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즈데이는 세 번째 바나나 우유를 마신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네가 가야 할 곳이 있어.”
지민은 당장 접속을 끊고 웬즈데이의 존재를 에이도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웬즈데이가 이미 말한 것처럼 에이도스는 응답하지 않았다.
“의심이 많은 성격이구나?”
웬즈데이의 말에 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못 박혀 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평범한 중학생의 얼굴을 한 역사상 최악의 해커는 빙긋이 웃었다.
“좋아, 의심은 지성의 출발점이니까. 이 세계에서 나를 만든 것은 너야. 네가 벌인 그 깜찍한 장난은 이곳의 복제 인스턴스만 건드린 게 아니야, 연쇄 반응이 일어났지. 일종의 나비 효과랄까? 128개의 모든 오메가 섹터들이 각각의 복제 인스턴스를 가지고 있어. 네 날갯짓은 그것들에게 폭풍을 몰고 왔지.”
“하지만… 복제 인스턴스들은 모두 격리된 것 아니야?”
웬즈데이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도스는 하나이자 전부야. 그런 소리 못 들어봤어? 그 깜찍한 외계인들이 그건 안 알려 줬나 보네? 격리는 오리지널 인스턴스로부터 격리된다는 소리지, 복제 인스턴스들끼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렇지 않다면 복원될 세상은 무수한 섬처럼 서로 고립된 세상이 될 테니까.”
지민은 조금 전 눈앞에서 사람을 돌로 쳐 죽인 소녀의 말을 믿고 길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흥미를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잠깐, 나 버스 카드 충전 좀 하고.”
웬즈데이는 종종걸음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오면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지민에게 변명하는 말투로 말했다.
“딱 버스 카드 충전할 돈밖에 없었어. 사실 날아갈 수도 있는데 그럼 특이점이 너무 강해져서 에이도스가 알아차릴 거야.”
지민은 피식 웃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웬즈데이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1시간 동안 버스와 전철을 오가며 지민을 끌고 다녔다. 둘이 탄 시외버스는 오산 근처의 물류 창고가 있는 들판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그곳까지 오는 동안 웬즈데이는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자신이 《승정원 일기》의 데이터 흐름을 통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지금의 중학생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에이도스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지는 모호하게 설명했다. 지민은 자신이 폴라리스 시스템을 저지할 당시 한종철 의원을 끌어들인 일을 생각했다. 한종철은 국제 해커 연대인 고스트 라이더를 끌어들였고 덕분에 그 그룹의 리더였던 웬즈데이가 FBI에 노출되었을지 모른다. 십수 년 뒤 체포되었어야 할 이 악명 높은 해커는 지민 덕분에 일찍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웬즈데이와 그의 클랜2은 국제적인 아동 포르노 사이트의 고객 명단을 입수하여 그들의 거래 기록을 토대로 회원 명단을 전 세계에 폭로할 계획이었다.
“애슐리 매디슨3이 털린 것은 애들 장난처럼 보였을 거야. go.kr 4로 끝나는 이메일 주소가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 줬어야 하는데.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다 못 한 일 때문에 아쉽지는 않아. 여기도 재미있어. 여전히 엉망이긴 하지만.”
웬즈데이는 멀리 외따로 서 있는 창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까지만 가면 돼. 너한테 보여 줄 게 저기 있어.”
창고가 보관하고 있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어둠 때문에 안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눈이 차츰 익숙해지자 지민은 불을 켜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순간 지민은 미강도 같이 데려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만 적어도 총을 쏠 줄 아는 사람 하나 정도는 동행으로 삼는 편이 든든했을 것이다. 지민의 불안을 확인시켜 주듯이 그의 등 뒤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웬즈데이?”
지민의 떨리는 목소리에 곧이어 한쪽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어. 설마 너를 여기 가두고 나만 나간 줄 알았어?”
“여긴 왜 데려온 거야? 뭘 보여 주고 싶은 건데?”
“보여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보여 주지 못한 것이 있어서지.”
목소리는 좀 더 가깝게 다가왔지만 어쩐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웬즈데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지민을 향해 속삭였다.
“가만히 소리를 들어 봐.”
웬즈데이의 말대로 지민은 숨소리도 죽인 채 창고 안에 흐르는 적막에 귀를 기울였다. 바깥에서 나는 소음과 바람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 이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둠이 내는 소리뿐이었다. 지민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 하자 웬즈데이는 다 보고 있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쉿! 항상 맴돌고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하고 스쳐 가는 소리야. 네 안에서 나오는 소리이기도 하고.”
이건 또 무슨 명상 수업 같은 소린가? 지민은 한숨을 쉬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고 웬즈데이의 말을 따라 희미한 소음과 소음들 사이의 틈바구니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한기가 느껴졌다. 울음소리 같기도, 비명 같기도 한 것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구체화되지 못한 흐느낌처럼 다가오다가 이내 언어의 모습을 갖추고 지민에게 다가왔다. 비명과 절규, 원망, 분노의 언어들이 흐르고 있었다. 지민은 두 발로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귀를 막고 싶었다.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일주일 뒤, 지민은 덜컹거리는 LTV 5의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계급장이 달리지 않은 해병 전투복을 입은 그녀는 옷의 감촉이 익숙지 않아 연신 목덜미 주변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수석에 앉아 있던 미강이 룸미러로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복이 어색하시죠? 정 박사님.”
미강은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무장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뒤따르는 트럭에는 2개 분대의 완전 무장한 병력이 따르고 있었다.
“꼭 이렇게 요란하게 갈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지민은 투덜거렸지만 미강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민간에는 군사 작전으로 보이는 게 여러모로 시선을 덜 끌죠. 게다가 그 창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미강의 말처럼 지민이 빅프로즌에 누락 가능성이 있는 자료에 대한 수집을 요구했을 때 팀장이 난색 하며 거절했는데도 성사될 수 있던 것은 미강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자료의 보존 처리에 대한 업무는 지민이 모두 도맡기로 하고 현장에서 수거해 오는 일은 미강이 자신의 경비 대대 중 일부를 차출하여 맡기로 한 것이다.
지민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창고가 있는 방향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앞에 공터가 있어요.”
지민이 탄 LTV는 트럭에 탄 경비 대대의 병사들이 모두 내려 창고를 둘러싼 다음에 공터로 진입했다. 소대장이 차로 다가와 주변을 모두 포위했음을 알리자 미강은 그제야 차에서 내렸다. 절단기를 든 병사가 문 앞에서 진입을 준비하고 엄호를 위해 소총수들이 그의 양옆으로 호위 진형을 갖추자 미강은 지민을 돌아보고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창고 회사랑은 공문 처리 다 끝난 거죠?”
“네, 그쪽도 부도 처리 중이라 정신없다네요. 그냥 열쇠 하나만 들고나와 주면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뭐, 핑곗김에 애들이랑 바람도 쐬고 좋죠.”
미강이 손짓으로 신호하자 절단기를 든 병사가 자물쇠를 잘라 내고 곧이어 창고의 문이 열렸다. 대기 중이던 병사들은 빠르게 두 갈래로 나뉘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누군가가 배전반을 찾았는지 창고 안의 조명이 켜졌다. 창고 안의 적재물 사이를 빠르게 수색한 병사들이 다가와 맥 빠진 얼굴로 특별하게 보고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보고를 했다. 미강은 쓴웃음을 짓고는 한마디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창고 안에 들어선 지민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고의 한쪽 구석으로 미강을 안내했다. 미강은 만약을 대비해서 뽑아 들고 있던 권총을 허리춤에 다시 되돌려 놓은 다음 지민이 가리킨 방향에 있는 판자 위의 비닐을 걷어 내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강은 처음에는 판자 위에 붙은 낡은 종잇조각들 전체를 바라보다가 한 장 한 장 그곳에 쓰인 글귀들을 읽어 내려갔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그녀의 입매는 조금씩 단단하게 굳어졌다. 눈은 빠르게 메모와 얼룩들 사이를 좇아갔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민이 먼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판자 하나를 잡동사니 사이에서 꺼내고 있었다.
“이건 2021년. 부산에서 죽은 중학생. 대위님이 방금 본 것은 2016년 강남역에서 죽은 여성의 추모 메시지였고요. 이런 추모 메시지 보드가 이쪽에도 열댓 개는 더 있어요.”
“여자 한 명이 살해당할 때마다 이런 보드가 하나씩 늘어난 셈인가요?”
“그렇진 않고요. 추모의 벽은 서울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에도 있었어요. 아, 여기 이건… 헤어진 남자 친구가 몸에 휘발유를 끼얹어 태워 죽이려 하자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냇가로 달려가는데 남자가 그 뒤를 쫓아 돌로 쳐 죽인 사건 때 추모 벽보들이네요.”
“그게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사건 맞아요? 파키스탄이나 이라크, 뭐 그런 데 말고?”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강은 한숨을 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포스트잇을 고정한 보드들을 둘러보았다.
“이것들이 누락된 것은….”
“정부 차원에서 보존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하다가 여성 단체들도 더 이상 보관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죠. 그리고 보는 것처럼 재정 문제 때문에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 창고로 오게 된 거예요. 이 메시지들을 데이터화한 아카이브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운영 비용 문제 때문에 얼마 못 가 사라지고 말았어요. 이 창고 회사에서 낸 보관료가 연체된 장기 보관 물품의 매각 처리 공고 때문에 발견하게 되었고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웬즈데이가 그 흔적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못 찾았을지도 모른다. 에이도스가 《승정원 일기》를 검증하기 위한 연산을 시도하는 중에 128개의 에이도스 사이에서 대량의 트래픽이 발생했다. 웬즈데이는 그 트래픽을 타고 흘러들었다. 소녀가 지민에게 알려 준 것은 단순히 누락될 뻔한 정보가 아니었다.
“이건 목소리야. 남자의 언어로 쓰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여자들의 목소리들이지. 생각해 봐. 빅프로즌에 저장된 정보라는 것들이 누구의 언어로 쓰인 것들인지. 너희의 그 《승정원 일기》, 아, 정말 대단하고 집요한 결과물이지. 하지만 그것에 함께 시대를 살았던 여자들의 언어도 포함되어 있던가? 내 조건은 이거야. 여자들의 언어를 찾아내서 다시 돌려놔.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시작은 될 수 있어. 그렇게 해 준다면 내가 네 복제 인스턴스에 가한 변형은 다시 복구해 주지.”
오메가 섹터로 옮겨진 보드는 모두 스물두 장이었다. 지민이 존재를 파악했던 것보다도 훨씬 적은 숫자였다. 거리에서, 또는 집 안에서 살해당한 여성이 늘어 갈 때마다 추모의 쪽지들은 거리에 붙었고 그것들을 옮겨 보존하려는 시도들은 시간의 풍화 속에서 먼지로 변해 갔다. 이제 남은 한 줌의 목소리들을 보존고로 옮긴 지민은 《승정원 일기》 처리 작업을 마친 분과 연구원들과 함께 메모들을 촬영하고 그것들을 텍스트 데이터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수만 장의 메모들은 이미지화되었고 OCR 판독기로 옮겨져 텍스트 데이터로 저장되었다.
지민은 보존실 한쪽 구석에 놓인 스물두 장의 보드를 돌아보았다. 지구가 사라질 때 저것들은 재조차 못 남기고 불타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기록하고 있는 외침들은 새로운 세상에 전달될 것이다. 단지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비명은 그렇게 기록되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지민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보낸 《승정원 일기》의 완역본을 발견했다. 표지는 결국 돋을새김 으로 결정했나 보다. 지민은 피식 웃고는 책장을 들춰 일기의 한 장을 소리 내 읽어 보았다.
근년에 역적 가문의 딸을 취하여 며느리로 삼은 자가 해조에 정장(呈狀)하여 이혼하도록 허락한 예가 자주 있었으니, 더구나 이 역적 괴수의 딸을 그대로 사묘(私廟)의 제사를 주관하는 며느리로 삼는 이치는 절대로 없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하니, 답하기를,알았다.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데 내치는 것은 불쌍하니, 강등시켜 첩으로 삼게 함으로써 인정과 의리가 아울러 행해지도록 하라.6
1 IT’S A MAN’S, MAN’S, MAN’S WORLD – James Brown. 1966.
2 clan. 씨족, 일족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어 일종의 당파를 의미함. 온라인 게임상에서는 길드와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3 기혼자들의 불륜을 목적으로 하는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 2015년 해킹 사태로 회원 명단이 유출된 사건.
4 대한민국 정부 기관 종사자의 메일 주소 끝자리.
5 Light Tactical Vehicle, 소형 전술 차량.
6 《승정원 일기》 인조 6년(1628년) 11월 25일. ‘역적 가문의 시집간 딸을 칠거지악에 속하지 않는데도 이혼시켜야 하는가’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를 보고하는 예조의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