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후퇴할까요?”
로그 원의 말에 미강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안 돼! 그대로! 대형 유지!”
“지금 후퇴하면 우리의 위치만 노출되고 아무 소득 없이 끝날 겁니다. 다음은 없어요.”
예거 K의 말에 미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대의 드론으로 구성된 라푼젤팀은 속도를 올려 냉각탑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먼저 고도를 확보하여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경찰 드론을 막아서기 위함이었다. 이어폰으로 몇 차례 고성이 오가는 동안 로그 원을 둘러싼 레드 원부터 레드 포까지의 드론 네 대는 필사적으로 간격을 확보하며 경찰
드론을 막아섰다.
처음에는 경고방송과 차단기동으로 라푼젤 팀의 진로를 막아서려던 경찰 드론들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오는 모습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찰은 즉시 네 대의 드론으로 포획용 그물을 펼쳤다.
“저놈들 올라오게 놔두면 안 돼!”
포획용 그물은 흡사 플래카드 같은 모양의 폭이 좁고 길쭉한 5m 길이의 인조섬유 그물이었다. 그물은 주로 상대 드론의 날개에 감겨 추락시키는 용도로 쓰였기에 경찰의 드론은 라푼젤 팀의 드론보다 위쪽으로 비행해야만 했다. 레드 원과 레드 투가 상승하려는 경찰 드론 위로 위협적인 동작을 보이자 그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두 대의 드론이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 상공을 점유했다. 로그 원이 화물 때문에 빠르게 상승할 수 없어 속도를 늦추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로그 투와 로그 쓰리가 포획 그물에 걸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마찬가지로 둘을 추락시킨 경찰 드론도 그물이 분리되는 타이밍이 늦어서인지 한 대는 바닥에 떨어져 파편이 튀어 오르는 게 카메라에 잡힐 정도였고, 다른 한 대는 추락 직전에 극적으로 자세를 회복해 로그 원 앞에 떠올랐다.
“적어도 적기 한 대는 떨어뜨렸으니 다행이네.”
“여전히 우리보다 세배 더 많다는 것만 기억해줘요.”
냉각탑 쪽을 망원렌즈로 바라보고 있던 와타시가 말했다.
“혜영 씨는요?”
지민은 냉각탑 상공을 중계하고 있는 영상들을 빠르게 훑어보며 혜영의 모습을 찾아보려 애썼다. 지난 며칠간 그늘막 아래에 힘없이 누워 있던 혜영은 하늘을 할퀴며 프로펠러 소음을 내는 드론의 출현에 놀라 몸을 일으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급품을 실은 로그 원은 그렇게, 혜영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이 가깝게 보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 이상으로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상공을 점유한 경찰 드론은 세 대에서 여섯 대가 되었고 로그 원은 오히려 호위 중인 아군기에게 포위당한 모양새가 되었다.
“로그 원이 좀 더 냉각탑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해!”
“그냥 여기서 투하하면 안 돼요?”
“씨발, 바람 좀 보고 얘기하라고! 여기서 떨구면 빗나가!”
지민은 통신망이 고함과 욕설로 뒤덮이자 이어폰을 당장이라도 뽑아 버리고 싶었다. 미강이 소리쳤다.
“로그 원! 화물 투하는 포기합시다!”
미강의 외침이 들렸다.
“기체를 회수하는 건 포기하고 로그 원을 저대로 냉각탑 쪽으로 돌진시켜요! 완충재는 충분해서 화물이 파손되지는 않을 거예요. 남은 레드 두 대가 어떻게든 길을 터주면…”
“악! 로그 포 다운!”
두 대의 경찰 드론에게 몰리던 레드 포의 프로펠러가 포획 그물에 감겨 바닥에 추락했다. 레드 원은 다급하게 외쳤다.
“혼자서 어떻게 길을 터요?”
미강은 한숨을 쉬었다. 경찰 드론들은 라푼젤 팀의 숫자가 줄어들자 다시 대열을 정비했다. 한 번에 달려들어 로그 원을 추락시키려는 의도였다.
지민이 초조하게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동안 마지막 호위기인 레드 원이 경찰 드론에 몰리다가 두 개의 프로펠러를 잃고 기우뚱거리며 고도를 낮췄다.
“이젠 고속으로 돌진시키는 수밖에 없…”
예거 K가 체념은 그 순간 끼어든 잡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뭐야?!”
라푼젤 팀에서는 들리지 않을 경찰 통신망에서도 똑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저 새끼 뭐야?!”
와타시가 렌즈의 포커스를 다급하게 맞추는 동안 두 대의 경찰 드론이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파편을 남기고 간 자리에는 주황색 섬광의 잔영만 남았다.
와타시가 중계하는 영상이 제대로 포커스를 잡자 누군가 소리쳤다.
“위플래시Whiplash! 저거 데미앙 아니에요?”
팀을 떠난 싫어요정의 콜사인이 다시 들리자 라푼젤 팀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데미앙은 포뮬러 레이싱이 아닌 델타폭스에서 사용하기 위해 특수 제작한 드론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기체는 일반적인 옥타콥터였지만 동체 하단에 전기 열선으로 만들어진 채찍이 달려 있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2m 길이의 채찍으로 상대 드론을 파괴할 수 있었지만 채찍이 상대 드론을 휘감을 때의 충격 때문에 조종자의 드론 역시 순간적으로 자세를 회복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데미앙의 위플래시는 로그 원 쪽으로 접근하던 두 대의 경찰 드론 옆을 스치고 지나며 그들의 프로펠러를 잘라내고는 고도를 높였다. 회전하는 열선 채찍은 밝은 주황색 불빛을 내고 있었다. 경찰 드론의 대형이 허물어지자 로그 원은 빠르게 냉각탑 쪽으로 이동했다.
“투하할 때 안전고도는 10m 이내에요. 고도 유지 할 수 있겠어요?”
미강의 말에 로그 원이 답했다.
“위플래시가 그동안 막아준다면요.”
그들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위플래시는 고도를 높였다가 추락하듯이 경찰 드론의 대형으로 돌진했다. 포획 그물을 펼치고 다급하게 흩어지는 경찰 드론을 쫓아가는 위플래시는 채찍으로 그들의 프로펠러를 가볍게 잘라내며 하늘에 주황색 포물선을 그렸다. 포물선을 중심으로 파편들이 흩어졌다.
“죽여주네!”
“씨발, 경기장에서 한 판 붙자고 할 때는 죽어라 내빼더니!”
로그 원을 조종하는 예거 K는 구시렁거리면서도 화면을 노려보며 로그 원을 냉각 탑 가까이 몰고 갔다.
“자, 공주님. 택배 왔습니다.”
로그 원의 동체 아래에 매달린 카메라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소녀의 모습을 비췄다.
라푼젤 팀은 장비를 수습한 다음 서둘러 밴을 몰고 사라졌다. 작별의 의식은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치러졌다. 예거 K와 레드 파일럿들은 짧게 악수한 다음 재미있었다는 인사만 남기고 사라졌다. 관제를 맡았던 노땅 패거리도 경찰의 수색 때문에 서둘러 짐을 빼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로 갈지, 다음 계획이 무엇인지는 서로 묻지 않았다. 아침을 맞이한 단지 주변은 경찰차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지민과 미강은 옥상에 올라 공장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저곳에 간 물자는 길어야 한 달 분도 안 돼요. 한 달 뒤에도 혜영 씨가 계속 농성을 이어간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그게 궁금하다면 에이도스에게 말해서 한 달 뒤로 시간을 옮겨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지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지금은 알고 싶지 않네요.”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요. 한 달 뒤라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있겠지요?”
지민은 미강의 얼굴을 보며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빙긋 웃기만 했다.
일주일 뒤 미강은 지민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미강은 지민에게 데이터 패드를 열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누구예요?”
“저도 궁금해서 몇 군데 부탁해서 알아봤어요. 신원 추적이 쉽지는 않았지만 힘들지도 않더라고요.”
“설마….”
지민은 다시 한 번 미강이 건넨 데이터 패드의 사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패드에는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한 장은 고등학교 졸업사진이었고, 다른 한 장은 최근에 찍은 사진으로 보였다. 딸과 어머니라고 해도 될 만큼 놀랍도록 닮은 두 사람이 사실 한 명임을 지민도 알 수 있었다.
“기혜영 씨는 우리가 복제 인스턴스 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고등학교 졸업 후에 삼용나노텍에서 삼 년간 일하다가 해고 사태 때 직장을 잃었죠. 그때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남편도 같은 해고자 신세라 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더라고요. 곳곳에 대출과 연체, 차압 기록이 즐비했어요. 하지만 두 아이를 키웠고, 췌장암으로 5년간 투병하다가 작년에 죽었어요. 짧게 요약하면 기혜영 씨의 인생은 그래요.”
“우리가 본 것은….”
“다른 인생이었죠. 정말로 냉각탑 위에서 농성하던 그 여자아이가 이 사람이 맞을까 싶기는 해요.”
지민은 앞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낡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다 못해 쓰러지기 직전의 흔적만 남은 모습이지만, 눈빛을 보면 어쩌면 이 늙은 여인이 냉각탑 위의 그 소녀였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pisode 4 마침)
인물 소개
지민 —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 오메가 섹터의 격리구역 보안책임자
기혜영 — 삼용나노텍 노동자, 정리 해고자 복직을 위해 고공 농성 중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지민과 미강은 원래의 역사에서는 없었을, 홀로 고공투쟁 중인 기혜영의 정체를 파악하려 한다. 가상현실에 접속한 둘은 그에게 지원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드론 파일럿들과 함께 계획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