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새벽 1시경, 강남역 인근 공용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가해자는 12시 33분부터 숨어 표적을 기다렸으며, 6명의 남성 이용자를 제치고 1시 7분쯤 화장실에 들어간 최초의 여성이 피해자가 되었다. 가해자의 동기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였다.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피해 여성의 죽음을 추모하는 메시지로 가득 찼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은 우리 사회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사회임을 확인시켰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 혐오 사회에 대한 증언의 현장이었다. 나는 19일부터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진행된 추모제와 반 여성 혐오 자유 발언대에 함께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곳으로 달려갔다.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밤이 그곳에 있었다. 이 사회 속에서 여성이 삼켜 낸 폭력과 혐오의 경험들이 발화되고 연결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여성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성 폭력을 경험했음을 알았다. 남아 선호 사상에 의해 많은 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아갈 기회조차 박탈당했으며, 아주 어릴 적부터 고정된 성 역할과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나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원하는 ‘예쁘거나 섬세한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자존감을 앗아 가는 폭언과 모욕을 겪었다. 그때의 기억은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상기할 만한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고 자존감을 가질 수 없는 등 영원에 가까운 고통으로 남았다.
실제로 성폭력 피해를 처음 경험하는 시기는 아동·청소년기가 40%로 가장 높다고 한다. 그러나 성폭력에 노출되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국가 대책은 터무니없다.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은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의 옷차림에 전가하고, 교칙을 통해 ‘정숙한 여성’이 될 것을 강요한다. 동시에 가장 강력한 착취의 대상이 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건수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아동·청소년의 성적 대상화 역시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메갈리아에서는 아동을 성애화한 일본 잡지들이 논란이 되었으며, 소아 성애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여성 청소년들은 사건 이후 집에 더 빨리 들어가고, 더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통해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를 목격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발화는커녕 침묵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남역 살인 사건은 조심하든 조심하지 않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했다. 여성이 진정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등한 권력과 성적 주체성을 누려야 한다는 것 또한 말이다.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성과 권력을 쟁취할 때만 우리는 진정 안전하고 자유로워진다. 청소년 역시 그러하다. 이 사회 속에서 청소년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만, 모든 인간에 대한 진정한 보호는 그들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일이다.
청년좌파는 6월 5일, 청소년 페미니즘 집담회를 열어 여성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요받은 침묵을 거부하고, 청소년이 겪는 여성 혐오와 보호주의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각자의 공간에서 ‘어린 년’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다음 모임, 그다음 모임에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의 일부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집에 일찍 들어와라’, ‘조심해서 다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일상 속의 공포가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요.”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저는 우연히 살아남았어요. 살아남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학교에서 여성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일은 어떤 일인가요?
“머리를 묶었을 때 드러나는 목선이 야하다고 머리를 못 묶게 해요. 짧은 양말을 신으면 드러나는 복사뼈가 야하대요.”
“브래지어, 생리대 등 여성의 성을 드러내는 것들은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아요. 생리대는 꼭 담요에 꼭꼭 감싸야 하고, 브래지어 끈이 내려가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색이 있는 속옷을 입으면 브래지어가 비친다고 한바탕 소동이 나요. 조금만 다리를 벌리고 앉아도 정숙하지 못하다고 혼이 나요. 여자로 태어난 게 죄인가 봐요.”
“그들의 변태적 상상력을 우리에게 이입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일동 웃음)
‘의제 강간 연령 상향’ 등의 법안이 제출되었는데요. 의제 강간 연령은 합의로 성관계를 해도 강간죄가 성립되는 연령대를 의미합니다. 이는 아동·청소년이 미성숙하여 쉬이 성 착취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발의된 법안입니다. 일각에서는 의제 강간 연령 상향이 청소년의 성적 주체성을 억압한다는 의견이 있는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학교에서는 청소년의 옷차림과 성적 주체성을 억압하는 교칙을 두고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서야’라고 이야기해요. 의제 강간 연령 상향 같은 것도 비슷한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보호라는 이름으로, 아직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성적 주체성은 억압돼요.”
“여성 청소년이 성적 주체성을 부정당하고 성폭력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미성숙하여 판단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에요. 비뚤어진 성별 권력과 나이 권력을 바로잡아야 해결되는 것인데, 약자를 더 강하게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청소년에게 성은 금기시되고, 스스로 젠더나 성폭력에 대해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겪어 온 폭력, 젠더에 대한 고민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폭력을 겪으며 고립되는 경험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의제 강간 연령 상향, 청소년의 자기 표현을 규제하는 교칙 등을 바꾸기 위해 학교와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그런 것들을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워커스14호 2016.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