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생활백서]
글_반다/사진_홍진훤
TV에서 낮에 있었던 집회 행진 장면이 보인다. 술집이라 소리를 죽여 놔서 자막만 보이지만, 3만 명이 거리를 메웠다고 쓰여 있다. 언젠가부터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생각했다. ‘마음을 모아 함께 구호를 외치는 이들 중에 성폭력 가해자도 있겠지’. 전경과 맞붙는 것보다 성폭력 가해자들과 얼굴을 마주치는 게 더 싫었다. 상대는 내가 ‘그 사건’을 안다는 걸 모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그 앞에서 어정쩡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는 내가 미웠다. 가해자가 단상 위에서 발언하고, 열렬한 함성을 받는다.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이가 전경들과 한판 몸싸움을 하곤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그걸 지켜보는 피해자와 대책위원들 마음에 서늘한 멍이 다시 드는 것 같다. 무기력한 우리가 싫었다, 쉽게 상처받는 우리가 미웠다.
“야,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소리도 안 나오는 TV를. 너네는 아직도 그렇게 성폭력 얘기를 하냐. 요즘 누가 운동 사회 성폭력 얘기를 해, 이 구닥다리들아! 그럴 힘 있으면 맛있는 안주에 술이나 더 먹자. 2차도 왔는데 이제 다른 얘기 하자.”
“안 돼, 얘가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내가 가해자와 공모하고 있대! 기가 막혀서 정말. 우리 교육국장이 올해 정치 학교 준비 안 하고 성폭력 대책위 들어가겠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진짜 어려운 상황인데도 토씨 하나 안 달고 그러라고 했다고. 그리고 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도 그렇고 대책위도 그렇고 마음에 안 드는 거 많거든. 근데 나 우리 조직에서 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안 했어. 그리고 그 가해자, 그 자식 한 번씩 만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런 나한테 공모라니!”
“그냥 술이나 마시자. 공모라는 말이 그렇게 억울하지 않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 얘길 뭐하러 더 하자는 거야. 관두자, 어차피 너희 조직 일이야. 나도 비겁할래, 신경 쓰기 싫어. 누군가가 또 열정적으로 싸우겠지. 그 싸움에 지지를 보낼게. 그리고 너는 대책위에 더 이상 걸림돌이나 되지 마. 너도 힘들다는 건 알겠는데, 그 사람들 너보다 몇 배로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 네가 상상하지 못하는 종류의 통증을 겪으면서 말이야. 내가 부탁할게. 피해자랑 대책위원들 힘들게 하지 마, 제발.”
“뭐야.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 말 하면 너한테 또 욕이나 먹겠지만. 가해자 그 지질한 놈을 아주 그냥 곤죽이 되게 두들겨 패 주고 싶은데, 솔직히 말하면 한편으로는 이해되기도 해. 남자라는 게 그런 게 있어 좀. 그리고 피해자나 대책위원들이 힘들 거라고 나도 생각해. 그런데 피해자 행동도 이해 안 되고, 대책위의 사건 처리 방식도 답답해. 나도 내가 욕했던 그 사람들처럼 되기는 싫어. 근데 마음만 찝찝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스트레스 받아서 미칠 것 같아. 내가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하겠어. 그리고 욕을 먹어도 너한테 먹는 게 낫지.”
“몇 마디만 할게. 내가 보기에 너는 성폭력이 이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는 생각보다 가해자와 피해자 둘의 문제라는 생각이 여전한 것 같아. 성폭력이 발생한 조직 문화를 성찰하면서 함께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성폭력 대책위에 교육국장이 들어가도록 한 게 너나 조직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거지, 조직의 ‘의무’가 아니라. 좀 더 솔직히 말해 볼까? 너 지난번에 대책위에서 성폭력 문제를 조용히 빠르게 처리해 주길 바란다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일까?”
“야, 그럼 피해자 입장에서 볼 때 성폭력 문제를 조용히 빠르게 푸는 게 좋지. 시끄럽게 동네방네 떠들면서 푸는 게 좋아?”
“그게 정말 피해자를 위한 마음 때문일까?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는 게 조직의 명예에 흠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성폭력 문제를 가능한 한 조용히 빨리 처리하고, 조직 역사에서 오려 내 버리고 싶어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성폭력 대책위 활동과 역사를 자꾸 삭제하고 싶은 ‘번외’ 편으로 만들려니까 더 힘든 거 아니겠냐고! 조직 안에서 성폭력 대책위가 꾸려지고 활동했다는 게 조직의 자부심이길 바라는 건 과도한 걸까? 성별 위계가 명백한 사회에서 성폭력은 어디서나 일어나. 거리, 일터, 가족, 연인…. 그런데 조직에서 성폭력 대책위를 꾸려 본 적 없다는 건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일까? 오히려 성폭력 문제를 조직적으로 풀지 않고, 피해자 개인의 고통으로 덮어 버렸다는 뜻일 가능성이 더 높은 거 아닐까.”
“야, 그럼 조직 연혁에 성폭력 대책위 활동을 기입해서 홈페이지에 게시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네가 알아서 잘 생각해 봐. 그리고 너, 성폭력 문제에 대해 조직 안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고 했지. 그걸 무슨 대책위와 피해자에 대한 배려라도 되는 듯 말하는데, 과연 그럴까? 너는 2차 가해니 뭐니 그런 얘기 듣기 싫어서, 정말 중요한 조직 내 토론을 회피하고 있는 거 아니야? 헛소리하는 것보다는 침묵이 나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처럼 가해자가 설치고 다니고, 피해자가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네가 침묵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현실은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피해자에게 치명적인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데, 너는 침묵하고 있어.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는 것 정도는 너도 알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 조직 사람들이 다 일손 놓고 성폭력 문제에 매달리라는 거야. 요즘 하루가 다르게 정세가 변하고 있어. 누군가는 그 현실도 읽어 내고, 투쟁 준비도 해야지.”
“그래 그런 식이지. 너희는 성폭력 문제를 대책위에 ‘아웃소싱’ 해 버리지! 너는 스스로 중립 가능한 위치라고 상정하고. 대책위가 문제를 풀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건 대책위가 잘못한 거고, 거기 들어가 있는 활동가가 원래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너희의 책임은 물타기 하고. 대책위에 참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영혼이 마모되는 경험을 하며, 소모되다가 사라지고.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여성 활동가가 나타나서 그 자리를 채우고, 그러다가 또 사라지고. 그러는 사이 너희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논하며 역량을 축적하고, 페미니스트들은 너희가 아웃소싱한 성폭력 문제에 묶여서 ‘사소한’ 토론에 목숨 걸고 있지.”
“흠…. 우리가 착취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우리 정직하자. 세상은 악행으로부터가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나빠진다는 말 기억나? 침묵의 공모 말이야.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우리 누구도 3자가 될 수 없다고 봐. 물론 이건 성폭력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지. 우리 현실에서 중립 따위는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라는 걸 어느새 잊은 거야? 피해자가 피해를 자각하고 일어설 때, 우리는 공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게 우리의 연대잖아. 연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공모를 자각은 하면서 살자.
한마디만 더 할게. 성폭력이 나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 없지만, ‘그게’ 성폭력인지 아닌지는 늘 논란이 되지. 성폭력 사건 앞에서 가해자의 행위를 비난하지만, 오히려 가해자에게 감정 이입하고, 피해자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흔해. 그리고 대책위를 구성했기 때문에 혹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그게 이야깃거리가 돼. 마지막으로 욕먹지 않는 대책위를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왜 그럴까?”
(워커스15호 201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