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일그러진다.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이야기가 안 좋은 소식인지, 녀석은 담배를 연신 입에 가져간다. 남색 노조 조끼와 그 색깔만큼 검게 탄 얼굴을 하고,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영 모양 빠진다. 도로변에 야외 테이블을 깔아 놓은 술집이라, 여름 습기와 치킨 냄새에 버무려진 담배 연기가 여기까지 건너온다. 전화를 끊고도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서야 거대한 재떨이에 꽁초를 던지고 일어선다. 테이블에 돌아오자마자 남은 소맥을 벌컥거리곤 입을 연다.
“가해자가 명예 훼손으로 고소했대, 피해자랑 대책 위원을.”
흠…. 결국 거기도 그렇게 되는구나. 예상했던 일인데도 녀석의 얘기를 들으니 기운이 빠진다. 요즘은 운동 사회 성폭력도 대부분 명예 훼손 소송으로 가는 것 같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침묵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가해자들은 무슨 수순처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해 버린다. 예전엔 그래도 ‘우리’의 일을 ‘사법부’로 가져가는 것에 대한 주저함이랄까, 창피함이랄까 그런 감정이 일말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분위기조차 사라진 것 같다.
“그 자식 진짜 그렇게 나쁜 놈 아닌데. 지역 조합원들 서울 오면 늘 늦게까지 같이 뒤풀이 하면서 챙기고, 조직 사업도 잘하는데. 진짜 억울하긴 억울한가 봐.”
무심코 말을 뱉고는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다. 피로감이 몰려온다. 지난겨울 녀석이 있는 노조에서 성폭력대책위가 꾸려진 이후, 조언이 필요하다면서 종종 연락을 해 왔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고민하려는 것 같아서 이렇게 한 번씩 만나서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 요즘은 피로감이 많이 든다. 언젠가부터 1년에 한두 번쯤은 지인들로부터 성폭력에 관한 연락을 받는다.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연락해 온 지인도, 피해자도, 가해자도 다 달랐다. 그럼에도 대부분 ‘같은’ 상황이었고, 나는 ‘같은’ 얘기를 반복할 때가 많다.
“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내가 또 뭐 잘못 말했나?”
내가 이 녀석과 그 ‘같은’ 얘기를 또 하는 게 도움이 되긴 하는 걸까, 라는 회의감이 한 자락 스친다. 한숨이 나온다. 아니다, 도움이 되긴 될 거다. 생각해 보면 내가 피해자거나 대책위원이었을 때 누군가 이런 놈들 옆에서 말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열기가 누그러진 바람 한 자락이 분다, 피로와 회의감을 털어 본다. 녀석의 말에 슬쩍 웃음이 나는 걸 참으며, 좀 쏘아붙여 본다.
“니네 회사 사장도 그렇게 나쁜 놈 아닐지도 몰라. 집에 가면 딸 바보에 괜찮은 남편일지도 모르지. 근데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지난번 파업 때, 사장이 용역 100명 배치해서 노조원들 줄줄이 피 흘리며 병원에 입원했었다며. 용역 배치한 사장이 집에서는 괜찮은 아빠인 거랑 무슨 상관이냐구? 왜 구조의 문제를 자꾸 개별 인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거야? 그리고 왜 아직도 가해자와 같은 위치에서 말하는 거야!”
“아니, 내가 언제 가해자 위치에서 말했어!”
“너는 지난달에 만났을 때도 그렇고, 네가 계속 누구의 위치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는지 좀 찬찬히 생각해 봐. 지금도 가해자가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해자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럴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잖아. 피해자는 어떨까? 성폭력 피해만으로도 억울한데, 피해 사실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예 훼손 가해자로 몰릴 판이야. 명예 훼손이라는 게 사실을 말했더라도 성립될 수 있다는 거 알지?”
“그래, 그렇다면서. 아휴…. 진짜 성폭력 사건은 너무 복잡해, 명예 훼손까지 걸리면 더 복잡해지는 거지?”
“복잡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명예 훼손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봐. 네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제대로 판단하려면!”
“알았어, 화내지 말고 쉽게 얘기해 줘. 여기 소주 하나만 더 주세요.”
명예 훼손 얘기를 하려니 목이 탄다. 피해자들이 명예 훼손 때문에 얼마나 말하기를 조심하고 정서적 위축감을 추가로 갖게 되는지, 생각할 때마다 화가 버럭버럭 난다.
“나는 성폭력 사건에서 성폭력 행위만큼 나쁜 게 가해자들의 명예 훼손 소송이라고 봐. 피해 여성들이 침묵하게 하거든! 생각해 봐. 어떤 문제가 사회에 드러나고 변화하려면, 그 문제로 인한 피해가 드러나야 하잖아. 그런데 성폭력은 그 특성상 목격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러니까 오로지 피해자가 입을 열어 말했을 때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이놈의 사회는 여전히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 우발론 등등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대한 시선이 더 매서운 경우가 많잖아. 그러니까 피해자임에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는 게 어렵단 말이야.
그럼에도 세상엔 늘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세상의 쑥덕거림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깨기 시작한 거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울면서 말하기 시작하고, 그녀를 본 또 다른 누군가가 다시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며 말하기 시작했단 말이야. 그 용기 있는 여성들이 침묵을 깨고 말하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반성폭력 운동 역사가 이만큼이라도 진전할 수 있었던 거야.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나마 성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겨우 마련됐고 말이야.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반성폭력 운동에서 피해자의 ‘말하기’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야. 그런데 그 어려운 ‘말하기’가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걸 다시 침묵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게 가해자들의 명예 훼손 소송인 거지.”
“음…. 성폭력 가해자들의 명예 훼손이 생각보다 정치적인 효과가 있는 거구나. 가해자들 명예 훼손이 최근에 시작된 문화인가?”
“예전부터 성폭력 가해자들은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징징거리긴 했지. 1980년대 중반 있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 정보과 형사였던 가해자 문귀동은 피해자를 명예 훼손과 무고죄로 고소했었지. 1990년대 초반 있었던 서울대 신 교수 사건,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100인위원회’도 그랬고. 그리고 최근 노조나 진보 정당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들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향해 명예 훼손 소송을 하는 추세고.”
“문귀동 같은 놈이나 운동권 놈들이나 마찬가지네, 명예 훼손에서는 말이야.”
“후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반갑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여성들이 겨우 피해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세상은 그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근엄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놀랍지 않아?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보다 남성의 명예를 더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를 보고 있으면, 중동의 ‘명예 살인’을 타자화하거나, 특수화할 수 없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돼. 남성의 명예가 여성의 안위(생명, 성폭력)보다 중요하다는 믿음은 인류의 문화 유산인가 봐. 유네스코에 등재하라고 연락해 볼까?”
“휴…. 성폭력이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나는 운동 사회 성폭력 가해 남성들이 사법부에 명예 훼손 소송을 내는 걸 보면 정말 웃겨. 부르주아 법정이라고, 우리의 현실은 법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법원의 부정의한 판단에 눈에 불을 켜던 이들인데 말이야. 그들이 눈앞의 이익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어제의 적’과 연맹을 구축하는 간사한 태도, 대단하지 않아? 자신의 계급성이나 정치적 입장을 버리고 남성 연대(호모 소셜)를 형성하는 모습 말이야. 언제나 정치적 입장은 팽팽한 첨예한 순간에 선명해지잖아. 아니다, 그게 바로 그들이 가진 남성이라는 ‘계급성’이며 ‘정치적 입장’인 거겠지.
한국 사회 반성폭력 운동을 진전시킨 건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용기 있게 말한 수많은 개별 여성들 그리고 여성 운동가들이었지.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그렇게 어렵게 만든 반성폭력 운동을 후퇴시키는 건 운동 사회 성폭력 가해자들인 거 같아. 뛰어난 조직력으로 자신을 지지해 주는 세력을 조직화하고, 그 ‘말발’들로 나쁜 판례들을 열심히 만들어 가면서 말이야. 그리고 가장 슬픈 순간은 뭔지 알아? 의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은 중립이라며, 가해자와 피해자들에게 거리를 두는 때야.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중립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좋아했냐?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동일하게 거리를 두는 게 중립일 수 있을까?”
녀석도 답답한 마음이 들었는지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자리를 일어선다.
녀석의 조끼 뒤에 쓰인 ‘단결 투쟁!’이라는 문구가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운동 사회 성폭력 피해자들은 누구와 단결해서, 누구를 향해 투쟁해야 하는 걸까?
반다- 일상의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등에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