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지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투쟁
(1) 오키나와 차별의 역사
야스다 유키히로(레이버넷 일본)
[편집자 주] 일본 아베 정부가 최근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재배치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7월에는 경찰기동대 500명을 오키나와 타카에 지역에 배치하고 농성 중인 주민과 시민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발도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열하고 있는 오키나와 반(反)기지 투쟁의 역사와 현재에 관한 야스다 유키히로 레이버넷 일본 공동대표의 글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일본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바다에 둘러싸인 섬, 오키나와. 지금 오키나와의 타카에와 헤노코 두 지역에서는 미군기지에 대한 뜨거운 투쟁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지역의 미군기지 반대 투쟁의 직접 계기는 2000년대 전후 세계적인 미군재편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용산기지 반환과 평택 이전 등의 재편이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도 미군기지 재배치가 계획되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는 주로 미 해병대가 사용 중인 후텐마 기지를 포함해 11개 미군시설 반환과 이에 따른 해병대 재배치가 재편의 중심이었다.
당시, 수 십 년이나 미군기지 때문에 고통 받아 온 오키나와 사람들은 기지반환 발표에 기뻐했다. 그러나 해병대 부대 재배치계획 발표이후, 기쁨은 분노가 됐다. 기지반환은 이름뿐, 20년 지난 지금까지도 반환된 미군 시설은 불과 8%정도로 반환 계획의 핵심이었던 후텐마 기지 반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후텐마 기지 반환”을 구실로 헤노코와 타카에 지역에 새로운 헬기장 건설이 진행 중이다.
미군과 일본당국은 인구밀집지에 위치한 후텐마 기지가 사고 위험이 커, 기지 기능을 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후텐마 기지가 가지고 있는 해병대 시설의 반환이 아니라 이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기지 이전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계속되고, 오키나와 사람 대부분이 이 투쟁을 지지하고 있다.
일본 집권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은 작년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 이어 올해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하며, 개헌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연립여당이 중의원이나 참의원 선거에서 1석도 얻지 못했다. 유력시됐던 현직 장관도 낙선했다. 그 이유는 연립여당이 기지 이전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기지 이전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오키나와의 민심이 선거에서도 명확히 나타난 것이다. 오키나와 반기지 투쟁은, 일부 평화 활동가만의 투쟁이 아니다. 노동자, 서민은 물론, 경제계도 집권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기지 이전에 반대하고 있다.
왜 오키나와의 반기지 투쟁은 이렇게 강력한 것인가? 오키나와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 차별의 역사
오키나와는 19세기 후반 일본에 병합될 때까지,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다. 일본(에도막부)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명나라나 청나라에 책봉을 받았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있는 쓰시마를 닮았지만, 쓰시마에는 왕이 없었고, 류큐에는 왕이 있었다. 1854년 류큐 왕국과 미국이 류미 수호조약을 맺었던 것을 보면, 국제적인 외교권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류큐 처분’(일본의 류큐 왕국 병합)은, 그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타이완, 한국, 만주, 그리고 아시아 각국에 이른 아시아 식민지 작업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도 있다. ‘류큐 처분’이 오키나와의 식민지화였던 것인가 아닌가 하는 학술적인 논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일등 국민으로 여겨지고, 조선인과 류큐인은 이등 국민으로 차별받은 것을 생각하면, 오키나와가 식민지였다는 근거는 충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오키나와 문제와 ‘식민지’라는 말은 항상 따라다닌다. 오키나와에 대한 식민지적인 차별이 깊게 남아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2차 대전 말기에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패전 직전, 일본군은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희생시켰다. 미군의 침공을 저지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본토 결전(일본 본토에서의 미국과의 전투)까지 시간벌기를 위해, 모든 군사적 자산을 오키나와에 투입하고, 철저하게 항전했다. 소년이나 소녀도 미군과의 전투에 내몰렸다. 전세가 기울자, 일본군은 군사정보 누설을 막는다는 이유로 오키나와 민간인을 살해했고, 여자가 미군 포로가 되면 강간당한 뒤 살해된다고 선전하면서 민간인의 투항을 막았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비극적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런 희생을 강요했던 것은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45년 6월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해, 오키나와를 일본 본토 공격기지로 만들었다. 일본군이 사용했던 시설은 미군이 접수했고, 미군은 일본 공격용 비행기 활주로를 건설했다. 오키나와 사람이 대대손손 살아온 마을과 밭은 미군의 활주로 부지가 되었다. 생활터를 빼앗긴 주민들은 활주로 건설로 내몰렸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미군 밑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해 무조건 항복했지만, 오키나와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광대한 농지를 미군에 빼앗긴 채, 주민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미군 점령 하에 있었던 일본은, 1952년 4월 28일, 일미평화조약·일미안보조약·일미지위협정이 발효되면서, 주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주권은 회복되지 않았다. 평화조약 체결 이후도 오키나와는 미군정 하에 남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를 제외한 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것에 대해 오키나와 사람은 분노하고, 슬퍼했다. 전쟁으로 일본의 희생물이 된 오키나와는 종전 후에도 계속 희생해야 했다.
한편, 2013년 아베 정부는 4월 28일을 ‘주권회복의 날’로 정했다. 아베 정부는 이날을 국가적인 기념일로 지정하려 했지만, 오키나와의 강한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오키나와 사람에게 4월 28일은 ‘굴욕의 날’이었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은 아베 정부가 다시 오키나와를 무시하고 있다고 느꼈고 반감은 더욱 커졌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하는 것은 1972년이다. 그때까지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이면서도, 미군정 하에 있었다. 어느 정도 자치권은 있었지만, 오키나와에 일본의 법률은 적용되지 않았고, 미국의 법률도 적용되지 않았다. 미군정 하의 오키나와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인권도 자유도 없었다.
그동안 오키나와 도처에 건설된 미군기지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 때, 오키나와는 요충지가 되었다. 기후나 지형이 베트남과 닮아 치열한 전쟁 연습이 되풀이됐다. 연습 중 사고에 말려든 민간인도 많았다고 한다.
또, 미군 병사에 의한 민간인 살해, 강도 등의 강력범죄도 자주 발생했다. 여성에 대한 성폭행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법률도, 미국의 법률도 적용되지 않는 오키나와에서는 범인에게 형식적인 조사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불만은 1970년 미군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한 ‘코자 폭동’으로 터져 나오면서 오키나와 반환의 계기가 되었다.
비정상적인 미군의 통치는 1972년 막을 내렸다. 오키나와 사람은 드디어 일본에 되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했다. 누구라도 도쿄나 오사카에서 생활하는 일본인과 같이 일본의 법률 아래에서 일본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실제 일본 법률이 적용됐다.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현이 되었고, 좌측통행이었던 도로는 우측통행이 됐으며, 선거도 진행해 오키나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을 실현하고 부자나라가 되고 있었지만, 오키나와는 사탕수수밭과 미군기지를 제외하면 특별한 산업도 없이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곳으로 남았다. 미군은 행정권을 일본에 반환했지만 미군기지는 그대로 남겼다. 미군 범죄도 없어지지 않았다. 일본 법률은 있는데 불평등한 일미지위협정으로 미군은 법을 어겨도 일본 수사권이 미치지 못하는 기지 안으로 도망가 본국에 돌아가 버리면 영원히 처벌받지도 않았고, 피해자 구제도 없었다. 미군 연습 중에 발생한 소음으로 인한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연습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인명피해도 많았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마저 밝혀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 처리됐다.
물론 미군기지나 일미지위협정의 문제는 타 지역에서도 중요한 사회 문제였다. 1970년대 재일 미군 재편기에 도쿄 주변을 중심으로 미군기지가 반환되면서 일본 수도권 지역에서는 미군 사고와 범죄가 격감했다. 그러나 수도권에 있던 미군기지는 없어지지 않았고, 그냥 오키나와로 이전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일본 총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 현에 일본 전국에 있는 미군 시설의 74%가 집중돼 있다.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 총면적은 오키나와 전체 면적의 약 18%를 점유하고 있다. 여기서도 일본이 어떻게 오키나와를 희생시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키나와 주민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1995년, 미군 세 명이 당시 12세 소녀를 납치 감금하고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미군이 일미지위협정을 이유로 범인 인도를 거부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기지 감정은 폭발했다. 그때까지 오키나와 주민들은 견뎌왔지만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어선 것이다. 큰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다. 또 2004년에는 미군 헬기가 대학구내에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미군 당국은 군사기밀을 이유로 일본 경찰이 현장에 접근하는 것마저도 거부하며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미군이 관여한 크고 작은 사건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미군 당국은 지위협정을 구실로 도망치고, 일본 정부는 기껏해야 소극적으로 항의할 뿐, 오키나와에 집중된 미군기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없었다. 오키나와 주민의 토지에 불법적으로 건설된 미군 시설 반환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일본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할 뿐이다. 일미지위협정 변경 요청에 대해 미국이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만 되풀이하며 특별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일본에 반환되었을 때,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기지 문제에 관해 일본 정부가 무엇인가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국의 안색을 살필 뿐, 오키나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희생만 강요했을 뿐이었다. (계속)
타카에 지역 농성장 앞에 경찰이 배치돼 미군기지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출처 : 레이버넷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