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생활백서]
글- 재윤/ 사진- 신희수
2013년 5월 1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선언하라 권리를! 외쳐라 평등 세상을! 123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 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당시 동성애자인권연대(현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 성소수자 권리 선언문 낭독을 요청했고, 성소수자 노동권팀 팀장을 맡고 있던 내가 연단에 올라 성소수자 권리 선언문을 낭독했다. 민주노총이 노동절에 성소수자 단체에 발언을 요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1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모였고 그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은 울림이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성소수자들에게도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는 일은 매우 당연하고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는 혐오와 편견 때문에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일터의 노동자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합니다. 차별금지법은 이미 제정되어야 할 기본법임에도 동성애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들에 의해 우리는 여전히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 우리는 성소수자의 이름으로, 성소수자의 모습으로 긍지를 지니고 노동할 권리가 있습니다. 비정상, 변태로 불리는 모욕을 당하지 않고 노동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애자 동료들이 우리를 지지하고 우리의 권리를 위해 함께 투쟁하길 바랍니다. 차별금지법은 모두의 평등을 위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혐오와 편견을 넘어, 평등한 권리를 위한 연대를 선언합니다.” – 2013년 노동절 성소수자 권리 선언문
“성소수자? 그게 뭔가요?”
노동운동과 연대 활동을 하다 보면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이 들 때가 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활동하는 재윤이라고 합니다.”
“성소수자? 그게 뭔가요?”
“아, 성소수자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간성 등의…”
“아, 그럼 재윤 씨도 동성애자인가요?”
“네 맞아요. 저 동성애자예요.”
보통 여기서부터 말문이 잦아든다. 송경동 시인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누군가의 두 눈동자와 마주할 때가 있다. 성소수자, 그중에서도 동성애자 남성이 노동운동 구성원이나 노동조합 조합원에게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어떤 지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거나 어떤 단체 소속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변하는 상대방의 태도란 때때로 꽤나 아프게 닿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노동운동 안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분명 노동운동 속에서 오래 존재했는데, 동지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존중받고 있을까? 가끔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이 운동 안에서 얼마나 같은 생각을 하고,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성실하게 고민하고 있을까?’, ‘우리가 정말 동지가 맞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나의 물음표에 다행스럽게도 느낌표를 던져 주는 노동자들이 있다. 지금은 열사가 된 기아자동차 화성 공장 사내하청노조 해고자 윤주형 동지를 비롯해, 한진중공업노조 한상철, 재능교육지부 유명자, 쌍용자동차노조 고동민, 사회보장정보원노조 봉혜영 동지 같은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아마 노동운동에서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를 보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고민
노동운동이나 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들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존재로서 존중한다고 해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고민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한 게이 친구는 노동조합 조합원인데 용기를 내서 동료 조합원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가 그 동료가 친구의 성정체성을 다른 동료들에게 동의 없이 말해 곤혹을 치렀다. ‘우리가 남이냐?’라는 식의 형님 문화가 노동조합 안에서 조합원의 사적인 영역까지 공유하게 만든 것 같다. 이런 문화 속에서 조합원 개인의 사적 영역은 원치 않게 침해되기도 한다. 노동조합 안의 문화가 변화해야 하는 지점이다.
그 변화라는 게 대단한 건 아니다. 2013년 가을쯤 쌍용자동차노조 고동민 동지와 친해지기 시작했을 때, 대한문 집회를 마치고 인근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를 하는데 그가 물었다. “얼마 전 내가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한다니까 옆지기가 ‘우리 자녀가 성소수자여도 지지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답을 하기가 어렵더라고. 자녀가 힘들게 사는 게 싫은 일이잖아. 근데 이런 것도 그 호모포비아, 그런 걸까?” “뭐 우리 엄마는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마냥 좋았겠어요?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 아닐까? 지금부터 그런 고민을 미리 한다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어떤 존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을 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나 조직이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고민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다른 이야기들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론 노동운동이나 노동조합이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나 고민을 나눌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들에게 ‘내가 나로서 이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너무 소중하고 애정이 있는 공간이나 관계 속에서 내가 나임을 선언하는 것은 간절하다. 그렇기에 사소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누군가의 커밍아웃은 성소수자 당사자만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의 응답을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들의 선언에 침묵하는 것에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희망을 찾고 싶다. 성소수자를 자연스럽게 배제하거나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 세상의 침묵에 많은 이들이 함께 침묵하지 않고, 성소수자들에게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함께 커밍아웃해 주길 바란다.