 가죠.”
방 안에는 노트북이 어림잡아 15대가량 널려 있었다. 올려놓을 책상마저 부족해서 의자나 선반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은 것만 대여섯 대였다. 게다가 지민은 교양 수업(고전 컴퓨터의 역사) 시간에 사진으로만 본 작은 과자 상자 크기의 장비 수십 개가 UTP 케이블4)에 연결된 모습을 보자니 현기증이 났다. 게다가 모조리 비만 클리닉에 집어넣고 싶은 과체중에 여드름 자국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남자애들의 땀 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저 자식들 속옷은 갈아입고 다니나 몰라. 지민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업데이트된 소식 있어요?”
미강이 묻자 얼굴만 봐서는 누군지 구분이 안 되는 남자애 하나가 다가왔다. 얼굴만 봐서는 구분이 힘들었기에 지민은 마음속으로 빨간 줄무늬라고 표시해 두었다. 정말로 그 녀석들은 죄다 줄무늬 셔츠만 입고 있었다.
“좀 전에 경찰 드론 세 대가 비행을 마쳤습니다. 채널을 스캔해 두었는데 오전 비행 때 사용한 채널과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8개 채널을 돌려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흠, 그렇다면 현재로써는 경찰이 한 번에 날릴 수 있는 드론은 최대 여덟 대까지라는 결론이네요?”
빨간 줄무늬는 짧게 대답한 다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강의 신분이 군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미강이 데려온 줄무늬 셔츠와 여드름 자국으로 무장한 5명의 남자아이들은 정말로 미강의 소대원이라도 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신들도 그렇게 척척 호흡을 맞춰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정작 그들을 데려온 미강은 늘 하던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경찰 드론 통제실을 감시하는 파트와 침투용 드론을 준비하는 조로 나누어 각자의 임무를 주었다. 노땅과 덴샤, 와타시도 합류했다. 노땅은 인근 단지에 빈 오피스텔 하나를 단기 임대했다. 경찰의 탐문 수사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지만 그래도 지원실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단지 외곽으로 밀려 나온 탓에 공장과의 거리는 직선으로 300미터 정도 더 늘어났다.
미강의 계획은 이랬다. 머스탱 샐리 추락 이후 조종을 맡았던 싫어요정과 개타쿠가 혜영의 농성을 지원하는 것을 그만두자 미강은 싫어요정의 라이벌 클랜인 루프트바페를 수소문해 예거K를 찾아냈다. 미강은 싫어요정(데미앙이라는 콜사인을 쓰는)보다 더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줄 기회라고 미끼를 던졌다. 델타폭스 레이싱에서 둘은 맞붙어 본 적이 없었기에 늘 댓글 창을 통해서만 싸웠고 양쪽 클랜의 팬들도 그런 싸움에 슬슬 회의를 느끼고 있을 즈음이었다. 예거K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클랜에서 지원자 4명을 데리고 왔다. 조건은 단순했다. 데미앙을 격추한 경찰 드론의 포위망을 뚫고 자신이 혜영에게 물품을 수송하는 데 성공하면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선언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데미앙이 없는 자리에서 그런 선언이 과연 무슨 소용인지 의문이었지만 미강은 토를 달지 않았다. 예거K는 코스 완주 기록을 측정하는 포뮬러 레이싱에서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었지만 델타폭스에서는 자신 있다고 외치며 데미앙을 자극해 오던 터였다.
미강의 카메라로 열 영상을 찍고 있던 덴샤가 미강에게 다가왔다.
“다시 구토하는 것 같아요.”
덴샤가 건네준 태블릿의 영상을 들여다본 미강은 노땅을 불렀다.
“낮에 경찰에서 구급약품을 올리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노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채권단에서 매각 문제와 농성은 별개로 취급하겠다고 발표한 뒤로 태도를 싹 바꿨어요. 못 견디겠으면 내려오라는 거지. 이대로라면 복직 문제는 매각 조건 한 귀퉁이에도 못 실릴 테고.”
“혜영 씨가 내려오면 정말로 그렇겠죠.”
“염치없는 말이지만, 이젠 정말로 남은 건 혜영이밖에 없어요.”
노땅의 말에 지민은 본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었지만 꾹 눌러 놓았다.
“혜영 씨 농성이 얼마나 더 오래가느냐에 따라서 매각 협상에 복직 문제가 들어갈 수 있다, 그거죠? 유일하게 남은 패는 저기서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는 어린애 하나뿐이고요?”
“혜영 씨는 팻감도 아니고 어린아이도 아니에요.”
미강이 지민의 말을 잘랐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난 혜영 씨가 저곳에서 버틸 수 있도록 물자를 보내는 것보다, 어서 내려와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게 더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이 일에 동의할 수 없어요. 왜 저 사람 혼자서 이 부담을 지고 있는 거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분이 있나요? 없겠죠. 혜영 씨는 남았고 우린 이 밑에 있으니까.”
지민의 말에 노땅은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지민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지민은 한숨을 고른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혜영 씨가 내일 내려오건 한 달 뒤에 내려오건, 아니 1년 뒤에 내려오건 중요치 않아요. 혜영 씨 스스로 내려오고 싶을 때 내려오게끔, 그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해요.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 줘야 해요.”
미강은 방안에 감도는 침묵 속에서 누군가 정적을 깨뜨려 주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깨야 했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방 안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자, 내일 출격 상태 점검합시다! 예거? 내일 일출 시각이 몇 시죠?”
“음…. 오전 6시 22분입니다.”
“좋아요, 적재할 물품들 다시 확인하고 중량을 줄일 수 있는 게 더 있나 한 번 더 확인합시다. 호위기들 작동 상태 점검을 마치면 수송기 테스트에 들어갑니다. 출격은 동이 트기 직전에 시작합니다!”(워커스 19호 2016.7.20)
(계속)
1)Before the dawn – Judas Priest. 1978.
2)Virtual Reality(가상 현실).
3)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
4)Unshielded Twist-Pair 케이블. 흔히 LAN 선이라 불리는 인터넷용 케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