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그리드는 정말 좋은 제도입니다. 진짜예요!”
스마트그리드의 개념과 쟁점
박다솔 기자, 김정윤 객원기자
Y 씨의 하루
‘딩동’ 문자 알림음이 요란하다. “서비스 이용요금 15만 6,000 원이 결제되었습니다.” A 이동통신사에서 온 문자다. 휴대전화 요금과 전기 요금이 빠져나갔다. 몇 달 전 A사의 전기를 이용하면 매달 5GB의 데이터를 얹어 준다고 해서 결합상품에 가입했다. 휴대전화 요금 8만 원에 전기요금 5만 원, 그리고 각종 소액 결제까지…. Y 씨는 15만 원 넘는 뭉칫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볼 겸 TV를 틀었다. ‘아뿔싸!’ 높을 대로 높아진 실시간 전기 요금이 뜬다. 시간을 보니 전기요금이 가장 비싼 오후 2시다. 서둘러 끄고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 배터리가 4%밖에 남지 않았지만, 충전은 조금 이따 하기로 한다.
Y 씨는 스마트그리드 기반의 도시에 살고 있다. 스마트그리드는 ‘차세대전력망’ ‘신성장동력’ ‘저탄소 녹색 성장’ ‘소비자 중심’ 등으로 설명되는 에너지 신기술이다. 생소한 단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업계에선 핵심 신기술로 7~8년 전부터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첨단 기기에 붙는 수식어인 ‘스마트(smart)’와 전력망을 뜻하는 ‘그리드(grid)’의 합성어로 지능형 전력망이라는 뜻이다. ‘신성장 동력’ 답게 전력 공급자, 소비자, 에너지 기업 등이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술의 기반 기기는 ‘스마트 계량기(미터)’로 미세한 전력 사용량까지 잡아내는 민감한 전력 계량기기다. 이른바 올인원으로 전력을 포함해 가스, 수도 등의 정보까지 한 번에 담을 수 있다. 이 스마트 계량기가 각 가정과 사업자에 설치되면 실시간 전력 사용량 등의 정보가 체크된다. 소비자와 공급자, 쌍방향 정보 공유를 통해 전력 사용 효율화와 피크 전력을 낮출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전 가정에 스마트 계량기를 보급하고 실시간 요금 제도를 정착시킨다는 계획이다. 정부의 논리에 따르면 소비자는 실시간으로 전기사용량을 체크하며 시간마다 달라지는 요금에 주의해서 전기를 사용하게 된다. 전력 사용이 많아지는 피크 시간대(오후 2시~3시)엔 요금이 높아지는데 그 시간대를 피해 전기를 쓰라는 것(피크 요금제). 스마트폰과 연동해 밖에서도 각종 기기를 작동할 수 있다. 전기 공급자로선 피크 시간대 전력 사용량이 줄어드니, 수급 관리가 쉬워진다는 장점이 있다.
발 빠르게 많은 투자…결과는?
전력에 IT(정보통신)기술을 더한 스마트그리드 사업엔 다양한 영역의 기업이 참여한다. 전력업체, 계량기 제조업체, 네트워크업체, 소프트웨어 및 제어솔루션업체 등이다. 특히 전력 판매 소매시장을 개방하는 흐름과 맞물려 다양한 판매 상품들이 나올 수 있다. 이동통신업체들은 휴대폰, 인터넷 상품에 전기를 끼워 팔 수 있게 된다. 지난 4월 전력 소매시장이 전면 개방된 일본의 경우, 한 철도회사에서 자사 전기사용자에게 전철 정기권을 묶은 결합상품을 내놨다. 전기차 역시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그리드 구축 사업엔 전기자동차 충전 시설도 포함돼 있다. 투자처가 필요했던 기업엔 새로운 시장이 열린 것이다.
정부도 2009년부터 추진단을 만들고, 기술개발과 사업 확산에 나서고 있다. 한전은 2020년까지 모든 전기 사용 고객인 2,000만 호에 스마트 전력 계량기 설치를 목표로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250만 호 교체를 완료한 데 이어 올해 200만 호를 교체할 예정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실증단지를 제주 구좌읍 일대에 구축하기도 했다. 171개 회사가 참여한 12개 컨소시엄도 1,700억 원을 투자해 사업에 참여했다. 민간 투자금을 포함해 2,500억 원을 들여 구좌읍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3만 대 이상의 스마트 계량기가 설치됐다. 하지만 민간 기업의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이 나오지 않아 답보 상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30조 원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 중이지만 논란은 만만치 않다. 쟁점을 하나씩 점검해 보자.
쟁점 1, 블랙아웃(대정전) 방지
2011년, 9월 15일. 때아닌 무더위에 전국의 전기수요가 급증했다. 발전소가 셧다운(작동 중단) 돼 있던 상태라 예비 전력률은 바닥을 쳤고 급기야 아무 통보 없이 지역별로 돌아가며 정전이 됐다. 대규모 순환 정전 사태였다. 정부는 스마트그리드의 장점인 정확한 수요 관리를 통해 블랙아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하지만 이견도 팽배하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정부가 스마트그리드를 말하면서 블랙아웃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생산과 수요를 균형적으로 만들자는 것인데, 기본 전제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2011년 빚어진 블랙아웃은 사실 수요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이유 때문이지만 이후 발전소가 증설돼 블랙아웃 걱정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전력노조 출신 이경호 공공노련 사무처장 역시 블랙아웃 염려를 일축했다. “지금은 사용량이 급격하게 늘어날 요인이 없다. 전력 소비 중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4% 정도밖에 안 되고 산업용도 에너지를 절약하는 체제로 유도할 일만 남았다. 매번 빗나가는 수요 예측 모델을 개선하면 된다.”
쟁점 2, 소비자 부담
“그래서 전기요금이 올라가나요, 줄어드나요?” 전기요금은 소비자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다. 스마트그리드 사업은 언뜻 보면 전기를 싸게 쓸 수 있는 선택권을 쥐여 준 것 같다. 하지만 전력 판매 소매시장을 민간에 개방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위험 요인이 더욱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한전 관계자는 “수익성 있는 사업모델 없이 사업을 허가할 경우, 요금 서비스 부문의 편익 창출 없이 대기업에 판매시장만 개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이경호 사무처장은 소비자가 기업에 ‘현혹’당할 것으로 예측했다. “효율적 시장을 만든다고 하지만 민간 기업이 진출하면 이윤을 목적으로 싸우게 되고 결국 몇몇 독과점 기업들만 남는다. 처음엔 소비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 비슷한 요금제, 결합상품이 남아 그 몇 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의 필요가 아니라, 기업의 필요에 따라 소비하게 된다.”
쟁점 3, 에너지 절약과 효율
그렇다면 에너지 절약과 효율의 문제는 어떨까? 정부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배출전망(Business As Usual, BAU) 대비 37%의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작업이 최우선이다. 가정집과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싼 전기를 마구 쓰는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규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스마트그리드 사업은 수요 절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피크요금제 하에선 비싼 시간대의 에너지 소비는 줄어든다고 해도 싼 시간대의 에너지 소비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실제 2010년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스마트그리드 만족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효율성이나 절약 등의 변화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스마트그리드 사용자와 비사용자, 각각 300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비사용자 집단의 만족도가 더 높게 나왔다. 특히 사용자 집단은 에너지 효율성과 사용 편의성 항목에서 비사용자보다 만족도가 낮았다.
쟁점 4, 에너지 불평등
게다가 스마트그리드는 빈곤층을 에너지 사용에서 더 소외시킬 공산이 크다. 일정한 시간이 전력 소비 피크타임으로 굳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생활 패턴 상 그 시간에 가장 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름철 가장 더운 오후 2시~3시에 냉방 기계가 필요하므로 사용량이 급증하는 것이다. 피크 타임에 더 많은 요금을 부과하는 일은 빈곤층에겐 심각한 문제다. 빈곤 가정은 겨울에 가스보다 전기를 이용해 몸을 덥힌다. 효율이 낮은 오래된 가스보일러는 가스 요금이 많이 나와 거의 틀지 못한다. 가장 추울 때 전기장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노인이나 유아에게 치명적이다.
쟁점 5, 정보인권침해와 해킹
사생활 침해 우려는 스마트그리드가 처음 얘기됐을 때부터 나왔다. 스마트 계량기엔 시시각각 전력, 가스, 수도 등의 정보가 입력된다. 아주 작은 전력 사용까지 민감하게 체크해 데이터화한다. 이 데이터는 전력 소비 계획을 짜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민간 기업에 넘어가 기업의 마케팅 소스로도 활용된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전력 정보를 분석하면 집에 사는 사람의 숫자, 가전제품의 종류와 개수, 생활 사이클은 물론 범죄 여부를 추정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범죄에 활용될 수도 있는 고급정보”라고 말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2011년 위키리크스는 스마트그리드를 대중감시 산업이라 지칭하기도 했다.
쟁점 6, 건강 위험
스마트그리드 계량기의 전자파는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심각한 불안 요소다. 지난 2012년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잠재적 스마트그리드 소비자를 연구 대상으로 선정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스마트 계량기의 전자파를 가장 불안한 요소로 꼽았다.
실제로 스마트 계량기를 먼저 도입한 외국에선 건강 문제로 스마트그리드 사업 자체가 좌초한 경우가 있다. 2012년 1월 캘리포니아 주 서부 샌타크루즈 카운티는 건강과 정보 인권 침해를 이유로 스마트그리드 사업을 중단했다. 캘리포니아 샌타크루즈 카운티 감사위원회가 2011년 12월 카운티 보건기관에 스마트 계량기의 건강상 효과에 관한 조사를 의뢰한 결과, 스마트 계량기로 건강이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드러났다.
조사를 이끈 포키 냄컨 박사에 따르면, 스마트 계량기는 24시간 내내 펄스 방사선(일종의 전자파)을 방출하며, 스마트폰이 방출하는 전자파의 53배를 내뿜는다. 그는 “무선주파수(Radio Frequency, RF) 방사선 노출 시 안전하다는 과학적인 자료는 없다. 불확실한 안정성, 기존 및 잠재적 피해의 사례에 근거하여 안전 측면에서 예방 조치를 해야 한다. 스마트 계량기 노출의 2가지 특성은 첫째, 거의 모든 가정에 해당하는 의무적인 설치로 인해 방사선 노출이 보편적이라는 점, 둘째, 무의식적 노출이라는 점이다. 공공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는 정부 기관은 무의식적 환경상의 노출 문제에 훨씬 더 경계해야 한다. 최고의 조치는 전자파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무선주파수(RF) 방사선에 노출될 경우 혈액뇌장벽의 투과성 증가, 정자에 악영향, 발암을 초래할 수 있는 DNA 손상, 뇌 포도당 대사 변형, 독소 노출 시 증가하는 스트레스 유전자 활성화를 포함한 사례가 있다”고 덧붙였다.
쟁점 7, 스마트 계량기 도입에 따른 검침원 일자리
정부의 스마트그리드 계획은 검침원의 일자리도 위협한다. 한전은 2022년까지 전국 가정 2천만 호에 스마트 계량기를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스마트 계량기는 에너지 데이터를 촘촘한 시간 단위로 수집해 저전력 라디오 주파수로 한전에 전송한다. 기존 계량기는 사용량을 체크하는 검침원이 필요했지만 스마트 계량기는 검침 인력이 필요 없다. 전국 전력 검침원은 5,000여 명. 이들은 지난 3일 비상대책위를 꾸려 검침 노동자의 고용 및 생존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가스, 수도 검침원의 일자리도 풍전등화 상황이다. 스마트 계량기는 전기뿐만 아니라 가스, 수도까지 검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격 검침이 시행되면 검침원 1만 명 이상의 일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쟁점 8, 화재 위험
스마트 계량기가 화재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미국 매릴랜드 주 스마트 반대 운동모임인 ‘메릴랜드 스마트계량기인식’에 따르면, 2014년까지 미국에서 발생한 화재의 약 900건이 스마트 계량기와 관련된 것으로 나타났다. 오리건 주에서는 3건의 화재가 일어난 뒤 스마트 계량기 7만 개를 교체했다. 캐나다 서스캐처원에서는 과열 계량기가 제기된 뒤 10만 5,000개를 교체했지만 화재와 기계 교체 작업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결국 스마트그리드는 ‘스마트’하다기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래도 녹색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기술상의 문제점을 개선해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에너지 효율도, 사용량 감소도 보장하기 어려워 녹색성장에 미치는 한계가 분명하다. 정부는 그래도 ‘녹색’이라는데 과연 남은 쟁점은 무엇일까? 또 스마트그리드는 민영화와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